제4부 합기도의 역사 -2차 세계대전과 무농일여, 영친왕과의 만남

11. 제2차 대본교 탄압 사건과 재단법인 황무회 발족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두 권 냈는데 첫 책은 1933년에 낸 <무도연습>이었습니다. 저자명은 “우에시바 모리다카”, 관계자에게만 배포한 책이었고 제자인 구니고시 다카코가 삽화를 그려 넣은 기술서인데 역시 제자인 도미키 겐지가 정리 편집한 책이었습니다.

<무도연습> 영어가 곁들어진 걸로 봐서 복간본인 듯  
그리고 1935년에는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에서 히사 다쿠마 선생이 제작한 기록영화 <무도>가 만들어집니다.
기록영화 <무도>의 한 장면 – 왼쪽에 서있는 사람이 히사 다쿠마 선생

이렇게 순풍에 돛을 단 듯 뻗어갔던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황금기에 자칫하면 목숨마저 위험했던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1935년 12월 8일부터 일어난 제2차 대본교 탄압사건입니다. “사교집단 대본교를 지상에서 말살한다”는 내무성의 방침에 따라 데구치 오니사부로 이하 간부들이 전부 구속되고 신자들도 수천 명이 끌려가서 조사를 받는 등, 근대 종교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탄압이었습니다. 체포된 자는 혹심한 고문을 받고 그 중에는 옥사한 자도 있으며 정신이 이상해진 자 등이 속출했습니다. 아야베와 가메오카에 있던 신전 등의 시설은 약 한 달 간에 걸쳐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습니다.

완전히 파괴된 대본교 본부

일개 신흥종교단체를 왜 이렇게까지 심하게 탄압을 했을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당시 정부에서는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우익 군인들을 부추겨서 쿠데타를 기도한다고 단정하여 말살한 것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미 1932년에 5.15 사건이라는 해군 위관급 장교들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 이때는 육군이 호응하지 않아 사실 테러 정도로 그쳤습니다 – 이후로도 “황도파”와 “통제파”간의 알력 속에 언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불안한 정세였습니다. 게다가 1963년에 책으로 나온 “하시모토 대좌의 수기”에 따르면 사실은 1930년에 육군의 하시모토 긴고로가 일으킨 쿠데타 미수 사건에도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신자들을 모아 쿠데타에 동조하려고 한 정황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수기 외에 교차검증 할 자료가 없다는 점은 있습니다만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계속해서 우익 인사 및 우익 군인들과 접촉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1934년 7월 22일 데구치 오니사부로는 도쿄 구단에 있던 군인회관에서 쇼와신성회(昭和神聖会)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자신이 총관이 되고 부총관으로는 데구치 우치마루와 우치다 료헤이를 세워서 활동에 들어갑니다. 부총관 중 한 사람인 우치다 료헤이는 흑룡회라고 하는 극우단체의 중심인물이었는데 이 자는 아직 조선이 국권을 침탈당하기 이전에 조선의 대표적 친일단체 일진회의 회장 이용구와 함께 한일합방을 부르짖었던 인물입니다. 아무튼 이 쇼와신성회에 찬동하는 사람이 800만 명을 넘어서고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자 이것을 당시 정부는 국가전복 시도라고 보고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쇼와신성회 결성식 – 3000명이 결집
데구치 오니사부로, 도야마 미쓰루(일본 극우의 시조격 인물), 우치다 료헤이

따라서 데구치 오니사부로의 뜻에 따라 대일본 무도선양회를 만드는 등 대본교와 관계가 깊었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대본교 관련 무도계의 ‘거물’로 잡혀 들어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일단 경찰의 조사를 받기는 했지만 아무런 문책을 받지 않고 쉽게 풀려납니다. 어째서 우에시바 모리헤이만 이례적으로 그냥 풀려났는가에 대해서는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당시 각계의 유력자들에게 인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설이 있습니다만 직접적으로는 사건 당시 오사카부 경찰본부장이었던 도미타 겐지와 소네자키 경찰서장 모리타 기이치가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르는 제자였고 도미타 겐지가 상부를 설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도미타 겐지는 후일 출세를 거듭하여 나가노현 지사도 역임했으며 일본 패전 후에 공직에서 한때 추방되지만 추방에서 해제된 후에 자민당 중의원까지 합니다. 아무튼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제2차 대본교 탄압 사건에서도 무사히 몸을 보존하고 잠시 다나베로 몸을 피해 근신합니다. 하지만 이 일로 대일본 무도선양회와 다케다 도장은 해산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본교를 완전히 말살한 직후인 1936년 2월 26일 결국 육군장교들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쿠데타 자체는 실패로 끝나지만 이후로 내각이 군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어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폭주하고 맙니다.

1936년 6월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 도장에 다케다 소카쿠가 또 불쑥 나타나서 자신이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가르친 사람이라고 나섭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다케다 소카쿠를 만나지도 않고 그냥 도쿄로 가버리며 이후로 아사히 신문사에서는 다케다 소카쿠가 2년 8개월 동안 지도를 합니다. 하지만 왜 다케다 소카쿠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교체하게 됐는지는 아직도 그 전후사정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때 이후로 다케다 소카쿠의 지도를 받은 히사 다쿠마는 1939년 3월 26일에 대동류 합기유술 면허개전을 받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아사히 신문사에서 대동류 합기유술을 지도하기 시작한 것이 1934년이므로 이때 입문한 히사 다쿠마는 겨우 5년 만에 면허개전을 받은 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히사 다쿠마가 면허개전을 받은 날 함께 면허개전을 받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히사 다쿠마의 직장 상사였던 도네다치 마사오입니다.
이 사람은 이후에 후진 양성에 관한 기록도 없고 대동류와 관련하여 별다른 활동도 없이 몇 년 뒤인 1943년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히사 다쿠마에게 면허개전을 수여할 때 직장 내 서열을 생각해서 다케다 소카쿠가 배려 차원에서 면허를 준 게 아닌가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도 아사히 신문사에서 함께 지도를 받았고 수련하는 사진도 남아 있습니다.

다케다 소카쿠와 히사 다쿠마 – 면허개전 수여 기념사진
함께 면허개전을 받은 도네다치 마사오

1937년에는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해에 만주국에 있던 건국대학에 합기무도가 정식으로 채용됨에 따라 도미키 겐지 선생이 조교수로 채용되고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건국대학 무도 고문이 됩니다. 사실 이때 건국대학에 조교수로 채용될 예정이었던 사람은 시라타 린지로 였습니다만 군대에 소집 당하는 바람에 도미키 겐지가 대신 가게 된 것입니다. 이때 건국대학에서 합기무도에 입문한 제자로는 오쿠무라 시게노부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던 가시마신토류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 해였습니다.

1938년 1월에는 육군 도야마 학교 교장의 요청으로 두 번째 기술서인 <무도>를 저술하였고 7월에 육군 나카노 학교가 개교하면서 이 학교의 교관이 됩니다. 그런데 이 육군 나카노 학교는 사실 육군의 첩보원 양성 기관이었습니다. 이 학교의 교관 중에는 고가류 인술 제14대 후지타 세이코도 있었으며 우에시바 선생의 고제인 도미키 겐지도 교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무도>에 수록된 사진 – 상대는 시오다 고조
1939년에는 만주국 수도에서 열린 공개연무대회에 초대를 받아 연무를 보입니다. 이때의 대회는 검도의 다카노 사사부로, 나카야마 하쿠도, 유도의 나가오카 히데이치를 비롯한 호화출연진이 모여 크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연무대회가 무사히 끝난 후 만주에 있던 무도가들의 청을 받아들여서 중앙은행도장에서 다시 연무를 보입니다. 당시에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기술을 받은 사람이 오랜 내제자인 이노우에 요이치로였는데 연무가 너무 흐르는 듯이 시원시원했기 때문에 그걸 보고 있던 무도가들 사이에 “짜고 하는 거 아닌가…”하는 웅성임이 일었습니다.
그걸 알아차린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아무나 한 명 나와서 덤벼보라고 했는데 이때 나서게 된 것이 텐류-와쿠타 사부로였습니다.

텐류(天龍) – 본명은 와쿠타 사부로

와쿠타 사부로는 원래 스모 선수로 세키와케(서열상 3위)의 자리에까지 오른 명선수였는데 스모협회를 상대로 파업을 벌이는 등 스모개혁운동을 하다가 실패한 후에 만주국에 와있었습니다. 그런데 와쿠타 사부로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내민 왼손목을 잡는 순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느끼고는 바로 패배를 인정하고 제자가 됩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이 와쿠타 사부로를 제자로써 대단히 아끼고 칭찬을 많이 했으며 각지의 출장지도에도 많이 데리고 다녔습니다.

왼쪽부터 우에시바 깃쇼마루, 아카자와 젠자부로, 텐류
그리고 1939년에 황무관도장을 재단법인 황무회로 설립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때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도미타 겐지와 오카다 고사부로, 후지타 긴야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0년 봄에 후생성으로부터 정식 설립인가가 납니다. 초대 회장은 다케시타 이사무였으며 부회장은 사단장을 역임한 군출신 유력자인 하야시 가쓰라였습니다. 그 외에도 이사, 평의원에는 내각을 몇 개나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쟁쟁한 사람들이 즐비했습니다.
이 재단 설립을 전후한 시기가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는 표면적으로 가장 화려한 시기였습니다. 여러 공적 기관에 관계했는데 후생성 무도 진흥 위원회 위원,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무대회 일본무도 대표(1942년), 만주국 신무전 고문(1941년) 등을 했습니다.

1942년 8월 12일 – 만주 건국대학 신무전 앞에서 –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함께 있는 도미키 겐지, 오바 히데오, 후지타 마사타케

12. 전쟁의 격화와 이와마 이주, 합기신사 건립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1940년부터 이바라기현 이와마에 합기신사 건설에 착수합니다. 땅은 이미 1935년에 3000평 정도를 사두었습니다만 각지로 돌아다니느라 그대로 방치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0년부터 주변 땅을 추가로 구입하고 합기신사와 도장을 세울 준비를 합니다.
중일전쟁이 격화하면서 황무관도장의 내제자들도 전쟁에 징집되어 줄줄이 떠나게 됩니다. 아카자와 젠자부로, 시오다 고조도 전쟁터로 떠나고 새로운 제자들이 들어오는데 이때 들어온 제자들 중에 유명한 이로는 도헤이 고이치(1939년 입문), 히라이 미노루(1939년 입문), 오오사와 기사부로(1941년), 아베 다다시(1942년 입문), 스나도마리 간슈(1942년 입문) 등이 있습니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장제스(장개석)와 화해하고 중국에서는 발을 빼려고 뒤에서 손을 썼는데 이때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제자인 유카와 츠토무와 함께 은밀하게 중국으로 건너가서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이었던 하타 슌로쿠 대장과 연락을 취하며 중국과 화평교섭을 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1941년 당시엔 시오다 고조도 하타 슌로쿠 대장의 비서로써 중국, 대만, 보르네오섬 등에 파견되어 움직였기 때문에 연계해서 활동했을지도 모릅니다. 일설에는 밀사로써 직접 장제스와 접촉하려는 단계까지 갔다고 합니다만 결국 때가 늦어 뜻을 이루지 못한 걸로 보입니다.

1941년 12월 7일 하와이의 진주만 공습

전황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하고 황무관도장은 신규 입문자가 있기는 했지만 전쟁터로 나가는 이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옛날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시하 통제의 파도는 무도계에도 밀어닥쳤습니다. 1942년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합기무도는 정부 외곽단체인 대일본 무덕회에 통합되게 된 것입니다.
일본 군국주의 정부는 무도계에까지 파시즘을 넓히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참을 수 없었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이와마로 옮겨 살기로 합니다. 무덕회에는 섭외 수단이 뛰어났던 당시 도장 총무이자 제자인 히라이 미노루를 대리인으로 보내고 우에시바 모리헤이 자신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이와마로 칩거합니다. 그리고 이때 무덕회에서 합기무도가 합기도부로 통합되면서 처음으로 합기도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히라이 미노루가 재편한 합기도는 전쟁이 끝난 후에 무덕회가 해산되면서 <광륜동 합기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육군 나카노 학교, 육군 헌병학교 등 군인들에게 무술을 지도하기는 했지만 전쟁은 자신의 신념과 충돌하기 때문에 내적 갈등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1943년 초두에 육군의 고관이 우에시바 선생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근대전, 특히 백병전에서 승리를 얻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에시바 선생이 전국민에게 합기와 합기검을 가르치고 앞장서 주시면 좋겠다.” 이 말을 듣고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창자가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하며 “아무리 국가를 위해서라고 해도 그 자가 말하는 마음으로 검을 배우면 국민 모두가 악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황무관도장은 아들인 깃쇼마루에게 맡기고 아내인 하츠와 이와마로 가서 농가를 개수해 단 둘이 생활을 시작합니다. 게다가 사는 곳엔 커다란 신전을 임시로 안치했기 때문에 정작 생활공간은 대단히 좁았습니다만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것이 합기도의 산실이라며 제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너무나 기분 좋게 얘기했습니다.
농가를 개수한 작은 집을 합기도의 산실이라고 생각한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겐 세 가지 구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합기신사를 건립하는 일이었고 두 번째는 야외도장을 만드는 일, 세 번째는 무농일여(武農一如)의 생활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원래부터 “나는 농사꾼이다”가 입버릇이었습니다. 중농의 집안에 태어나 홋카이도까지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했고 존경하는 스승인 데구치 오니사부로도 농본주의자였습니다.

데구치 오니사부로의 뜻을 받아 만들었던 대일본 무도선양회의 거점 다케다 도장도 무농일여를 위한 야외도장이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농사일은 무도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일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합기신사 건립은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겐 합기도를 낳게 하고 계속 지켜주신 43위의 신들에 대한 감사의 증표였습니다. 합기신사 건립을 전후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재야 언령학자인 나카니시 고운과 친하게 지냅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말하는 “무산합기”라는 발상은 일본의 고대 신화이자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 의한 것이 매우 크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자신의 호를 “모리타카(守高)”에서 “츠네모리(常盛)”로 바꾼 것도 “고사기”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1940년 12월 14일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나카니시 고운의 선도로 부정한 것을 털어내고 수호신의 강령을 감득하는 의식을 치룹니다. 이 의식에 쓰인 두루마리에 기록된 신은 모두 43위나 되는데 제일 먼저 언급되는 사루타히코노오오미카미(猿田彦大神)와 약간 뒤쪽에서 언급되는 아메노무라쿠모구귀사무하라용왕(天叢雲九鬼さむはら龍王)은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대본교에 입교할 당시에 이미 대본교의 수행법인 진혼귀신법(鎮魂帰神法)으로 신내림을 체험하였습니다. 나중에 이 진혼귀신법이 제1차 대본교 탄압의 빌미가 되자 금지하긴 했습니다만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그 전에 입교하였기 때문에 진혼귀신법을 체험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신전무술-삼종의 신기에 숨겨진 남조의 비전>이라는 책과 <구귀문서의 연구>라는 책에 따르면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구귀신류(九鬼神流) 무술도 수행했던 것으로 나옵니다.

구귀신류는 신도계 고무술로써 영술(靈術)도 포함된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 무술은 대본교의 본거지였던 아야베 지방의 번주인 구키(九鬼) 가문에 전승되는 무술이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아야베가 아닌 도쿄 아사쿠사에서 에도계 구귀신류를 배웠다고 합니다만 나중에 도쿄 요츠야 아라키쵸 대본교 도장에서 신도관련 행사가 열렸는데, 그곳에서 만난 구키 가문의 후계자 구키 다카하루에게 자신이 배운 무술이 구귀신류라고 밝혔다는 것입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래저래 신도와 관계가 깊었고 그 신앙심이 대단히 깊었습니다. 합기신사에 모실 신전은 당시 이와마에 있던 마츠모토라는 목수가 만들었는데 신전이 완성되어 가져오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그때 큰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몸을 일으켜 목소리 높혀 축문을 주상하여 맞이했습니다.

영친왕(英親王, 李垠殿下 1897~1970)

합기신사에 이어 야외도장도 많은 이의 도움을 얻어 건설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도움을 준 사람 중에 하나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李垠)이었습니다. 이은은 후지타 긴야, 하야시 가쓰라 육군 중장, 니시 가쓰조 등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친교를 맺은 이들과 접촉이 있었는데 그 중에 특히 니시식 건강법 제창자인 니시 가쓰조가 합기도를 권했습니다.

니시 가쓰조(西勝造1884〜1959)

이은은 1943년에 처음 가족들을 이끌고 황무관도장에 찾아와 합기도를 참관했습니다. 그리고 니시 가쓰조의 설명을 들으며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연무를 보고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자택으로 불러 합기도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우에시바 모리헤이 대신에 제자인 오사와 기사부로가 가기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영친왕 이은은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기에 합기신사와 야외도장 건설에 금일봉 백만 엔을 하사합니다 – 사실 우에시바 깃쇼마루 선생이 쓴 책에는 100엔이라고 적혀 있고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 자서전에는 백만 엔으로 나와 있는데 100엔은 아무래도 너무 적은 금액이라 백만 엔이 맞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이은은 조선이 망한 후에 신분상으로는 일본의 왕족이었고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이 되어 1941년 제51사단장을 거쳐 1943년에는 제1항공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1936년 2.26 쿠데타 사건 때는 진압군으로써 쿠데타군을 진압한 일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도움을 얻어 완성된 야외도장에는 <합기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도장인 동시에 농장이었기 때문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수행을 계속합니다.

꽃에 물을 주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그리고 1943년 5월 3일에 대동류 합기유술 스승이었던 다케다 소카쿠가 아오모리에서 사망합니다만 당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큰 병을 앓고 있어서 다케다 소카쿠의 장례식에는 가지 않습니다.

  다음편에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전한 후에 재단법인 합기회를 발족하고 제2대 도주인 우에시바 깃쇼마루를 중심으로 합기도가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겠습니다.

<참고문헌> :
개정신판 합기도 교본 – 합기도의 역사와 전개 – 우에시바 깃쇼마루 저
월간 비전 2008년 12월호 외 몇 개의 합기도 관련 특집기사
기의 확립 – 나카무라 텐푸와 우에시바 모리헤이 – 도헤이 고이치 저
합기도 수행 – 시오다 고조 저
투명한 힘 – 기무라 다쓰오 저
인터넷 사이트 R 영계이야기.네트 – 데구치 오니사부로 대도서관
인터넷 사이트 임협대사전 야쿠자위키
합기도 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전 – 우에시바 깃쇼마루 저
논문  – 합기도 형성과정 연구 (1) – 시시다 후미아키 (와세다 대학)
신음류를 철학하다 – 에도 야규의 심법과 도법(1) – 아카바네 다쓰오
합기도에 살다 – 타다 히로시 저
합기진수 – 아이키, 마이키, 신인합일이라는 비법 – 야스에 구니오 저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합기도 – 직제자들이 말하는 개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