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합기도의 역사

우에시바도장(植芝道場) 현재 합기도 세계본부도장 이전에 도장모습

1.개요

합기도는 일본의 무도가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창시한 무도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무도명이 처음부터 합기도였던 것은 아니며 몇 번의 변천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지금 우리가 수련하는 합기도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에게서 시작한 것이므로 합기도의 역사를 말할 때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생애 전반을 함께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무도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첫번째 대동류 합기유술의 다케다 소카쿠 선생을 만난 일과 두번째 신도계 신흥종교인 대본교의 데구치 오니사부로 성사를 만난 일이며 대동류와 대본교가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무술에 크게 관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이와마로 거처를 옮겨서 은거하신 후 제2대 도주인 우에시바 깃쇼마루 선생이 발전시킨 합기도는 또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흐름을 따라 합기도의 역사에 대해 그 발자취를 더듬어 가보겠습니다.

합기도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 옹이 탄생한 곳(다나베시 와카야마현)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17세가 되자 청운의 뜻을 품고 도쿄로 상경을 합니다. 말리는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상경한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꿈이란 큰 상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도쿄의 아사쿠사에 친척이 작은 문방구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점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기록으로는 19세 때 아버지의 도움으로 아사쿠사에 자신의 문방구점인 ‘우에시바 상회’를 열어서 운영했다고 하는데, 17세에 상경하여 점원으로 일하다가 19세 때 자신의 가게를 가진 것인지 어떤지는 확인을 못했습니다. 아무튼 19세 때는 결혼도 하고 낮에는 열심히 장사를 하면서 밤에는 유술 도장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첫 무술 선생은 제2대 도주가 쓴 책에는 기도류의 도바리 다키사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도자와 도쿠사부로라는 선생에게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대 도주가 조사를 해보니 그 당시의 유술가 이름 중에 도자와 도쿠사부로라는 유술가를 찾을 수가 없어서 당시 아사쿠사에서 유명했던 도바리 다키사부로의 이름을 잘못 기억하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 책에는 기도류의 도바리 다키사부로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오오미야 시로라는 사람이 당시 도쿄에서 열린 유술대회에 출전했던 선수 명단에서 도자와 도쿠사부로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그 대회가 천신진양류 계열 대회였기 때문에 이때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도자와 도쿠사부로에게 천신진양류를 배웠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때 병행하여 야규신음류를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고 가토다신음류를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누구에게 얼마나 배웠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유술에 입문한 지 불과 4개월만에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각기병에도 걸리고 자기불신에 빠졌으며 결국엔 1901년에 일어난 정치가 호시 도오루 암살 사건에 충격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고 하는데, 당시 대낮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벌어진 암살 사건은 몸도 정신도 피폐한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는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꿈이 무너지고 고향에 돌아온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우선 체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매일 맨발로 산길을 4킬로미터 걷기로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병도 낫고 산길을 끝까지 뛰어서 완주할 정도로 체력이 붙게 됩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총검도

2.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탄생과 성장과정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1883년 12월 14일 현재의 다나베시인 와카야마현 니시노타니 마을에서 우에시바 요로쿠의 장남으로 태어나는데 위로 누나가 셋 있었고 여동생도 한 명 있었으니 사실상 넷째이며 외동아들이었습니다. 우에시바 집안은 중농이었다고 하는 걸 보면 무사 집안이 아닙니다.
소작농이 아니라 중농이라는 것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는 농가이므로 굳이 따지자면 지주 집안입니다. 그런데 제2대 도주인 우에시바 깃쇼마루 선생이 쓴 책에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태어난 기이 지방은 예로부터 신사와 불각이 많은 신성한 땅이며 겐페이 시대, 남북조시대, 전국시대 등등에서 전쟁에 패한 무사들이 흘러 들어와 살았던 땅이라고 하여 은근히 원래는 무사 집안이었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에시바 선생의 아내인 하츠가 세이와 겐지의 피를 잇는 다케다 씨의 일족이라며 역시 무사 집안과의 관련성을 비추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부모는 구마노 신사의 신이 점지해준 자식이라 여겨서 애지중지하였는데 14,5세 때까지는 매우 몸이 작고 약해서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17세가 되자 청운의 뜻을 품고 도쿄로 상경을 합니다. 말리는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상경한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꿈이란 큰 상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도쿄의 아사쿠사에 친척이 작은 문방구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점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기록으로는 19세 때 아버지의 도움으로 아사쿠사에 자신의 문방구점인 ‘우에시바 상회’를 열어서 운영했다고 하는데, 17세에 상경하여 점원으로 일하다가 19세 때 자신의 가게를 가진 것인지 어떤지는 확인을 못했습니다.

도쿄 아사쿠사 (2013년)

아무튼 19세 때는 결혼도 하고 낮에는 열심히 장사를 하면서 밤에는 유술 도장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첫 무술 선생은 제2대 도주가 쓴 책에는 기도류의 도바리 다키사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도자와 도쿠사부로라는 선생에게 배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2대 도주가 조사를 해보니 그 당시의 유술가 이름 중에 도자와 도쿠사부로라는 유술가를 찾을 수가 없어서 당시 아사쿠사에서 유명했던 도바리 다키사부로의 이름을 잘못 기억하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 책에는 기도류의 도바리 다키사부로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오오미야 시로라는 사람이 당시 도쿄에서 열린 유술대회에 출전했던 선수 명단에서 도자와 도쿠사부로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그 대회가 천신진양류 계열 대회였기 때문에 이때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도자와 도쿠사부로에게 천신진양류를 배웠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때 병행하여 야규신음류를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고 가토다신음류를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누구에게 얼마나 배웠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신빙성은 낮아 보입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유술에 입문한 지 불과 4개월만에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각기병에도 걸리고 자기불신에 빠졌으며 결국엔 1901년에 일어난 정치가 호시 도오루 암살 사건에 충격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고 하는데요. 당시 대낮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벌어진 암살 사건은 몸도 정신도 피폐한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는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꿈이 무너지고 고향에 돌아온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우선 체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매일 맨발로 산길을 4킬로미터 걷기로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병도 낫고 산길을 끝까지 뛰어서 완주할 정도로 체력이 붙게 됩니다.

3.군입대

1903년에 스무 살이 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군대에 입대하게 됩니다. 원래는 키가 작아서 징병검사에서 합격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만 러일전쟁이 곧 일어날 판이었기 때문에 키 빼고는 신체 건강한 본인의 강한 희망에 따라 징병검사에 합격, 와카야마 제61연대에 입대합니다. 산행으로 체력을 다진 모리헤이는 부대에서 달리기, 체조, 총검술 등 모든 훈련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혈기왕성했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최전선 배치를 희망하지만 부대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우수한 병사를 양성하도록 교관으로 임명합니다. 하지만 모리헤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최전선 배치를 희망하였고 1905년 만주로 러일전쟁에 나갑니다. 그러나 전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휴전이 되어 버려서 마적과 소규모 전투를 조금 벌일 뿐 주로 종전처리나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 기왕에 만주에 온 것을 기회 삼아 모리헤이는 만주지방의 무술과 무기를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모리헤이는 1905년에 귀국하여 1906년에 제대를 합니다만 그 사이에 전쟁에 이긴 것도 있고 우수한 병사로 인정받아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택의 지원을 받아 개인 비용으로 스모장을 설치하여 휴가 때면 부하를 데리고 나와 스모대회를 열었습니다. 군생활 중 틈을 내어 오사카 사카이에 있던 나카이 마사카츠 사범에게 사사하여 고토파 야규류(야규 심안류)를 배우고 제대 후인 1908년에 면허를 받게 됩니다.

면허를 발행한 사람은 나카이 사범이 아니라 츠보이 마사노스케인데 그 이유가 나카이 사범은 지도자격은 있었지만 면허 발행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그 스승과 줄이 닿는 츠보이 선생이 발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면허가 아니라 초단 면장이라고도 하고 그냥 두루마리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군생활 4년 동안 드디어 세상의 인정을 받고 자신감도 붙었습니다. 제대 후에도 제61연대의 부연대장이 재입대 할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더 큰 꿈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훗카이도라는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더에이트투어

4.홋카이도 개척단

러일전쟁이 끝난 후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뭐든지 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쳤습니다. 고향인 다나베에 무술가가 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융숭하게 대접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당시 다나베에 들른 강도관 초단인 다카기 기요이치를 자택에 머물게 하고 청년들을 여럿 모아서 청년회관을 도장 삼아 유도 강습회를 열기도 했다고 제2대 도주의 책에 쓰여 있습니다. 다만 유도가 다카기 기요이치가 강도관에 입문한 것은 1914년이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조금 의문시 되고 있습니다. 유도와 관련해서 이것과는 다른 증언이 있는데 증언자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직제자이면서 본부도장 수석사범이었던 도헤이 고이치 선생입니다. 원래 와카야마의 다나베에는 강도관이 유도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도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본교 성사 데구치 오니사부로

그곳을 맡은 인물이 스즈키 신고라는 사람이었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군대를 제대하고 귀국한 뒤에 스즈키 신고에게 입문하여 유도를 배웠다는 겁니다. 도헤이 선생이 우에시바 선생을 수행하여 다나베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스즈키 선생과 우에시바 선생의 대화를 들은 내용이 도헤이 선생의 책에 나옵니다.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대동류와 대본교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게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아무튼 유도에 관해서는 다른 선생에게 배웠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에 이주해서 개척할 개척민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에 응모하기로 합니다. 사실 다나베뿐 아니라 기슈 지방은 산과 바다뿐이라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남양제도, 하와이, 북미, 남미 등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는 10가구 이상이 모여 집단이주하는 경우에는 특별히 편의를 봐주겠다고 하니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것이 기회라고 여긴 듯합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먼저 현지 상황을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한 모리헤이는 1910년 동지 몇 사람과 함께 홋카이도로 건너갑니다. 모리헤이가 본 토지는 문베츠군 가미유베츠 마을의 시라타키 벌판이었습니다. 웅대한 벌판을 바라보며 이 땅이야말로 자신의 꿈을 펼칠 곳이라고 여기고 바로 다나베로 돌아가 이주자를 모집하기 시작합니다. 불과 2,3일만에 70명 가까이 이주자를 모집하여 담당관리도 놀랐다고 하는데요. 홋카이도의 시라타키 마을 역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912년, 시라타키 벌판 개척계획으로 먼저 해방된 구 시라타키, 시모시라타키를 제외한 중심지 역내해방에 따라 단독이주도 물론이거니와 동년 3월에 와카야마현에서 단체이주한(단체장=우에시바 모리헤이) 54가구가 대거 이주, 시라타키 호로카 입구 부근에서 가미시라타키에 이르는 중앙도로를 따라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후일, 이 와카야마현 단체이주자들이 들어온 땅을 중심지로 삼았다.”

영화 7인의 사무라이 한장면

홋카이도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두 가지 큰 체험을 합니다. 하나는 이 땅을 개척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홋카이도에 와있던 무술가에게 무술을 배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홋카이도는 일본 정부의 식민지 같은 땅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주군을 잃은 옛 막부의 무사들 중에 실의에 빠져 홋카이도에 흘러 들어온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달인, 명인도 많았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때부터 1919년까지 8년 동안 벌판을 개척하면서 무술의 비기를 전하는 사람들을 다수 만날 수 있었다고 제2대 도주의 책에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저런 부랑자와 폭력배들이 흘러 들어오는 바람에 치안이 매우 안 좋아서 현지의 경찰도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하지요. 대동류의 다케다 소카쿠 선생도 그런 이유로 경찰의 초빙을 받아서 해결사 역할을 하기 위해 홋카이도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04년에 홋카이도를 주무대로 도쿄까지 세력을 뻗고 있던 폭력조직 마루모파를 다케다 소카쿠 혼자서 쳐들어가 제압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1910년에 폭력조직 마루모파는 불법도박장 개설 혐의로 하코다테 경찰의 일제검거에 소탕되었다는 게 있습니다. 최고간부 포함 약 80명이 검거되어 실형을 받아 이후로 쇠퇴하여 소멸했습니다. 실제 기록과 전해지는 이야기 사이에서 6년의 갭이 있기 때문에 전부 다 믿기에는 좀 어려워 보이기는 합니다. 아무튼 드디어 다케다 소카쿠 옹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과 다케다 소카쿠 선생이 만난 이야기는 다음 차례에 해보겠습니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바로가기>

김의수
㈜Contents Lab Zavak 실장 SBS 방송 아카데미 제8기 일본어 영상번역과정 졸업 / 최우수상 수상 SBS 드래곤볼 시리즈 더빙번역 투니버스 격투왕 바키 더빙번역 바람의 검심 DVD 부클릿 번역 감수 그 외 일본 영화 및 애니메이션의 DVD, BD 자막 번역 다수 E-Mail: yuuj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