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합기도의 역사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무도보급과 검술수련

  1. 대동류 유술에서 대동류 합기 유술로

이쯤에서 다케다 소카쿠 선생의 무술이 대동류 유술에서 대동류 합기유술로 이름이 바뀐 연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제2대 도주인 우에시바 깃쇼마루 선생의 여러 저서를 보면 대동류 유술의 이름이 대동류 합기유술로 바뀐 시기가 바로 1922년 다케다 선생이 갑자기 아야베에 불쑥 나타나서 우에시바숙에 눌러 앉았던 시기입니다. 이때 약 5개월에 걸쳐 다케다 소카쿠는 우에시바숙에서 대동류를 지도하였고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교수대리를 허락받습니다. 이때 받은 목록이 <합기유술 비전오의>입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1916년에 받은 <비전오의> 목록에는 어디에도 합기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1922년에 처음으로 대동류에 ‘합기’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조카인 이노우에 노리아키와 제2대 도주 우에시바 깃쇼마루의 증언에 따르면 ‘대동류 유술’에 ‘합기’라는 말을 붙이게 한 건 대본교의 데구치 오니사부로였습니다.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합기다”라고 한 말을 듣고 이걸 다시 다케다 선생에게 건의하여 ‘대동류 유술’이 ‘대동류 합기유술’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1913년에 사가와 네노키치가 다케다 선생에게 배운 기술을 기록한 노트에는 ‘합기를 건다’라는 말이 이미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가와 네노키치의 노트 – ‘합기를 걸어 뒤로 돌아 던진다’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1922년보다 훨씬 이전 단계에서 대동류 유술에서는 이미 ‘합기’라는 말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2대 도주가 쓴 ‘모리헤이전’에 따르면 정작 우에시바 모리헤이 자신은 자기 무술을 1922년에 정식으로 ‘합기무술’이라고 칭했고 일반인들에게는 ‘우에시바류 합기무술’로 통했습니다. 더군다나 후일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말한 바에 따르면 “합기라는 말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합(合)은 애(愛)에 통하기 때문에 – 합(合)과 애(愛)는 둘 다 일본어로 발음이 아이(あい)입니다 –

내가 터득한 독특한 도(道)를 합기도라고 부르기로 했다. 따라서 예전의 무예자가 말한 합기와 내가 말하는 합기는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봐서 다케다 소카쿠 선생의 합기와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합기는 같은 말이라도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9. 합기유술에서 합기도로

중국에서 귀국한 후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아야베로 돌아가 우에시바숙에서 지도를 하는 한편, 무도단련을 계속했습니다. 자기 주위에 스폰지볼을 8개 정도 매달고 연습용 창으로 찌르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중국에서 돌아온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대본교의 명성은 더 높아졌고 아야베를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졌으며 당연히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무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많이 모였습니다.

우에시바숙 수련모습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무술을 배우려는 사람은 대략 세 가지 부류였는데 하나는 대본교 신앙의 일환으로 무술을 수행하려는 대본교 신자, 그리고 오로지 무술 수행에 뜻을 둔 내제자 지망생, 또한 무술에 관심이 많은 각계 지도자들, 특히 군인 들이었습니다. 이때 유술과 검술 수행자들이 찾아와서 시합을 신청하는 일이 많았는데 모조리 다 격파하고 제자로 삼습니다.

근처에 마이즈루 군항이 있어서 해군 방문자가 많았습니다. 이때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1925년에 해군장교이자 검도교사가 찾아와서 시합을 합니다. 검도교사는 목검을 들고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맨손으로 상대를 하였는데 검도교사의 맹렬한 검을 전부 다 피하고 한 대도 맞지 않았습니다. 이때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내몽고에서 겪은 일과 같은 일을 체험하는데 “상대의 검이 날아오기 전에 하얀 빛 알갱이가 날아와서 그걸 피했더니 그 뒤에 검이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이 시합이 끝난 후에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겪은 신비체험입니다.

우물가에서 땀을 닦고 마당을 가로질러 감나무 있는 곳까지 걸어왔는데 갑자기 몸이 안 움직여지고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됐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개조구술실기-창시자가 말한 것을 그대로 기록한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고 땅에서 황금의 기가 솟아 올라 내 몸을 감싸면서 내 몸이 황금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심신이 가벼워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무슨 뜻인지 알게 됐으며 이 우주를 창조한 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무도의 근원은 신의 사랑-만유애호의 정신-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어 법열의 눈물이 흘러 멈추지 않았다.

무도라는 것은 힘이나 흉기로 남을 쓰러뜨리거나
무기로 세상을 파괴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이날 이후의 나는 지구 전체가 내 집이며, 일월성신이 모조리 내것으로 느껴지고 지위와 명예, 재산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강해지겠다는 집착도 일체 없어졌다. 무도라는 것은 힘이나 흉기로 남을 쓰러뜨리거나 무기로 세상을 파괴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무도란 우주의 기를 가다듬고 삼라만상을 바르게 생산하며 지키고 기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이후로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무술은 무도로 발전하여 인류의 영지로써 크게 비약하게 됩니다.

10. 무도보급과 도쿄 이주

당시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무술을 열렬하게 선전했던 사람이 대본교 신자이면서 해군중장이었던 아사노 마사야스였습니다. 그리고 아사노 중장의 해병 동기였던 해군대장 다케시타 이사무도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무술에 심취하여 특히 다케시타 이사무 해군대장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925년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다케시타 이사무의 초청을 받아 전직 수상이었던 야마모토 곤노효에 백작 앞에서 연무를 합니다. 이때 야마모토 백작은 특히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창술 연무에 크게 감동하고 이 인연으로 아오야마 어소(황족, 장군, 대신 등의 거처)에서 21일간 강습회을 열어 지도합니다.

그런데 이 강습회 도중에 내무성에서 클레임이 들어왔습니다. 우에시바 선생이 대본교와 관계가 있다는 정보가 경찰 라인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야마모토 백작은 이 클레임을 일소에 부칠 생각이었지만 정부와 대본교의 관계를 생각하면 문제로 번질 우려가 컸고 각료 회의에까지 소문이 퍼져 버렸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비분강개했지만 후원자인 야마모토 백작과 야마시타 대장까지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아야베로 물러갑니다.

여기서 잠깐 다케시타 이사무 해군대장이 기록한 “다케시타 일기”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다케시타 일기”에서 우에시바 선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5년 12월 1일입니다.

다케시타 이사무 해군대장
해군 외교관 다케시타 이사무 일기

12월 1일 (쾌청) <오전 11시경 아사노 씨가 우에시바 모리헤이, 이노우에 요이치로 씨와 함께 내방하여 대동류 유도의 형을 보이다. 잘 연구해볼 만한 것으로 보이며 수련할 가치가 충분하도다. 내일부터 배우기로 약속하다> 여기에서 ‘대동류 유도’라고 한 것은 처음에 다케시타 이사무가 유술을 유도로 혼동하거나 같은 것으로 여겼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의 일기에서 다케시타 이사무는 우에시바 선생에게 배운 무술을 대동류 유술, 야와라, 합기유술 등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에시바 깃쇼마루 선생의 말에 따르면 1922년부터 “합기무술”이라고 칭했다는데 1925년의 시점에서는 전혀 그 이름이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때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지도하던 무술은 분명히 “대동류 합기유술”이었으며 이름을 바꾸어 새로운 유파명을 사용한 것은 1928년 2월 17일입니다. “다케시타 일기”에서 그 기록을 보겠습니다.

쇼와3년(1928년) 2월 17일(맑음) <오전 유술수련. 오늘부터 상생회에서 상생류 합기유술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오후 다시 유술수련> 대동류에서 상생류로 이름을 바꾼 주체는 상생회라는 동호회였고 이 모임의 회장은 다케시타 이사무 해군대장이었습니다. 우에시바 깃쇼마루 선생이 말한 “합기무술”이라는 명칭이 선언되는 것은 “다케시타 일기”에 따르면 1929년 6월 14일 “합기무술 간담회(참석자 약20명)”에서였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1927년까지 아야베에 머물면서도 도쿄에서 구마모토까지 일본 전국을 다니며 지도를 했는데 1926년에는 도미키 겐지 선생이 입문하여 조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일에 대해 도미키 겐지 선생은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1927년에 나는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지만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었기에 그대로 수련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도미키 겐지 선생과 함께한 우에시바 모리헤이

그해 여름방학에는 3주일 정도 교토부 아야베의 우에시바 선생 도장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10월부터 선생님 가족이 도쿄로 이주하게 되어 다케시타 해군대장의 배려로, 오오사키의 시마즈 공작 저택 내에 임시 도장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대장님이 회장이 되어 동호회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간사 겸 조수로써 지도를 받았습니다.”

이 기록에 있는 것처럼 1927년에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온가족이 상경하여 시바시로가네사루마치에 있는 임대주택으로 이주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도쿄로 이주한 것은 도쿄 쪽에서 계속해서 지도를 요청한 이유도 있습니다만 대본교의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앞으로의 인생은 오로지 무도가의 길을 걸으라며 도쿄 이주를 권유했다고 합니다.

시마즈 공작 저택의 당구장을 개조한 도장을 제공받아 여기에서 해군 군인을 비롯, 야마시타 대장, 시마즈 공작, 야마모토 백작의 딸도 우에시바 선생의 지도를 받습니다. 다음해인 1928년에는 시바미타츠나마치에 있는 우츠미 가츠지 남작에게 임대주택을 제공받아 이사하고, 다다미 8장 방 두 칸을 뚫어서 도장으로 개조했습니다. 이 당시 문인으로는 다케시타 대장을 비롯한 해군 장교, 또한 시마즈, 마츠다이라, 마에다 같은 화족(작위를 가진 사람) 명사들과 정재계의 유력자들이 모이고, 학생유도를 재패했던 가사하라 이와오와 아베 노부후미도 입문했습니다.

1929년에 열린 연무회에는 육군과 해군의 대장만 30명 가까이 모였다고 하니 우메시바 모리헤이의 명성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던 것입니다. 당시엔 소개자가 최소 2명이 되지 않으면 입문은 커녕 견학도 할 수 없었고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도장은 문인들로 가득찼습니다.

유도 창시자 가노 지고로 강도관 관장

1930년에는 강도관의 가노 지고로 관장이 찾아와서 우에시바 모리헤이 옹의 연무를 보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상으로 삼던 무도다”라며 절찬하고, 문하였던 다케다 지로와 모치즈키 미노루 두 사범에게 합기도를 배우고 오라며 파견합니다. 한편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요청을 받아 해군대학과 육군 도야마학교에 지도를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31년 드디어 우시고메 와카마츠쵸 102번지에 다다미 80장 크기의 큰 도장이 완성되고 이것을 황무관도장(皇武館道場)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이 도장의 수련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사람들은 이 도장을 “우시고메의 지옥도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황무관도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진짜 창을 가지고도 자유자재로 수신을 했다는 후나바시 가오루, 바둑판을 부채 대신 썼다는 괴력의 소유자 유카와 츠토무(1931년 입문), 나중에 양신관 합기도를 창립하는 시오다 고조(1932년 입문) 등이 있고,  시라타 린지로(1931년 입문)도 이때 입문했으며, 특이한 케이스로는 검성(劍聖) 나카야마 하쿠도 문하였던 나카쿠라 기요시가 1932년 입문했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아예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이름도 모리헤이 선생과 하쿠도 선생에게 한 글자씩 받아서 우에시바 모리히로라고 개명했는데 황무관 검도부 자격으로 검도대회에 출전하여 우승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1932년 8월 13일에 데구치 오니사부로의 뜻을 받아 “대일본 무도선양회”를 설립하고 기관지인 “무도”도 발행합니다.

<무도> 1933년 7월호 표지

1933년에는 황무관의 직할 도장이자 대일본 무도선양회의 거점 도장으로써 효고현 아사고군 다케다쵸에 다케다 도장을 설립합니다. 그리고 1934년에는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에서 히사 다쿠마 사범(후일 다케다 소카쿠 선생에게 배워 대동류 면허개전을 받음)에게 지도합니다. 그리고 가시마신토류(鹿島新当流) 종가 요시카와 고이치로에게 가시마신토류 검술을 배운 것도 이때쯤입니다.

가시마신토류를 배운 배경으로는 유도의 가노 지고로 선생이 강도관 고단자에게 가시마신토류 검술을 배우게 하면서 가노 선생의 소개로 배우게 됩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당시 내제자였던 아카자와 젠자부로와 함께 입문합니다만 자신이 직접 배우지는 않고 제자인 아카자와 젠자부로만 보내서 배우게 한 뒤에 젠자부로에게 다시 배웠다고 합니다.
배운 기간은 주1회 반 년 동안이니 그렇게 오래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카자와 젠자부로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그런 식으로 배워도 검술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감탄했습니다.

아카자와 젠자부로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아카자와 젠자부로의 가시마신토류 입문서

또한 검술에 관해서는 다케시타 이사무 해군대장이 입문했던 시기에 퇴역 해군 중좌이면서 야규 신음류의 달인이었던 게죠 고사부로(오와리 야규 제19대 야규 겐슈의 제자)에게 검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게죠 고사부로는 원래 다케시타 이사무 대장과 아사노 마사야스 중장과도 친교가 있어 그 두 사람에게 야규 신음류를 지도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소개받아 교환교수 형식으로 서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부분을 조사하다가 조금 재미있는 걸 알게 됐습니다.

게죠 고사부로는 오와리 야규 신음류의 “목록”을 받은 고제였지만 나중에 뜻이 안맞아 오와리 야규 신음류와 결별을 합니다. 그리고나서 에도 야규 신음류의 “면허”도 받았다고 하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가르친 것은 검술만이 아니라 체술도 중시했던 에도 야규 신음류가 아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또한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1922년 9월에 다케다 소카쿠에게서 “신음류 전서”를 받았습니다만 이 전서 맨 앞에 신리쿄(進履橋)라고 적혀 있는 부분이 신음류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검술 목록이며 다케다 소카쿠의 신음류는 에도 야규가 분명하다고 합니다.

다만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다케다 소카쿠에게서 신음류를 얼마나 배웠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신음류에서 사용하는 후쿠로시나이(가죽을 씌운 죽도)를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도쿄에 있는 게죠 고사부로의 도장에서 처음 보았다고 하며, 다케다 소카쿠에게 유일하게 면허개전을 받은 히사 다쿠마 사범의 말에 의하면 다케다 소카쿠는 오노파 일도류는 했지만 야규 신음류는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면허개전을 받은 합기유술은 그 원형이 야규류 검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사 다쿠마 사범은 이 부분에 대동류 탄생과 관련해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게죠 고사부로
왼쪽부터 다케시타 이사무, 우에시바 모리헤이, 게죠 고사부로, 아사노 마사야스, 야마모토 기요시(야마모토 백작의 장남)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다케다 소카쿠에게 받은 야규 신음류 전서

이 당시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자신의 유파를 상생류 합기유술 혹은 대일본 아사히류 유술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러다가 1938년부터 합기무도라고 부르게 됩니다.

다음편에서는 재단법인 황무회의 설립과정과 전쟁이 격화하면서 제자들이 죄다 징집되어 도장을 떠나고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이와마에 은거하면서 패전 후에는 합기회가 설립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합기도 역사 제4부 이어보기>
<합기도 역사 제2부 다시보기>

<합기도 역사 제1부 다시보기>

 

<참고문헌>
개정신판 합기도 교본 – 합기도의 역사와 전개 – 우에시바 깃쇼마루 저
월간 비전 2008년 12월호 외 몇 개의 합기도 관련 특집기사
기의 확립 – 나카무라 텐푸와 우에시바 모리헤이 – 도헤이 고이치 저
합기도 수행 – 시오다 고조 저
투명한 힘 – 기무라 다쓰오 저
인터넷 사이트 R 영계이야기.네트 – 데구치 오니사부로 대도서관
인터넷 사이트 임협대사전 야쿠자위키
합기도 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전 – 우에시바 깃쇼마루 저
논문  – 합기도 형성과정 연구 (1) – 시시다 후미아키 (와세다 대학)
신음류를 철학하다 – 에도 야규의 심법과 도법(1) – 아카바네 다쓰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