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모비치의 용서와 유혹(2-1)-조현일 에세이

예술가가 여기있다 <출처:3 Dimensional>

2010년 미국의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는 도발적인 행위예술로 명성이 높은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출신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Марина Абрамовић의 특별한 전시가 열렸습니다.
전시명은 ‘예술가가 여기 있다The Artist is Present’였습니다. 미술관 한 층 전체를 차지한 이 전시는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행위예술가 아브라모비치가 화려한 단색 드레스를 입고 자리하고 맞은 편에 준비된 텅 빈 의자 하나로 시작합니다. 관객 한 사람이 빈 의자에 앉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만 대화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관객이 아브라모비치에게 말을 걸어도 아마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앉은 관객은 아브라모비치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아브라모비치 그녀 또한 맞은 편 관객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이 단순한 행위가 퍼포먼스의 전부입니다.
그녀가 퍼포먼스를 기획하기 위해 미술관의 큐레이터에게 의자 둘을 준비해달라고 요청하자 큐레이터는 ‘바쁜 현대에 누가 아티스트와 마주 앉아 눈을 오랜동안 마주치겠는가’라며 힐난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뉴욕현대미술관은 가장 번잡하고 들떠있는 뉴욕 맨해튼의 한 복판에 위치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브라모비치는 ‘폭풍의 한가운데 고요함이 있으며, 우리는 이 고요를 폭풍의 눈이라 부른다. 나는 폭풍 속에서 고요를 만드는 행위자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고 하죠.

예술을 접하는 대중을 대부분의 일반적인 아티스트는 집단으로 인식하기 마련입니다. 개개의 예술적 취향은 서로 상이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반 정의를 따르자면 아티스트는 특정 개인 누군가를 위해 작업하는 프로페셔널은 아니니, 예술작업은 언제나 집단으로서의 대중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아브라모비치는 예술을 접하는 집단으로서의 대중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대상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 개인의 가장 친밀하고도 은밀한 눈을 들여다 보면서 개별적인 경험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눈을 마주하며 시선을 교환한 것이 언제였던가 싶습니다. 목소리를 듣거나 잠깐 눈을 들어 상대의 얼굴을 보며 메시지를 전달받거나 짧은 대화를 나누기는 하지만 상대의 눈을 직접 들여다 보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하지 않기 시작한 지 혹은 망각한 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 화면에 뜬 누군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거나 애완견/묘의 눈을 응시하기는 하겠죠. 하지만 내 앞에서 숨을 쉬는 인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경험은 점점 희귀해 집니다. (물론 얼마전 뜨거운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야 예외로 해야겠습니다.) 얼마전 초상화를 배우기 위해 선생님의 아틀리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만, 인간의 눈은 동물과 달리 상당히 복잡하고도 섬세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드로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근육이나 뼈야 선이 몇개 어긋난다고 해서 대세에 지장이 있겠습니까만, 눈동자의 크기와 흰자의 비율, 반사광의 위치와 홍채의 패턴, 눈꼬리의 방향과 안구의 돌출 정도는 약간만 달라져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인간이 상대의 얼굴 표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한 탓도 있겠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눈이 모두 달라 공식에 따라 그리다간 생기를 상실한 마네킹의 유리눈처럼 보이기 십상이죠.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가 여기 있다’의 의도는 침묵 속의 응시입니다. 짧은 눈맞춤에 익숙한 우리는 완전한 타인과 억지로 시선을 맞출 수는 있겠지만 긴 침묵에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낍니다.
시선을 고정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관계보다도 어색하고 어려운 침묵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퍼포먼스를 시전하는 아브라모비치의 까만 눈은 진중하고 깊었습니다. 그녀의 눈동자는 ‘타인의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겁니다. 처음엔 어색한 시선이 교환되었지만 1분 정도가 지나가 두 사람은 감정을 교환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상처를 아브라모비치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 투사한 관객은 그 반영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선의 교환은 이러한 연약한 감정을 표면으로 떠올리는 촉매의 역할을 합니다. 많은 관객들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구토를 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며 광기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억눌린 슬픔의 무저갱에 자각하지 못했던 외로움을 발견한 자신에 대한 연민에 솟아오르는 감정이 폭발해버린 것입니다.

아브라모비치의 연인이자 예술 파트너였던 울라이(Ulay) [출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예술가와 마주하라〉
736시간 30분 동안 850만 명이 아브라모비치와 뜨겁고 아름다운 시선을 교환하였고 이 단순한 퍼포먼스를 힐난하던 비평가들도 그녀의 예술에의 열정과 진정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날 736시간이 경과하여 수염을 기른 백발의 남성이 아브라모비치의 맞은 편에 앉았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조우였습니다. 그 남성은 22년 전 뜨겁게 사랑했지만 헤어졌던 울라이였습니다. 1976년에 만나 1988년까지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는 전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행위예술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개인적인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1988년 ‘연인들, 만리장성을 걷다’라는 행위예술은 두 사람이 중국의 만리장성을 각자 반대편 끝에서 걷기 시작하여 중간에서 만나는 퍼포먼스였습니다. 아브라모비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 황해에서 시작하고, 울라이는 서쪽 끝 고비사막에서 출발하여 서로를 향해 만리장성을 따라 90일 간 2500킬로미터를 걸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는 만리장성의 중간 지점인 산시성 선무현에서 만났습니다.

인류가 만든 가장 큰 건축물을 두 사람이 걸으며 냉전의 아픔을 공유하고 배타적인 지리 경계를 허무는 화합과 화해를 설파하기 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외부에 빗장을 걸고 있던 중국 정부를 설득하여 허가를 받는 협상에 8년이라는 세월이 허비되었습니다.

1988년 ‘연인들, 만리장성을 걷다'<출처: 헤럴드경제>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위해 동분서주 뛰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한계와 다름을 느끼며, 관계의 무너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걸음을 뗀 아브라모비치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땅의 기운에 육체와 영혼이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메커니즘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신체가 자연과 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학습하였습니다. 대자연에 단독자單獨者로서 미지의 땅Terra Incognita과 하나가 되는 경험에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고는 희열하고 오열하였습니다. 하지만 선무현에서 만난 울라이는 동행하던 중국인 통역사와 연인이 되었음을 통고합니다.

고행을 거친 사랑의 결실을 퍼포먼스로 승화시키려 했던 그녀의 기획은 이별의 행위예술이 되고 말았습니다. 둘은 서로 울고 웃다가 가벼운 포옹을 하고는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짚었습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행위야말로 가장 힘든 일일 것입니다. 사랑을 포기하고 배신한 울라이가 22년이 지난 그날 그녀를 응시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였을까 오랜 연인을 만난 반가움과 애증의 감정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퍼포먼스의 규칙이었던 무감정의 원칙을 스스로 깨고 말았습니다. 736시간동안 타인의 시선을 수용하며 흘러넘치는 감정을 받아들였던 그녀는 여기서 퍼포먼스를 멈출 수 밖에 없었죠.
1974년 아브라모비치는 나폴리의 갤러리에서 관객들에게 자신의 몸을 온전히 맡기는 퍼포먼스를 벌입니다. ‘리듬 0’라 불린 이 행위예술은 6시간 동안 관객이 그녀의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도록 허용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리듬 0 <출처:헤럴드경제>

테이블 위에는 장미, 깃털, 꿀, 유리컵, 채찍, 올리브유, 가위, 칼, 총 등 72개의 물건이 올려져 있었고 ‘이 테이블 위의 모든 물건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역시 물건입니다. 이 시간에 일어난 모든 일은 전적으로 제가 책임집니다.’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습니다.
퍼포먼스가 시작된 직후 관객들은 아브라모비치에게 장미를 건네거나 깃털로 간지럽히는 수준에서 머물렀지만, 그녀가 움직이지도 방어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거친 공격성이 고조되고 말았습니다. 입술에 상처를 내고 칼로 찔러 흐르는 피를 마시는 관객도 등장했습니다.
권총을 장전하여 아브라모비치의 얼굴에 총부리를 겨누는 관객을 제지하려는 몸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죠.

6시간의 퍼포먼스가 종료되자 아브라모비치는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수동적인 객체 앞에서 민낯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방어하지 못하는 약자에 대해 천성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공격성을 띠게 되는 대중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행위예술이었습니다.
수많은 유태인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가 모사드에 의해 체포된 나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은 전범 재판에서 ‘단지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합니다. 군인이 명령을 따르는 건 당연하다며 자신의 유죄 판결이 억울하다고 호소했죠.

‘악의 평범성’ 당신도 아돌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쟁범죄자 아이히만으로부터 괴물을 기대했지만 황당하게도 옆집 아저씨처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의외의 모습에 절망하면서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했습니다.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0’의 관객들이 애초에 사악하거나 폭력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지만, 사회적/윤리적 의무와 책임을 면제받는 상황에서 평범한 인간은 충분히 잔인하고 사악해질 수 있다는 슬픈 사실이 드러납니다.

사유를 정지하고 비판을 연기하며 성찰을 게을리 하는 행위 자체가 악이 될 수 있다는 아브라모비치의 주장의 개념화일 것입니다. 퍼포먼스의 제목이 시사하듯 마음의 리듬이 멈추는 순간 인간은 거리낌없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아브라모비치의 용서와 유혹(2-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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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