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합기도역사 – 창시자의 제자, 합기도 대중화의 시작

13. 황무회에서 합기회로

일본이 패망한 이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전회에 하지 못한 이야기를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케다 소카쿠 선생의 사망과 관련하여 수정할 부분이 있는데 사망 날짜가 5월 3일이 아니라 다케다 도키무네 계열 자료로는 4월 25일이고 야마모토 가쿠요시 계열 자료로는 4월 24일입니다. 다케다 소카쿠를 만년에 끝까지 모신 제자는 야마모토 가쿠요시입니다.

야마모토 가쿠요시

당시 야마모토 가쿠요시는 “일본화약제조”라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회사 시설인 보양소 관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케다 소카쿠는 그 보양소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만 도쿄 본사에서 야마모토 가쿠요시를 호출하자 “선생님은 여기 계시는 게 안전하니 밖에 나가지 마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도쿄로 갑니다. 그런데 다케다 소카쿠는 보양소에만 있는 게 답답했던지 또 순회지도를 돌다가 아오모리에서 객사한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연락처에 야마모토 가쿠요시의 주소가 있었기 때문에 전보를 받은 야마모토 가쿠요시는 아오모리의 여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케다 선생의 아들인 다케다 도키무네에게 연락하여 다케다 도키무네도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야마모토 가쿠요시는 영명록과 전서 등의 유품을 다케다 도키무네에게 넘겨주고 대신 다케다 소카쿠가 쓰던 하오리 끈과 찻잔을 받았습니다. 결국 다케다 소카쿠의 임종은 아무도 지키지 못한 셈입니다.

나카쿠라 기요시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딸과 결혼하여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양자-데릴사위로 들어간 나카쿠라 기요시는 1937년에 우에시바 집안의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고 검도계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된 제일 큰 원인은 나카쿠라 기요시 본인의 말에 따르면 “우에시바 선생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 기술은 내게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뒤를 이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너무나 책임이 무거운데 하지도 못하면서 우에시바 선생의 후계자 자리에 연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카야마 하쿠도 선생에게 가서 “저는 도저히 그 기술을 뒤이을 수 없으니 우에시바 집안을 떠나고 싶습니다.”라고 상담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알았다. 조만간 내가 가서 얘기를 할 테니 기다리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카쿠라 기요시는 대본교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2차 대본교 탄압사건으로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잠시 근신하고 있을 때 도장에 있던 대본교 관련 물건을 몽땅 치우고 소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결혼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던지 자식도 없었고 이때 아내와도 이혼하고 우에시바 집안을 완전히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후계자로 들어가면서 우에시바 모리히로로 개명했을 때 모리(盛)라는 글자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쇼와의 검성(劍聖)으로 추앙받는 모치다 모리지(持田盛二)의 이름에서 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에시바 지도를 받고 있는 나카쿠라 기요시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떠난 나카쿠라 기요시는 이후 전일본검도연맹과 국제검도연맹 회장이 된다.

나카쿠라 기요시가 우에시바 가문의 후계자로 들어왔던 건 당시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아들인 깃쇼마루가 너무 어렸던 것도 있습니다만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장성해서도 자신이 후계자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우에시바 깃쇼마루가 와세다 대학교의 학생이었던 1943년에 히라이 미노루를 중심으로 한 6명이 혈판장을 가지고 와서 합기도의 대를 이어달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혈판장에 연서한 인물은 히라이 미노루, 오오사와 기사부로, 이시이 류조, 이토 요시아키, 이치다, 야마우치였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미 일본이 전쟁에서 질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도쿄의 황무관도장은 아들에게 맡기고 이와마에 합기도의 산실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습니다. 1945년 3월 9일 도쿄 대공습으로 시작된 미국의 도쿄 공습은 도쿄를 그야말로 초토화시켜 허허벌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5월말까지 이어진 공습으로 도쿄의 절반이 넘는 면적이 파괴되고 더 이상 폭격할 곳이 없어서 도쿄는 이후에 폭격 리스트에서 제외될 정도였습니다.

공습으로 페허가 된 도쿄 시내 모습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고 집을 잃은 이재민도 셀 수 없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망하고 미국의 점령군이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미군정은 검도, 유도 등의 무도를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미군정이 일본 사회 전체를 뜯어 고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가치관이 모두 뒤집히고 패전의 상실감과 함께 일본은 대혼란에 휩싸입니다. 도쿄에 있던 도장은 무시무시한 폭격에도 살아남긴 했습니다만 집을 잃은 이재민이 30가구 정도 들어와서 살았기 때문에 수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합기도의 중심은 얼마간 이와마의 도장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점령군이 활보하는 도쿄가 보기 싫었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도쿄에 있던 도장을 헐값에 팔아버리려고도 했습니다만 아들인 깃쇼마루의 만류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도쿄이며 장래엔 도쿄를 중심으로 합기도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 우에시바 깃쇼마루의 혜안이었습니다.

미군정은 무도의 학교 교육을 금지하기는 했지만 시골인 이와마까지 와서 간섭하지는 않았기에 이와마 도장은 이 시기 합기도를 수련하고 보급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46년에 사이토 모리히로가 입문을 하는데 이후 23년간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 곁에서 수행하며 합기도의 발전과 보급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무기술을 정리하여 보급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합기신사를 계속 지켰습니다.

사이토 모리히로

전쟁이 끝나고 전쟁터에 나갔던 제자들이 하나 둘 귀국하면서 수련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마 도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와마에 올 때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살아 돌아와 잘됐다며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소중한 자기 자식이라며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니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와마의 생활은 아침 6시에 시작됐는데 우선 신께 축문을 올리는 것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장장 40분에 걸쳐 축문을 올리는 동안 제자들은 정좌하여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기본기 위주로 아침 수련을 한 뒤에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합기원의 농장은 땅이 척박했기 때문에 벼를 키우기도 힘들었고 키운다 해도 이삭이 많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식사는 대부분 고구마죽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농사일을 하다가 점심으로 고구마를 약간 먹고 다시 농사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욕조물을 데우는 1시간 동안 저녁 수련을 하고 목욕을 한 후에 저녁을 먹었습니다.

전쟁 후 2년간 아들인 우에시바 깃쇼마루도 이 시기에 도쿄와 이와마를 왔다갔다 하며 생활했는데 도쿄에서 후지타 긴야, 니시 가쓰조 등과 상담하며 합기도를 일반에 보급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이와마로 돌아가 아버지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그 계획을 보고했습니다. 그 전까지 합기도는 일부의 선택받은 자들만 할 수 있는 무도였습니다. 따라서 우에시바 깃쇼마루가 합기도의 일반인 보급을 얘기했을 때 아버지의 불벼락이 떨어질 거라 예상했습니다.

합기도 이와마도장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아들의 얘기를 묵묵히 듣더니 “너 좋을 대로 해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정식으로 재단법인으로써 다시 인가를 받아 재출발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옛 <황무회>를 <재단법인 합기회>로 고쳐서 문부성의 승인을 받는 절차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948년 2월 9일 인가를 받아 정식으로 <합기도>로써 새출발을 합니다.

이로써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합기도 초대 도주가 되었으며 본부는 이와마에 두기로 합니다. 당시의 감독관청이 당분간은 그러는 편이 점령군을 자극하지 않을 것이라며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14. 합기회 설립 이후 여명기

재출발의 기반이 다져지고 도쿄에서도 수련이 시작되었지만 어려움은 여전하였습니다. 마치 무도가 민주주의의 적인 양 거부하는 풍조가 강했고 식량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격렬한 수련을 할 체력도 없었으며 교통사정도 나빴기 때문에 도장에 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침수련 시간에 오는 사람은 많아야 10명이었고 대개는 2,3명이었습니다. 날씨가 나쁜 날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1948년에 결혼을 했습니다만 도장 운영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꾸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증권사에 취직하여 일을 하면서 도장을 운영했습니다. 나중에 아들인 깃쇼마루가 증권사에서 일하는 걸 알게 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돈놀이꾼은 당장 그만두라며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만 깃쇼마루는 말로만 그러겠다고 하고는 1956년까지는 회사를 계속 다녔습니다.

이 시기에 입문하여 우에시바 깃쇼마루의 든든한 지원군이 된 사람들을 살펴보면 아리카와 사다테루(1947년 입문), 이소야마 히로시(1949년 입문), 타다 히로시(1950년 입문), 야마구치 세이고(1951년 입문), 니시오 쇼지(1951년 입문), 다나카 시게호(1951년 입문), 아베 세이세키(1952년 입문), 다무라 노부요시(1953년 입문), 구로이와 요시오(1954년 입문), 고바야시 야스오(1954년 입문) 사사키노 마산도(1954년 입문) 등이 있습니다.

이소야마 히로시  /  야마구치 세이고  /  다무라 노부요시
고바야시 야스오

 

1950년 4월부터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기관지인 <합기회보>를 발행합니다. 등사기로 찍은 5, 6장짜리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인쇄물이긴 했지만 신생 합기도를 알리고 활동상황을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제자들 중에는 지방에 도장을 열어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을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고향인 다나베에서 가까운 신구에는 1952년에 히키쓰치 미치오가 구마노숙도장을 열었습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49년 1월에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구마노산잔에 참배하러 간 일입니다. 그때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히키쓰치 미치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치오 씨, 구마노는 내 혼의 고향이다, 당신이 신구에 근사한 도장을 세워준다면 내가 기쁠 것이네. 무산합기의 대화대애(大和大愛)의 정신이야말로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는 토대가 될 것이야. 나도 할 테니 당신도 하시게.” 이러한 격려를 받아 히키쓰치 미치오는 도장을 열고 합기도의 발전에 진력하게 된 것입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히키쓰치 미치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와마에 뿌리를 내리고 합기원에서 무농일여의 생활을 하면서도 지방에서 초청을 받으면 지방강습을 다녔습니다. 1949년에는 네 곳의 지방강습을 나갔습니다만 1950년부터는 <합기회보> 덕분인지 훨씬 많은 곳으로 지방 강습을 다녔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와마에서 소수의 제자들과 하루에 세 번 수련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틈을 내어 독서에도 힘을 쏟았는데 주로 <고사기>를 비롯한 신도, 언령학, 신령학 등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데구치 오니사부로 외에도 여러 신령관계자, 영능자들과 교류가 있었는데 특히 만년에 흉금을 터놓고 지낸 사람은 백광진굉회(白光真宏会)의 고이 마사히사였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고이 마사히사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합기도에 부여한 “만유애호”라는 정신성과 철학은 해외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져서 합기도의 해외보급도 진척이 이루어집니다. 초기에 해외를 개척한 제자들로는 모치즈키 미노루(프랑스), 아베 다다시(프랑스, 이탈리아), 도헤이 고이치(하와이를 중심으로 주로 미주), 무라시게 아리토시(벨기에), 나카조노 무쓰로(프랑스) 등이 있습니다.

모치즈키 미노루(프랑스)  /  아베 다다시(프랑스, 이탈리아)  /  도헤이 고이치(하와이를 중심으로 주로 미주)

 

15. 양신관 합기도의 대두와 합기회 공개 연무

한편 시오다 고조는 1946년에 어느 건설회사의 사장 비서로 취직을 하면서 이와마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다니던 회사마다 족족 망해서 실업과 재취업을 반복하고 있을 때 1950년부터 미군정의 지시로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에서 좌익세력을 추방하고 해고하는 운동이 벌어집니다.
미군이 일본을 점령한 뒤 처음에는 사회개혁을 통해 노조설립을 장려하여 노동운동이 대대적으로 확대되고 강성해졌습니다만 1950년에 중국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승기를 잡으면서 미국의 태도가 바뀌고 좌익 세력을 탄압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학 후배였던 스즈키가 찾아와서 일본강관 츠루미 공장의 호위를 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츠루미 공장은 우익 입장에서는 이른바 빨갱이 소굴로 여겨질 만큼 노동자 세력이 강했고 언제 노사간에 충돌이 일어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용자측은 이에 대응할 인력을 모집한 것인데 수당이 매우 좋았습니다. 돈이 궁했던 시오다 고조는 모교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이 일을 맡았는데 수습이 잘 되어 좋은 평가를 받은 덕에 일본강관의 관련 사업소 수위들을 대상으로 합기도를 지도합니다.

이후 수완을 발휘해서 경찰을 대상으로 순회지도를 하는 등 활동범위를 넓혔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1954년 7월에 “라이프 익스텐션”이라는 단체가 주최한 “일본 종합 고무도 대회”에 출전해 연무를 보였는데 여기에서 압도적인 주목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재계의 인맥을 넓히고 많은 지원과 지지를 받아 1955년 6월 10일 양신관 합기도를 설립하여 관장이 됩니다.

시오다 고조

이다바시역 역세권에 다다미 100장 규모의 번듯한 도장입니다. 아직 이재민도 다 내보내지 못하고 부서진 도장을 제대로 수리도 못하고 있는 합기회 본부도장은 비교되어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다가 합기도의 중심은 양신관이 되어 버리고 합기회는 소멸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생겼습니다. 양신관에서 합기회의 인력을 빼가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이때 고민하고 있는 우에시바 깃쇼마루 앞에 나타난 것이 도쿠나가 시게오였습니다. 이 사람은 오사카 상사의 임원급이었습니다만 원래 일본야구연맹의 흥행본부장을 하기도 했고 연예계에도 발이 넓었습니다. 이른바 행사 기획자 같은 사람입니다.
도쿠나가 시게오와 상담하면서 나온 이야기는 첫째 이와마에 은거한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도쿄로 나오게 해서 단독 연무회를 여는 것이고, 둘째로는 연무형식을 바꾸어 우에시바 모리헤이 뿐 아니라 제자들도 연무를 선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혼자만이 할 수 있는 무도라면 일반보급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연무회 직전까지도 이런 계획을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계속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도쿄로 올라오자 연무회 공개 팸플릿을 보여주었습니다.

역시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불같이 화를 냈고 제자들에게는 연무를 시킬 수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수행해온 자신의 신념을 꺾어야 하는 일이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우에시바 깃쇼마루가 열심히 설득하자 아들에 대한 정이 깊었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결국 좋을 대로 하라며 허락해 줍니다.

다카시마야 백화점 공개연무

그리하여 드디어 1955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도쿄 니혼바시 다카시마야 백화점 옥상에서 공개연무회가 열렸습니다. 이 연무회가 대성공을 거두어 합기회의 발전에 큰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드디어 1956년 3월에 다니던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합기도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에시바 깃쇼마루가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 대학교에 합기도부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아세아대학에 합기도부가 제일 처음 생겼고 도쿄대학교, 게이오대학교, 가쿠슈인대학교에도 차례로 합기도부가 생겼으며 우에시바 깃쇼마루의 모교인 와세다 대학에도 합기도부를 만들었습니다. 다만 와세다 대학교에 합기도부를 만들 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오랜 제자인 도미키 겐지가 와세다 대학에 합기도를 정규 체육수업으로 도입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도미키 겐지는 전쟁이 끝나고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있을 때 <합기체조>란 것을 만들고 합기도를 유도처럼 경기화 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도미키 겐지는 강도관 특사 자격으로 우에시바 깃쇼마루를 찾아와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강도관 고문으로 추대하고 합기도를 유도의 한 부분으로 통합하려고 했습니다만 거절당합니다.

경기화한 합기도는 합기도가 아니라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말에도 불구하고 도미키 겐지는 경기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1958년에 한 발 먼저 와세다 대학 합기도부를 만들어서 경기 체계를 도입했습니다.
이후에 본부도장에서 수련하던 와세다 대학생들의 요청으로 합기회 산하의 와세다 대학 합기도부가 별도로 만들어집니다. 사실 대학생들에게 합기도를 보급하는 일은 우에시바 모리헤이도 별로 찬성하지 않았고 사범들 중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학생수가 많지 않은 곳에 사범을 파견하는 것은 적자가 나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미래를 내다보고 대학교에 적극적으로 보급했으며 이것이 나중에 합기회의 확실한 지지기반이 되면서 사회에도 합기도가 뿌리내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대학교 뿐만 아니라 문화센터에도 적극적으로 보급을 했는데 처음엔 산케이 신문 문화교실로 시작해서 각지의 문화센터에서도 합기도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1959년에는 드디어 <합기도 신문>을 발간합니다. 대략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입문한 사람 중에 주요인물은 최초의 외국인 내제자이면서 프랑스에 합기도를 보급한 앙드레 노케(1955년 입문), 유럽과 아프리카에 합기도를 보급한 노로 마사미치(1955년 입문), 독일에서 합기도를 넓힌 아사이 가쓰아키(1955년 입문), 미국에 합기도를 전파한 사오토메 미츠기(1955년 입문), 뉴욕 합기회를 설립한 야마다 요시미쓰(1956년 입문), 비접촉 합기로 유명한 와타나베 노부유키(1958년 입문), 영국과 미국에서 합기도를 넓힌 치바 가즈오(1958년 입문), 유럽과 미국에 합기도를 보급한 스가노 세이이치(1959년 입문), 또 다른 외국인 내제자로 나중에 미국에 합기도를 전파한 테리 돕슨(1960년) 등이 있습니다.

앙드레 노케  / 노로 마사미치  / 아사이 가쓰아키
사오토메 미츠기 / 야마다 요시미쓰 / 와타나베 노부유키
치바 가즈오   / 스가노 세이이치  / 테리 돕슨

다음편에서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승천과 창시자 사후에 도헤이 고이치 선생이 합기회 본부도장을 떠나 독립하는 과정 등을 살펴보겠습니다.

<합기도연사 제6부 이어보기>

<합기도역사 제4부 다시보기>
<합기도역사 제1부 다시보기>

 

 

<참고문헌> :
개정신판 합기도 교본 – 합기도의 역사와 전개 – 우에시바 깃쇼마루 저
월간 비전 2008년 12월호 외 몇 개의 합기도 관련 특집기사
기의 확립 – 나카무라 텐푸와 우에시바 모리헤이 – 도헤이 고이치 저
합기도 수행 – 시오다 고조 저
투명한 힘 – 기무라 다쓰오 저
인터넷 사이트 R 영계이야기.네트 – 데구치 오니사부로 대도서관
인터넷 사이트 임협대사전 야쿠자위키
합기도 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전 – 우에시바 깃쇼마루 저
논문 – 합기도 형성과정 연구 (1) – 시시다 후미아키 (와세다 대학)
신음류를 철학하다 – 에도 야규의 심법과 도법(1) – 아카바네 다쓰오
합기도에 살다 – 타다 히로시 저
합기진수 – 아이키, 마이키, 신인합일이라는 비법 – 야스에 구니오 저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합기도 – 직제자들이 말하는 개조 (2)

김의수
㈜Contents Lab Zavak 실장 SBS 방송 아카데미 제8기 일본어 영상번역과정 졸업 / 최우수상 수상 SBS 드래곤볼 시리즈 더빙번역 투니버스 격투왕 바키 더빙번역 바람의 검심 DVD 부클릿 번역 감수 그 외 일본 영화 및 애니메이션의 DVD, BD 자막 번역 다수 E-Mail: yuuj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