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와 고통의 그릇으로서의 몸(2-1)-조현일 에세이

제 아내는 물리학과 전공인 전형적인 이과형 인간입니다. 하지만 저는 산업디자인을 공부하다가 건축을 공부하다가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다가 물리학을 공부하다 포기한, 이과로 가려다 마음이 바뀌어 문과로 가려다 다시 이과로 옮긴 살짝 어중간한 입장이라 어떤 경우에는 아내의 사고방식과 태도에 전적으로 공감하다가도 어떤 상황에서는 ‘어째서 저런 생각을 할까’ 궁금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생의 반려인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어떻게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제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제 아내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나랑 다르게 생각할까…’
주말엔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려 가끔씩 동네 카페에 마실을 나가기도 합니다. 이과형 인간답게 실용적인 가치를 숭상하며 현행적인 주제를 선호하지만 가끔씩은 철학적으로 아내를 도발하는 시도가 주말에 만끽할 수 있는 소확행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뭐라고 생각해?’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결혼 전과 결혼 후의 대응이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만, 마침 그 날은 에스프레소 더블샷의 각성효과도 한몫 한 듯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제 질문에 진지한 1분의 침묵을 마친 아내는 ‘죽음이군요.’라고 답했습니다.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과형 인간에게서 기대한 답이 아니어서 살짝 놀라 눈을 가늘게 뜬 저에게 ‘모든 생명은 결국 죽어요. 하지만 죽음의 의미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삶과 죽음은 일종의 개념쌍이니까요.’라며 진지한 대답을 던져 주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얻은 충실한 답에 우린 서로 만족하여 점심 식사로는 아내가 좋아하는 막국수를 먹으러 갔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아내는 물리학적인 열사熱死heat death를 염두에 두고 한 대답이었을 겁니다.

엔트로피는 우주 어디서나 증가할 뿐이니 결국 우주 전체는 질서를 상실하고 시공간 전체에 낮은 에너지 준위가 균등하게 확산되어 있는 상태, 즉 어디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죽음의 상태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 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물리학적으로 예상할 수 있으니 생명체를 위시한 모든 것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겠지요.

제가 던진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그리스의 철학 선구자들이 시작하여 인간 역사 수천 년 동안 수없이 제기되어 온 질문이며,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수없이 많은 대답을 내놓았던, 하지만 누구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낸 적이 없었던 ‘궁극의문’입니다.

존재의 핵심을 파고드는 근원본질적인 질문이기에 궁극적이며 답하기 어려운 난제라는 측면에서도 궁극적이죠.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소설에는 ‘삶과 우주와 그 밖의 모든 것에 관한 궁극의 의문’을 풀기 위해 디자인된 수퍼컴퓨터 ‘깊은 생각Deep Thought’이 등장합니다.

더글러스 애덤스

이 컴퓨터는 수백만 년 동안 다양한 방법과 엄청난 컴퓨팅파워를 소모하며 답을 찾습니다. 모두가 기다리던 결과가 도출되는 날 은하계의 수많은 관객들은 중계방송을 방영하는 텔레비전 앞에 기대에 차 모였습니다만, ‘깊은 생각’이 내놓은 답은 ’42’였습니다.

컴퓨터의 알고리즘과 프로그래밍은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애매모호한 답이 나온 걸까 사후분석을 거친 과학자들은 ’42’라는 답을 해석하기 위한 보다 강력한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놓습니다.
42는 ‘임의의 세 정수 x, y, z의 세제곱수의 합으로 특정 수를 만드는 난제’라는 수학 문제에도 등장하는 수입니다. 즉, x^3+y^3+z^3=k 라고 할 때 k에 상응하는 x, y, z에 해당하는 수를 찾는 문제입니다. k가 3이라면 (1)^3+(1)^3+(1)^3=3 으로 간단하게 답을 찾을 수 있지만, k가 30이 되려면 (2,220,422,932)^3+(-2,218,888,517)^3+(-283,059,965)^3=30과 같이 엄청나게 큰 수가 도입되어야 가능하기도 합니다.

1955년에 제안된 이 수학적 난제는 계산을 통해 대부분의 수를 찾았는데, 유독 33과 42는 쉽게 찾지 못했습니다. 수학자들은 고성능 컴퓨터를 이용하여 33에 해당하는 수를 찾아내면서 드디어 난제 해결의 실마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k가 33이라면 (8,866,128,975,287,528)^3+(-8,778,405,442,862,239)^3+(-2,736,111,468,807,040)^3=33 으로 수퍼컴퓨터가 도입되어 겨우 답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42는 미해결이었는데, 50만 대의 컴퓨터를 병렬 그리드로 연결하여 드디어 2019년 10월에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80,538,738,812,075,974)^3+(80,435,758,145,817,515)^3+(12,602,123,297,335,631)^3=42. 드디어 k가 1에서 100의 범위 안이라면 가능한 모든 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애덤스가 ‘히치하이커’를 집필하던 당시는 마그네틱 테잎에 데이터를 기입하던 메모리 디스크가 빙글빙글 돌아가던 시절이니 42는 그야말로 미지의 궁극수였겠죠. 이로써 애덤스의 ’42’는 ‘궁극의문’을 상징하는 기호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약간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만, 다시 궁극의문의 문제로 돌아갑시다. 궁극의문의 해답을 찾기보다는 먼저 궁극의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이겠죠. 먼저 ‘목적’의 측면에서 궁극의문을 들여다본다면 우리의 삶과 타인의 삶, 그리고 온 우주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어떤 목적을 수행하는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출처: Matthew Verdolivo, UC Davis IET Academic Technology Service

질문이 ‘목적’을 물어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종착점을 의미한다기보다 ‘의미’를 추구하는 질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앞서 제 아내가 삶의 목적은 죽음이라고 답했습니다만, 삶의 영위를 위해 타 생명의 죽음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 다른 동식물의 죽음과 이에 수반하는 영양분의 섭취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존 생명의 죽음이 있어야 새로운 생명의 위치가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도 삶은 죽음에 기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궁극의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답은 아닐 것입니다.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순환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과정 전체는 어디로 이어지고 있으며 살고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라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물어 볼 때 삶이 존재하는 ‘작용인作用因’과 ‘목적인目的因’을 통한 설명 이상의 대답을 원하게 됩니다.
지구의 역사를 되돌려 최초의 생명을 발견하고 그 기원을 따져볼 수는 있겠지만 이를 통해 과학적 사실만을 취득할 수 있을 뿐 여전히 우리가 원하는 설명은 아닙니다. 결국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더이상 연속적으로 던져지지 않을 궁극적인 질문과 궁극적인 해답이 필요하게 되며, 그 자체가 곧 목적인 수단으로서의 내재적 목적과 의미의 추구가 우리가 지향하는 곳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죠.

여러 철학자들이 이와 동일한 사고 과정을 거쳐 나름의 관점을 만들어 보려고 일생을 투자하였으며 몇몇은 그럴듯한 설명을 내놓기도 합니다. 세계의 본질의 선과 악을 들여다 본 철학자들은 수많은 사고실험을 통해 다양한 세계관을 내놓았습니다.
세계는 좋은 곳인가, 친절한 곳인가, 적대적인가, 질서정연한가, 혼란스러운가, 통제가능한가, 합리적인가, 말이 안통하는 곳인가… 그러나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세계가 합리성을 띠고 있으며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인간친화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세계는 좋은 곳인가?

세계는 욕망과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시스템은 언제나 세계의 틀 외부에서 영향을 끼친다는 가설을 세워놓았습니다. 우주적인 차원을 초월한 외부자의 존재가 전제되어 이 초월자의 각본에 의해 우리 세계의 논리와 합리성이 굳건하게 세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은 ‘신’이라 칭하고, 논리학을 배운 이들은 ‘세계정신’이라 부르고, 계몽과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은 ‘자아’라고 일컫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가 엄연히 버티고 있음에도 어째서 세계는 이리도 넘치고 넘치는 역경과 고난으로 가득차 있을까요?

영화 한장면 캠쳐

콜레라나 인플루엔자와 같은 질병과 코로나19와 같은 전지구적 전염병의 만연, 산불과 홍수를 일으키고 있는 이상기온과 지진과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벌이지고 있는 바와 같이 수백만을 불구로 만들고 수많은 과부들을 양산하는 부질없는 전쟁,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불모지 한 줌을 얻기 위한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

큰 스케일에서 보지 않고 개인적인 수준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차별하고 이유도 없이 칼로 찌르고 모르는 이의 사진에 악플을 달며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일삼습니다. 또한 우리는 어째서 비참하게 늙어야 하며 비열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요. 어째서 이리도 악은 도처에 만연하고 있으며 어떻게 이런 더러운 세계에 일반적인 목적이 잠재해 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습니까.

물론 어떠한 사실을 특정 주장에 부합하도록 조작하는 방법은 넘치도록 다양하며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도록 도가 터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보기엔 모순이지만 철학자들은 소피스트의 역사를 시공간을 뛰어 넘어 재현하여 모순을 해소하는 언설을 만들어내고야 맙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비난하지 맙시다. 그나마 우리가 하루 일과를 마감하고 지하철에 올라 구독한 유튜브 채널을 돌려 보며 귀가해 침상에 누워, 아,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라고 위안하기 위해선 이들의 거짓 언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신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감언이설을 풀어놓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신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악을 행할 능력은 없는 세계를 창조하거나 두려움과 유혹에 저항하고 극복하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세계를 창조할 능력이 없는 존재라는 가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더 큰 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세계에 특정한 결함이 존재해야 하며 인간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피상적으로는 한없이 악한 일이 우리가 모르는 더 큰 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 세계에 온갖 종류이 악이 존재한다고 해서 신이 이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거나 막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성급히 내려서는 안됩니다. 단지 모든 측면을 고려하여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설령 세계가 완벽하지는 않다고 해도 이는 ‘최선’의 세계이며, 신은 이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이 내리는 어떤 선택은 가혹하기 그지 없지만 신은 최선의 선택을 하셨고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바랄 수 없으니 불평을 해서는 안됩니다. 라이프니츠의 이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종교적 믿음에 기반을 두지 않고 개개인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세계를 바라본다면 조금 다른 결론이 도출됩니다.

<42와 고통의 그릇으로서의 몸(2-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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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