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와 고통의 그릇으로서의 몸(2-2)-조현일 에세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

우리 모두 솔직해집시다. 이 세계는 진실로 끔찍한 곳이라는 사실을 거부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라이프니츠의 세계관의 문제점을 수용하며 등장한 짜증나는 철학자가 다름아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입니다. (물론 훨씬 더 끔찍하고 짜증나고 혐오스러운 철학자의 왕관은 당연히 니체에게 돌아가겠지만… 이 분 얘기는 다음 기회에…) 쇼펜하우어는 우리 세계가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한 라이프니츠, 피히테, 헤겔 등 칸트 이후의 독일관념주의자들의 낙관론을 혐오했습니다.

그는 세계가 그저 나쁜 곳이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도 없으며 여기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살면서 경험하는 고통과 고난은 우연적인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본질에 속하는 구성물입니다. 누군가는 나만큼 고통과 역경을 겪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질병,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가는 죽음, 재해, 착취, 궁핍을 겪지 않을 만큼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있죠. 하지만 이들도 그저 나보다 조금 더 나을 뿐입니다.

삶은 근본적이자 필수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며, 인간을 괴롭히는 욕구는 구조적으로 우리를 무의미한 분투로 몰고 가는 동력입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한 끝없이 갈구합니다. 삶은 욕망 그 자체이며 욕구는 결핍과 부재를 전제로 합니다. 결핍과 부재는 끊임없이 고통을 유발하고, 이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욕구를 채우면 우리는 다시 다른 무언가를 갈구하게 됩니다. 철학자 들뢰즈가 말했듯 사실 욕망은 결핍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그 자체가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이죠. 강렬한 욕망에 대응하면 할수록 고통은 더 커지지만 욕망을 그만두는 것도 쉬운 선택지가 아닙니다.

욕망

욕망을 채운 그늘에는 권태가 도사리고 있으며 이는 존재의 공허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훨씬 큰 고통을 선사합니다. 욕망의 고통과 권태의 고통 사이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은 존재로부터의 일시적인 도피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고통의 일시적 유예를 ‘행복’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의 개념과는 다르지만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따라가면 행복은 그저 고통의 유예일 뿐 또다시 시작될 욕망과 권태의 일시적 멈춤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행복의 추구는 그저 유예를 찾는 희망의 발현이죠. 형이상학이 이렇게 슬픈 사고의 연속이라면 이 또한 사서 고생하는 고통에 지나지 않을까요.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여기에 철학의 본질이 있다고 봅니다.
인간의 필멸성의 인식은 이러한 고통의 경험에서 시작되며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혹은 의식을 피하는 사람에게는 철학이 필요없습니다. 이들은 세계의 존재방식과 이유를 묻지 않으니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책장을 넘기는데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 울며 이를 가는 소리,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합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철학적 인식이란 단지 지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도덕적 분노’이어야 합니다. 궁극의문은 세계가 의당 취해야 하는 형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분노에서 기인합니다.

출처ㅣ알라딘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독해하며 세계가 결코 실재적인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언제나 중재된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통찰을 수용하며 우리 스스로가 인식하는 사물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사물과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우리의 지각이 작동하는 방식에 의존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느끼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사물의 본질을 보여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죠.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말하는 인식 너머의 본질의 대상, 즉 ‘물자체’는 결코 우리에게 본질을 보여주지 않으며 단지 ‘표상’으로 전달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하며 다른 사물과 사건과 인과적으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경험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이 나타나도록 허용하는 주관적인 조건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칠게 말해 ‘표상’은 대상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시간, 공간, 인과)’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세계라고 여겼던 곳이 사실 표상에 불과함에도 우리는 어째서 삶을 이토록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걸까요? 어째서 삶은 겉딱지에 불과한 표상인데도 우리에게 고통으로 생생하게 경험될 수 있는가.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칸트는 물자체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즉 삶을 진실되게 경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았습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문제에 있어서 칸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우회할 방법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골똘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출처: 뉴스앤조이]
대상을 외부에서 관찰하고 만져보고 굴려본다고 숨겨진 본질을 찾을 순 없다는 건 확실했습니다. 하지만 대상을 표상으로서가 아닌, 즉 비표상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혹시 존재하지 않을까? 쇼펜하우어는 긴 사색의 끝에서 대상에 비표상적으로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몸’을 통해서라는 위대한 발견을 합니다. (물론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전적으로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모든 철학비평자들이 쇼펜하우어를 인정하고 있는 건 아닐 뿐더러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쇼펜하우어의 책은 그리 인기가 없네요.)

몸은 우리 스스로 사물로 인식할 뿐 아니라 나 스스로의 존재가 머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나’는 몸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 바로 그 몸이기도 하죠. ‘나’는 몸을 통해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으며 몸을 통해 세계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몸속에서 그리고 몸을 통해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근대 철학을 세운 위대한 철학자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하는 존재’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신 우리는 다양한 욕구와 충동에 충실하게 따르기 위해 행동을 수행하는 동물적인 존재입니다.

삶을 향한 욕구가 인간 존재의 핵심

욕구, 충동, 배고픔, 목마름, 공포, 희망, 애착, 싫증, 사랑, 혐오, 되도록이면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을 찾으려는 생존본능, 가능한 한 생명을 추구하고 죽음을 유예하면서도 특별한 목적을 가지지 않는, 그저 삶을 목적없이 유지하려는 순수한 욕망이 모두 몸에 담겨 있습니다.
삶을 향한 욕구가 인간 존재의 핵심이며 사고 인식 행위와 비판적 의식은 이러한 존재핵심이 지나가고 나서의 사후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 이제 쇼펜하우어의 사유 개념들이 모두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몸에 담겨 있는, 고통과 부조리가 가득한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몸에 담겨 있는 원초적 본능과 욕망을 쇼펜하우어는 ‘의지意志’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몸은 표상 세계의 하나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근원본질적으로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몸은 의지의 외적 표상에 지나지 않지만, 몸의 내성적 형식이 의지인 동시에 의지의 외적인 형식이 몸입니다. 희한한 순환고리이죠. 쇼펜하우어는 이 논리를 밀고 나가, 우리가 본질적으로 의지 그자체라면 대상으로서의 ‘모든 것’ 역시 본질적으로 의지라고 설명합니다.

의지

우리가 우리의 몸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며 알 수 있는 바는 의지와 표상의 형식이며,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적 본질은 의지 그 자체가 되겠죠. 삶이 고통으로 가득찬 무의미한 체계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실재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기획하지 않았다면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종합적인 계획이나 합리적인 구상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 체계입니다. 선험과 기획 대신 세계의 중심에는 맹목적이고 멍청하고 우둔하고 목적 없는 개개인의 분투가 계속되고 있으며, 삶을 중지하지 않고 연속/연장시키며 그저 세계의 중심에 존재하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이리저리 흘러가는 주체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테마는 표상과 의지로서의 세계의 중심에 계획과 방향성을 확고히 가지지는 않지만 분투를 벌이고 있는 의지(몸)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친 개가 생전 처음 거울을 보고 이빨을 드러내고 머리를 처박아 두개골이 깨져 피를 흘리듯이, 아까 그 개가 우연히 곁눈질을 하다가 꼬리를 발견하고는 자기 꼬리인지도 모르고 쫓아가며 제자리를 맴돌듯이,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의지가 발휘될 때 수반되는 부산물입니다.

고통은 의지가 발휘될 때 수반되는 부산물

의지는 목적과 이유도 없이 끝없는 욕구에 휘둘려 싸움에서 우위를 점함으로써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세계가 무의미하듯이 아무런 목적을 가지지 않고 그냥 존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존재가 목적과 의미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의지가 의지를 생산하고 발휘하는 와중에 우리는 스스로를 수많은 표상들 중 하나로 인식할 따름입니다.

쇼펜하우어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그걸로 끝입니다. 어떤 이는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로 매도하며 이토록 허망한 결론을 내기 위해 그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 갔던 과정이 참으로 낭비라고 비판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논의를 저 나름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만, 제가 생각해도 엄청난 분량의 철학적 텍스트를 할당하여 겨우 이렇게 허망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토록 어그로를 끌었던가 한탄할 수도 있겠지만, 쇼펜하우어의 주장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텍스트를 독해하는 우리 개개인이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개념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면 욕망과 권태로 가득한 고통스러운 무의미의 세계를 그나마 견디고 헤쳐나가기 위해선 우리의 몸 안에 고통과 의지를 함께 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몸 자체가 의지의 표상이니 몸을 가진다는 존재방식으로 곧 고통은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에 따르다보면 점점 무의미의 나선 블랙홀과 같은 개미지옥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고통은 가학적인 행위를 통한 신경의 통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죠. 표상으로서의 몸이 느끼는 존재론적인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당당하게 맞서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 의미도 목적도 없는 비정한 세계와 연약한 몸에서 ‘의지’를 발견하는 과정으로서의 고통의 인식을 가리킵니다.

나게가 시전하는 기술을 받아내는 우케의 수신

형이하학적으로 표현하기에 약간 껄끄럽기는 하지만 수신에서의 근육과 정신의 긴장에서 오는 고통이 불쾌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신의 목적이 상대의 공격성을 겸허히 수용하면서 중화시키는 데 있다면 여기에 수반되는 고통은 우매한 상대가 가하는 공격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신체의 동작을 통해 설득하면서도 자신의 생존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상대에 대한 설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공격을 온전히 받아 자신을 희생하고는 모든 걸 끝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몸은 이러한 무의미한 희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삶에의 의지가 희생이 아닌 설득과 배려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누구도 수신에 고통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게가 시전하는 기술을 받아내는 우케는 언제나 고통이 수반된다는 엄연한 현실을 운명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통해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우케의 수신이 고통없는 ‘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불쾌’라고도 단정할 수 없는 애매모호하고 불확정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수신의 고통이 의지와 의미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무의미한 세계에 맞서는 우리의 몸이 의지를 생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발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태도가 아닐까요.

이 무의미한 세계에 맞서는 우리의 몸이
의지를 생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발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태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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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