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키스와 클레어(2-1) -조현일 에세이

독일
독일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몸담고 계시던 회사가 독일의 엔지니어링 회사와 기술제휴 계약을 하면서 엔지니어 교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온 가족이 함께 독일 함부르크로 이주하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2년 반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만, 사춘기가 겹친 어린 시절에 처음 해외 생활을 하던 차라 제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 지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1987년 말인 당시에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해외 여행도 쉽지 않을 시절이었기에 서울로 돌아와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복학하여 이전의 동네 친구들과 재회하게 되자, 테러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소련과의 충돌도 가끔 일어나던 독일(당시엔 서독일)에서 돌아온 저를 모두들 반가이 맞아 주면서도, 치기어린 십대였던 그들이 가장 궁금하여 수업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던진 질문은, 서독이라는 선진 사회의 정치적 이슈나 문화/예술적인 측면보다는 눈이 파란 색목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는 유치한 궁금증이었습니다.

동독(출처: 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캠쳐)
동독(출처: 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캠쳐)

해외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가찮은 우월감에 동독 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넘어 베를린에 자전거를 타고 놀러 가기도 했다느니 기관총을 난사하는 자살특공대를 보기도 했다는 등, 거짓 섞인 허세를 부리기도 하면서 (밴쿠버에서 기관단총을 난사하던 갱단 멤버를 테러대응반이 돌격소총으로 제압하는 상황을 길건너에서 직접 본 적은 있습니다) 몇 주 정도는 학교 전체의 화젯거리였지만, 그 인기도 오래 가지 않아 친구들의 관심은 옆반에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 온 어여쁜 여학생으로 급히 옮아가 버렸습니다. 사실 함부르크의 학교를 다니기는 했지만, 현지인들이 진학하는 김나지움이 아니라 영어를 사용하는 외교관이나 주재원의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국제학교였기에 일본, 중국, 타이완,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절대다수였습니다.

가끔 영어가 서툰 이탈리아 학생이나 벨기에 사람이 수업 시간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제가 참여한 수업에는 선생님만 영국 혹은 호주인이었을 뿐 모두들 까만눈의 까만머리였죠. 정작 몸은 독일에 있었지만 제가 접한 환경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를 마치고 졸업을 하고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다가 캐나다를 선택한 건 10년이 지난 97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밴쿠버의 대학원에서도 선생님들만 캐나다인일 뿐 어째서인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동양인들이었습니다. 졸업논문 제출을 마치자 시간 여유가 나서 기구한 저의 운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째서 이 먼 타국에서도 난 색목인을 만나기가 이리도 힘들까. 물론 캐나다 인구의 다수는 이민자를 포함해도 대부분 색목인이었습니다. 다만 제 주위에 아시아계가 즐비했을 뿐이었죠.

철도회사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학교 친구 하나에게 이 절망감을 토로했고 깊이 감복한 친구의 아버님은 밴쿠버에서 몬트리올까지의 장거리 철도여행을 위한 티켓을 졸업 선물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땅에 7년이나 유학생활을 했음에도 광활한 캐나다의 자연을 보기는 커녕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서 컴퓨터 모니터만 주구장창 들여다보며 잿빛이 된 제 얼굴을 보시고는 동정심이 동하셨을 것입니다. 머리숙여 감사를 표한 저는 지긋지긋한 인간의 몸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 위해 은하철도 999에 오른 철이의 심정이었습니다. 장장 4주가 넘는 여행을 이끌어 줄 ‘메테르’ 같은 아름다운 가이드라도 있었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장기 여행을 함께할 만한 절친한 지인이 없었던 저는 홀홀단신으로 외롭게 열차에 올라야만 하는 최악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차여행(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캡쳐)
기차여행(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캡쳐)

혹시나 싶어 티켓을 제공한 친구에게 함께 여행을 갈까 제안해 보았지만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부친의 부를 무상으로 누리던 이놈은 얼마 전 사귀기 시작한 레바논 여자친구와 멕시코로 떠나버렸습니다. 혹은 저와 함께 동거동락하며 장기 여행을 하자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대강 둘러댄 것일 수도 있겠죠. 어찌되었건 친구의 외로움에 답하지 않은 건 우정에 대한 배신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릴없이 홀로 하게 된 긴 여행의 지루함을 (물론 캐나다 대륙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를 친구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동급생 중에 매니토바 주 출신의 학생이 자기 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반경 100킬로미터에 나무 한 그루 없는 농장에서 자란 이 친구에게는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는데, 어느날 지루함과 무료함에 정신줄을 놓은 이 강아지는 갑자기 지평선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마구 짖어대면서 떨어지는 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린 강아지는 며칠을 달리다가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아무것도 없다는 냉혹한 진실을 이해하고 3일 뒤에 피골이 상접하여 터덜걸음으로 주인에게 돌아와 발치에 앉아 눈물을 흘리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는 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해 준 친구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보고는 농담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입을 가렸습니다.

캐나다는 이처럼 강아지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지루한 나라입니다. 풍경사진을 찍어보라느니 논문 준비하느라 설친 잠을 열차에서 실컷 자라느니 헛소리만 잔뜩 수집하다가 담당교수님께서 ‘듄Dune(프랭크 허버트/ 김승욱 역/ 황금가지/ 2021)’을 읽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제 건축학과 졸업논문 주제가 ‘우주공간에서의 생존과 도시구축’이었기에 환경생태학과 교수님들을 지도교수로 배정받았었는데, 이 분들 중 한 분께서 이 책을 추천해 주셨던 겁니다. SF를 좋아하긴 했지만 ‘2001년 오딧세이’나 ‘스타워즈’ 혹은 워쵸브스키 브라더스의 ‘매트릭스’와 같은 유명작품이나 읽거나 보았을 뿐이라 ‘모래행성 듄’이라는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은 생소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엄청난 분량에 자그만 폰트의 책 판형에 질리긴 했지만, 며칠에 한 번씩 기착지에 짐을 풀었다가 다시 열차를 타야하는 여정을 생각해 보니 작은 글씨의 두껍지만 가벼운 페이퍼백이 이상적인 여행파트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영화 '듄'
영화 ‘듄’

2월이지만 따뜻한 기후의 밴쿠버에서 출발하여 앨버타 주의 캘거리와 에드먼튼, 새스캐천, 매니토바의 위니펙을 거쳐 토론토, 그리고 몬트리올에서 여정이 끝나니 봄, 한겨울, 그리고 여름 같은 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꽤 무거운 배낭이 될 것 같았죠. 논문을 마친 개운하고 가뿐하지만 피곤이 가시지 않은 몸과 마음을 대륙횡단으로 풀어보고자는 풍운의 꿈을 안은, 이제 한 해만 지나면 서른이 될 예정이고, 졸업 후엔 아버지의 건축회사에서 일하기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인생의 행로가 이미 결정된, 기차여행이라고는 서울-부산이 전부인 젊은 동양인은 50리터짜리 배낭에 옷가지와 소설 한 권을 쑤셔 넣고 태어나 처음으로 장거리 열차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듄’은… 정말 지루한 소설이었습니다.

아라비아어인지 프랑스어인지 모를 희한한 단어들은 사전을 뒤져봐도 의미를 찾기 힘들었고, 플루타르크영웅전인지 로마흥망사인지에서 읽은 듯한 혼란스러운 사건들이 마구 터지다가 앞 페이지에서 소개되지도 않은 몰락한 제국의 공주가 수천 년 전의 역사를 되뇌이는 와중에서 소설 속의 현재가 1만 5천 년도 더 지난 미래의 역사라는 사실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등 제가 당시까지 읽었던 어떤 내러티브보다도 혼란스러운 이야기들이 지리하게 전개되어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저 차창 밖의 빠르게 지나가는 평평한 대지의 풍경으로 눈을 옮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수님은 분명 멜빌의 ‘모비딕’에 버금가는 역사 서술의 혁명성과 신선한 생태학적 설정이 눈부시게 빛나는 미국 문학의 걸작이라고 극찬을 하셨건만…

‘듄’은 여행 이틀만에 수시로 검사하는 열차 티켓을 북마크처럼 꽂은 번거러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앨버타 주에 도착하여 캘거리 시내로 덜컹거리며 진입하던 중 방금 열차칸에 오른 여자아이가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공포는 마음을 무너뜨린다!Fear is the mind-killer!’ 어리둥절하게 졸린 눈을 뜨고 저녁해에 빛나는 금발의 푸른 눈의 색목인의 도발적인 언사에 저도 모르게 부엉이처럼 ‘응who?’하고 바보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공포는 완전한 망각을 일으키는 작은 죽음이니라!’ 아리따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니 즐거운 음악이었지만 또다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 여인(영화 한 장면)
프랑스 여인(영화 한 장면)

멍하니 올려다 본 동양인 남성의 흐릿한 동공을 보고는 체념한 듯 검지손가락으로 제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가리키며, ‘지금 읽고 있잖아?’ 그제서야 그 여자아이가 ‘듄’에 등장하는 글귀를 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일찌기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김병욱 역/ 여름언덕/ 2008)’이라는 책을 통해 부드럽고 은유적인 대화를 통해 책을 읽지 않았어도 내용을 마치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던 바, 방금 내 옆자리에 앉아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모래벌레와 키사츠 헤더락에 대해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는 클레어Claire에게 이지적이고 신비로운 동양의 구도자의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액센트가 올라가는 부분에서 눈꼬리를 올리고 액센트가 내려가는 문장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제스츄어만으로도 읽지 않은 소설을 반 정도 읽은 척하는 전략입니다. 동양의 전사들도 죽음 앞에서 처연할 수 있느냐고 묻는 클레어에게 일단 칼을 뽑아 상대를 향하면 무념무상의 엑스터시에 돌입하는 정신 수련은 검술의 기본이라고 설명하니 클레어는 나이프를 꺼내는 시늉을 하며 ‘한 방울의 물도 낭비하지 않으리라!’라고 소리치며 흥분했습니다. 아, 이 무슨 아름다운 운명인가. 극한의 지루함으로 가득할 것이라 걱정했던 대륙횡단열차에서 귀여운 퀘벡 액센트의 눈부신 클레어를 조우하는 기회를 제공한 ‘듄’에 무한한 영광 있으라.

모래행성 아라키스의 생태환경과 키사츠 헤더락의 비밀스러운 훈련방식, 제국의 음흉한 황제가 정의로운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몰락시키기 위해 꾸민 더러운 음모, 은하계에서 가장 귀중한 자원인 스파이스 멜란지를 생산해내는 모래벌레 샤이 훌루드에 올라타 프레멘의 희망으로 거듭나는 아버지를 잃은 왕자의 외로움,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불의를 감행하는 하코넨의 전사들, 그리고 우생유전학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꿰뚫어 통찰하는 꼭두각시를 탄생시키기 위해 수천 년을 기다리는 베네 게세리트의 원대하지만 어두운 기획… 이후 장장 3일 동안 클레어는 프랭크 허버트가 떠올린 아라키스 모래행성의 세계관을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모래행성
모래행성(네이버 이미지 캠쳐)

우리나라에서야 대화 상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건 실례이겠지만, 문화가 다른 캐나다에서는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대화를 경청하는 것이 에티켓이라 전 3일 내내 푸르스름한 잿빛 바탕의 모란화의 붉은 줄이 그어져 있는 클레어의 홍채에서 반강제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감히 돌이켜 말씀드리자면 제 삶의 수많은 사건들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가슴 떨리는 3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꿈 같은 3일이 지나 열차가 에드먼튼에 도착하자 클레어는 커다란 배낭을 어깨에 올려매더니 ‘리산 알가입의 길에 영광을!’ 이라고 외치더니 분홍색 손바닥을 흔들며 포니테일을 머리 위로 휘감더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잠깐, 여기서 내리는거야?’ 열차 복도를 걸어가다가 무언가 잊은 듯 뒤를 돌아본 클레어는 자기 배낭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책 한 권을 던져주었습니다. 얼떨결에 손 안에 떨어진 책은 ‘듄’의 후속편인 ‘듄의 메시아Dune Messiah’였습니다. 찡긋 미소를 지은 클레어는 바람처럼 플랫폼을 빠져나가 버렸고 마치 색목인 유령에 홀린 듯 홀로 남은 제 손엔 황당하게도 프랑스어 번역서가 올려져 있었죠.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배신감을 느낀 저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이해하지도 못하는 언어로 씌어진 소설책은 소금물로 얼룩졌습니다. 사실 클레어는 3일 내내 행선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다만 저 혼자 클레어와 함께 몬트리올까지 여행할 수 있으리라 상상했을 뿐이었죠. 클레어는 제 몸 속의 물 한 방울도 낭비하지 않길 바랬겠지만…

몬트리올에 도착하여 비행편으로 밴쿠버에 돌아오면서 지루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스파이스 멜란지에 중독되어 눈이 파랗게 빛나는 프레멘의 챠니와 에드먼튼 어딘가에서 일상으로 돌아가 있을 클레어의 이미지를 중첩시키며 열심히 페이지를 넘긴 덕분에 ‘듄’을 완독할 수 있었습니다. 전화번호도 물어보지 못한 완벽한 타인인 클레어가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응원해 주었던 셈입니다. 클레어와의 짧은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읽을 수도 없는 불어판 ‘듄의 메시아’를 이사갈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겼고, 여행을 다닐 때마다 이유도 모르게 가방에 넣었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혹시 클레어가 언제 어디선가 자신이 던지고 간 책을 알아보고 또다시 말을 걸어올 수도…

 

*아라키스와 클레어(2-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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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