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키스와 클레어(2-2)-조현일 에세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출처:네이버 포토뉴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출처:네이버 포토뉴스)

발바르Svalbard 제도는 북위 78도에 위치한 도시로 등록된 인구는 고작 35명입니다. 스페이스 콜로니 디자인 프로젝트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덕분에 모 기관으로부터 척박하고 자원이 희소한 지역에서의 생존조건과 건축/환경 디자인에 대한 연구 의뢰를 받아 노르웨이와 북극점의 중간에 위치한 스발바르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의 건축디자인을 사진에 담아 취재하고 만일 가능하다면 북극의 오로라를 촬영해 달라는 의뢰였습니다. 워낙 비용이 많이 소모되는 기획이었기에 저의 사비를 털어서 여행비용을 충당할 정도였지만 꼭 가보고 싶었던 행선지였습니다. 조금 웃돈을 얹으면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할 수도 있었기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죠.

과학연구나 군사 목적이 아니고선 민간인으로서 갈 수 있는 최북단이며 바이러스가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기후에 보트를 타고 나가면 고래와 백곰, 그리고 기후온난화로 녹아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빙하를 육안으로 관찰할 수도 있으며, 운이 좋으면 캐나다에서 보았던 푸르스름한 오로라가 아니라 붉은 오로라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어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무거운 카메라 장비에 짜증이 났지만 멀리 가는 여행이니 클레어가 던져준 ‘듄의 메시아’를 가져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발바르는 여행자가 많지 않아 호텔이 단 한 채 밖에 없습니다. 함께 도착한 열 명 남짓의 여행객은, 이 불모의 땅에 일가친척이 없는 한, 모두 한 호텔에 묵는 셈입니다. 스발바르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4도 정도의 낮은 도수의 맛없는 라거 ‘발찌까 료그코예’ 맥주를 마십니다. 아침부터 로비에서 한가롭게 한 잔 마시며 ‘어디가서 소련 맥주를 마셔보겠나’라고 혼잣말을 하며 흉칙한 모레벌레가 그려져 있는 표지에 클레어의 낙서가 선명한 책을, 이제는 컵받침으로 전락해 버린 10년이 지난 소설책을 내려다보며 이제 클레어도 아줌마가 되었겠구나…하고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푸른 빛의 동화 같은 스발바르 https://blog.naver.com/silver3412/221096576334
푸른 빛의 동화 같은 스발바르 (출처:https://blog.naver.com/silver3412/221096576334)

건너 테이블의 십대 일본인 학생들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대화하는 광경을 배경음악으로 기분좋게 취기가 올라오자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스발바르는 예전에는 러시아인들이 포경산업을 하며 번화한 도회지로 발전하였지만 적극적인 포경이 금지된 오늘날에는 마치 공포영화나 서부영화에 나오는 고스트타운처럼 생활의 흔적만 남은 박물관입니다. 레닌의 빛바랜 초상화가 걸려있기도 하고 수십 년 된 러시아 간판이 삐딱하게 걸려 있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하죠. 하지만 해변이 아닌 내륙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상당한 융기현상의 아름다운 결과물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너무 추워 나무가 울창할 리는 없지만 푸르스름한 이끼와 잔디가 석산을 빼곡히 메우고 있어서 사계절이 분명하고 장마에 울창하게 자라는 나무숲에 익숙한 저에게는 신선한 풍취입니다.

마침 다리가 피곤할 즈음에 커다란 바위를 발견하고는 기어올라가 앉았습니다. 스발바르는 습도가 거의 0에 가까워 구름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형언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습니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한낮에도 맨눈으로 정지위성의 반짝임을 볼 수도 있다고 조언한 호텔 직원의 말을 믿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혹시 어떤 별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몇 발 뒤에서 아까 로비에서 잠깐 눈을 마주친 학생이 말을 걸었습니다. 일본인은 어디에서 누굴 만나건 동양인에게 항상 일본인이냐고 묻는 습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마찬가지일까요? 그런데 그 학생은 의외로 ‘듄을 읽고 있어요?ヂューン読んでるんですか?’라고 질문했습니다.

하루키의 ‘1Q84’에 등장하는 후카에리를 처음 만난 덴고가 된 듯한 기분으로 어눌한 일본말로 대강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있는 초췌한 복장의 제가 LL 빈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자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소설적인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근데 왜 프랑스어로 읽어요?’ 이 질문에 답하자니 너무 이야기가 길어질 텐데… 방향을 바꾸자. 그나저나 넌 도대체 스발바르엔 뭐하러 왔니? 네 친구들은 어디가고 너 혼자 다니니? 여긴 일본인 관광객에겐 그리 인기있는 여행지는 아닐텐데… 아, 고래가 보고 싶었어요. 그렇구나, 난 오로라가 보고 싶단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캠쳐)
(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캠쳐)

마흔 넘은 남자가 처음 만난 스무살 갓넘은 일본 국적의 여자아이와 집에서 6300킬로미터나 떨어진 외딴 섬에서 수천 광년 떨어진 모래혹성 아라키스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이 상당히 어색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제가 가지고 간 홍삼캔디와 그 아이가 가지고 온 센베를 나눠 먹으며 스발바르의 환경이 마치 아라키스와 비슷하다는둥 위대한 창조자인 모래벌래 샤이 훌루드가 향유고래 같다는둥 소설 속의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습니다. 난 이제 호텔로 돌아가야할 거 같아. 오늘밤 오로라 사진찍으러 나가야 하거든. 바위 위에서 내려오면서 불현듯 클레어의 책을 이 아이에게 주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フランス語読めるんだよな。ここでポル死んじゃうんだよ。(프랑스어 읽을 줄 알지? 여기서 폴은 죽는다.) 아마 리호코梨穂子는 듄의 두번째 이야기는 아직 읽지 않았었나 봅니다. 제가 이전에 영어로 읽었듯이 리호코도 불어 사전을 뒤지며 갖은 고생을 하면서 프랑스어로 읽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관없었습니다.

이제 클레어의 ‘듄의 메시아’는 리호코의 손으로 옮아갔으니까요. 항상 책꽂이와 책상 위나 가방에 자리잡고 있던 클레어의 책의 존재감이 사라지자 어색한 상실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스발바르의 적막을 배경으로 우연히 만난 리호코에게 제 젊은 시절의 기억의 편린이 이동할 수 있어서 이상야릇한 행복감이 찾아왔습니다. 재미있었지만 힘들기도 했고 흥미로웠지만 슬프기도 했던 30대의 10년을 리호코라는 또다른 완벽한 타인을 통해 정리할 수 있었다는 망상같은 안도감이기도 했습니다. 리호코의 입장에선 이상한 남자에게서 프랑스어 소설 한 권을 어색한 장소에서 건네 받았다고 기억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밤 저는 운좋게도 붉은 색 오로라를 볼 수 있었습니다. 22년을 주기로 찾아오는 태양활동 극대기가 2024년이니 올해에도 스발바르에 갈 수 있다면 그날밤처럼 붉은 오로라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로라 (출처:https://wallhere.com)
오로라 (출처:https://wallhere.com)

(사실 이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켜는 순간까지도 소설 ‘듄’에 등장하는 ‘베네 게세리트’ 집단의 정신 수련 방식이 육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글을 쓰고자 마음먹었었습니다. ‘버틀레리안 지하드’라는 기계문명에 반대하는 혁명이 발발한 이후 인류는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문명을 전 우주로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조직들이 인간의 능력을 특별한 수련을 통해 극대화하는 방법을 탐구하기에 이릅니다.

지하드의 정신을 계승한 베네 게세리트와 베네 틀레이락스, 길드의 세 집단 중 베네 게세리트가 체계적인 수련방식을 교학화하는 데 성공하고 이 수련방식을 충실히 반복수행하여 훈련을 마친 이는 인간의 일반적인 능력을 초월하는 능력을 취득하게 됩니다. 신체의 근육과 신경과 신진대사를 의지대로 조정하고 고도의 인식능력을 갖추고 분할사고와 병렬연산을 할 수 있으며 ‘목소리’라는 암시능력으로 상대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고 상대의 무의식적 반응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심리상태를 읽어내기도 합니다.

수행과 훈련의 반복을 통해 (물론 부교감신경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분할사고를 하는 능력이야 SF에나 등장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이겠습니다만…) 정신이 육체에 대해 주도권을 가진다는 개념이 아이키도의 반복되는 계고와 수련, 그리고 교학체계와 일맥상통한다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했습니다. 특히 베네 게세리트가 구사하는 ‘목소리’가 무도의 기합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재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글을 써내려가는 과정에서 시나브로 이 책과 연결되어 있는 클레어/리호코와 만난 기억이 떠오르면서 흐름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만, 딱딱한 설명보다는 이런 젊은 시절의 추억담도 재미있지 않을까 글쓴이 마음대로 생각해 봅니다.

주제는 빗겨 나갔으나 모래혹성의 이야기는 국적과 나이를 초월한 공통어라는 글의 제재題材와 틀은 유지되었다고 변호한다면 일탈을 용서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라키스와 클레어(2-1) 다시 보기 https://aikidonews.co.kr/archives/1417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