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지옥에서 벗어나는 여정-우치다 타츠루의 아이키도 론(論)

‘나’라는 지옥에서 벗어나는 여정 – 우치다 타츠루의 아이키도 론(論)

“나의 도장은 특수한 내력을 갖고 있어서 수련 방법도 매우 독특합니다. 합기도를 해본 사람은 계파가 달라도 잠시 함께 훈련하는 동안에 ‘이런 걸 하려고 했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는 얼핏 보고는 놀라서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무도인이 많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中

오는 3월 말 일본 고베에 위치한 우치다 타츠루((內田 樹)의 도장 ‘개풍관(凱風館)’을 찾아가 두어 번 아이키도 수련을 할 예정입니다. 겸사겸사 신촌도장 윤대현 선생님께서 우치다 타츠루의 아이키도 론(論)을 합기도신문에 소개할 기회를 주셨네요. 올해 초단에 도전하는 저는 아이키도에 대한 이해가 미천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우치다 타츠루가 50년 가까운 시간동안 어떻게 아이키도를 훈련해왔는지 초심자의 관점에서 이해한 바를 글로 남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싶어서 일단 노트북을 두드려 봅니다.

(캡션) 우치다 타츠루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우치다 타츠루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책에는 그가 평소 생각해온 아이키도와 명상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고, 그가 평생 연구해온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 대한 내용도 짧게 곁들여져 있습니다. 180페이지가 조금 안되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저는 개풍관에 찾아가서 그가 아이키도를 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봐야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이키도를 ‘좁은 자아를 벗어던지고 우케(受け)와 키마이라적 복합 협동 신체를 이루는 훈련’이라고 정의합니다.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을 때에 그 사태를 ‘머리 둘, 몸뚱이 둘, 팔 넷, 다리 넷인 키마이라(Chimaira)적인 생물이 ‘하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과연 외관상으로는 꽤 복잡한 생물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복잡해도 그것이 하나의 생물인 이상 그곳에는 고유의 구조법칙이 있고 운동법칙이 있습니다. 나와 상대를 동시에 포함한 ‘복합적’ 신체가 있습니다.”

“키마이라는 그 때 한 번 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술을 걸고 받는 자가 동일인물이라도 신체의 자세가 다르고, 대응방식이 다르고, 운동 속도가 다르면 ‘같은 키마이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기일화의, 그 순간 태어났다 사라지는 일회성의 생명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키마이라적 복합 신체를 만드는 훈련을 해야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기존의 나의 지식과 판단 근거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순간, 과거의 그것을 버리고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 상황, 환경과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살아남을 확률은 한층 높아지겠죠.

새롭게 맞닥뜨린 상대와 일회적 생명체를 만드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내가 알고 있다’는 생각(그는 이를 무지라고 표현합니다)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강약을 판정하는 객관적 계측 방법’이 존재한다는 고정관념(그는 이를 약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역시 키마이라적 신체를 만드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무지와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기존에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존재로 변신하는 연습이 바로 아이키도 훈련이라는 거지요. 매 순간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이 기술을 굉장히 실용적으로 일상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를 ‘명상적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캡션) 움베르토 마뚜라나 <앎의 나무> 발췌
                       움베르토 마뚜라나 <앎의 나무> 발췌

인지생물학자 움베르토 마뚜라나(Humberto Maturana)는 이 키마이라적 복합 신체를 또 다른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유기체들이 각자의 적응과 조직을 보존한 채 둘 사이의 구조접속을 바탕으로 공동개체발생을 겪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함께 표류하는 유기체들은 새로운 현상계를 산출한다’라는 조금은 어려운 말로 말이죠.

10여 년 전 우연히(!) 대학원에서 발달심리학을 공부한 이후 ‘낱개로 존재하는 자아’의 한계를 파고들어온 저는 이 키마이라적 복합 신체를 우리 말 ‘우리’라고 부릅니다. ‘우리 엄마’, ‘우리 학교’, ‘우리 나라’할 때 그 ‘우리’입니다. 사실 자아(self)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결합했던 역사, 즉 ‘우리’의 합인 것이죠. 다채로운 우리 관계의 구축은 좁은 ‘나’에서 벗어나 더욱 풍부하게 생명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긴 시간 이어온 저의 자아론 연구의 결론이고, 아이키도는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를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키도라는 무도를 오랜 시간을 들여 더욱 정성스럽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런 새들은 숲이 우거진 원시림에서 사는데, 그런 데서는 새들이 서로 시각적으로 접촉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조건에서 짝끼리 어울려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자신들이 만들어낸 공동의 노래를 이용한다 … (중략) … 이 노래 가락은 쌍 가운데 하나가 한 마디를 부르면 또 하나가 이어부르는 이중창이다. 한 쌍의 새는 접속의 역사를 바탕으로 쌍마다 독특한 가락을 만들어낸다.”

움베르토 마뚜라나 <앎의 나무> 中

글: 김정윤 / 신촌 본부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