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성찰과 상호의존(2-1) -조현일 에세이

성공한 기업인(출처:동아일보)

제가 어렸을 적 텔레비젼 방송에서는 유력 기업인들이 인터뷰 프로그램이 자주 등장하고는 했습니다. 8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한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당시의 ‘사회적 성공’은 일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국가기관과 체제의 종복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엘리트 권력자’가 되거나, 아무것도 없이 가난하게 태어나 교육의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일해 기업을 세우고 수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사회에 기여하며 미국과 일본에 상품을 수출하여 상당한 외화를 벌어들여 경상수지 흑자에 기여한 ‘자수성가 기업가’가 되는, 이 두 가지 타입이 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훌륭한 인간형’이었습니다.

중산층의 사회적 가치와 중도의 이념적 사유는 고도성장의 말기에 들어서야 서서히 나타난 사회현상이었던 바, 그 전까지는 다양성이나 차선은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성적이 좋으면 사법고시, 그렇지 않으면 빨리 졸업해서 기술을 배우거나 일찌감치 입사해 ‘일’을 배워야 했습니다. 정치구조가 선거 결과에 따라 급변하던 당시의 시대상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엘리트 권력자가 일반대중에게 사회적 성공을 설파하는 행위는 프로퍼간다로 비추어질 가능성이 크니 좀처럼 매스미디어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기업인들은 회사 홍보 차원에서도 자주 등장해 자신의 ‘성공 비결’을 공유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인터뷰는 대강 ‘내가 어렸을 때 얼마나 찢어지게 가난했는데…’로 시작하여 ‘내가 이 회사를 키우느라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데…’로 이어지다가 진행자가 묻는 ‘회장님의 철학은 무엇입니까?’로 마무리되는 흐름이었습니다. 회장님들마다 서로 다른 철학을 말씀하시긴 했는데 대부분 고사성어나 추상적인 단어로 정리되는 걸 보고 어린 저는 ‘아, 저런게 철학이구나…’하고 감동을 받았더랬습니다. 저렇게 고생을 많이하고 성공한 사람은 인생을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구나…

성공신화 방송(출처:KBS)

근데 중학교에 들어가 ‘윤리’ 선생님께서는 제가 이해했던 ‘철학’이 철학이 아니라고 말씀하셔서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철학은 사고방식을 배우고 훈련하는 학문이라니…
지금도 너무 심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윤리 선생님은 제가 알고 있던 ‘철학’은 일반철학이 아니라 ‘개똥철학’이라고 제목까지 붙여주셨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철학은 특정 신념을 설파하는 학문이 아니며, 확실한 사유대상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철학의 사유대상을 대괄하면 (이전에 이 지면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두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고 말씀해주시기도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마찬가지로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화두에 적절한 해답을 찾는 방식은 철학 내에서는 형이상학이 되겠지만, 저는 양자 우주 물리학이 보다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여 이후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에 대한 사유는 아직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혹은 도대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정도로 발전한 후기 자본주의사회 체제에서 그나마 철학이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이 화두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철학이라는 사유도구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일찌기 철학의 시조 소크라테스께서 ‘너 자신을 알라Temet Nosce’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화두가 철학의 성립초기부터 중요한 문제였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방법론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그야말로 수많은 접근론을 내놓아 사유의 도구 상자 안에 준비된 선택의 여지는 풍부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와 이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식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자아성찰’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정리할 수 있을 텐데, 성찰省察에는 기본조건이 필요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자아의 존재가 확실히 증명되어야 하죠. 또다시 일찌기 근대철학의 시조 데카르트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정리해 주셔서 이 문제를 그리 고민할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화두를 던지는 순간 존재가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존재하는 자아는 어떻게 스스로를 성찰할 것인가…를 고민하면 되겠네요. 그러나 ‘어떻게’라는 문제를 다루기 전에 자아의 확실한 존재에 대한 확증이 불확실한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생각하는 주체가 있으니 자아가 존재한다고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자아의 개념이 살짝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며, 시대에 따라 자아의 개념을 정의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져 왔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의 원시적인 정의에 대해 이후 세대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반론을 던져 왔습니다만, 오늘날의 자아 개념은 이러한 반론 검증을 거쳐 살아남은 단단한 정의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오늘날의 우리는 데카르트 시절과는 달리 확실하고 반박불가능한, 완벽하고 확고하고 단단한 정의를 확보하고 있을까요?

철학에서의 자아의 형식에 대한 정의는 기억이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만들고 삶은 오직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범위까지만 연장된다는 정설에 기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우리를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유지해 줄 수 있는 매개가 기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리들리 스코트의 영화 ‘블레이드러너(1982)’의 첫 장면에는 악의를 가지고 인간인 척 혹은 자신도 모르게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안드로이드를 처형시키는 ‘블레이드러너’라는 형사가 등장합니다. ‘보이그트-캄프’라는 과학자가 개발한 요상한 기계가 대상자에게 특정 이미지 혹은 대상자의 과거 이미지를 보여주며 어떠한 감정 반응이 나타나는지를 동공 확장 여부로 확인하는데, 타인의 괴로움에 공감하고 반응하지 않거나 자신의 과거 행위와 괴로운 기억에 후회나 기쁨 등의 감정 동요가 없으며 그자리에서 바로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블레이드러너(출처: 씨네21)

보이그트-캄프 기계의 판단 근거는 인간이라면 확실한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자아는 자신의 과거 기억에 의존적이라는 전제 조건에의 충족 여부입니다. 거짓 울음이나 웃음은 지어낼 수 있지만 동공의 반응은 자율신경계의 관할이니 눈만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새빨간 거짓말을 일삼고도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 조건을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짓는 잣대로 이용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색하긴 합니다만…) 기억에 의존하는 자아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철학자 존 로크에 의해 고안되었습니다만, 로크가 이 정의에서 기억을 중요시한 의도에는 인격동일성personal identity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기억을 동원하여 자아를 정의하려 한 측면이 강하다고 보여, 인간다움, 즉 인성을 고려할 때 기억을 통해 인격동일성과 자아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과연 오늘날 설득력있는 철학적 담론인가의 문제는 재고의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식하는 기억이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가를 따지고 들면 자신의 과거가 자신의 일부이며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내가 행한 과거의 행위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기억 그 자체가 ‘나’를 정의하지는 않는다는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법률가이기도 했던 로크가 기억을 중시했던 배경에는 재판에서 ‘자기 책임’을 얼마나 인정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부분적인 법률적 해법으로서의 인격동일성의 사유를 동원할 수 밖에 없었다는 불가피한 정황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법정에 선 피고나 원고가 법정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기책임을 증명하기 위해 기억과 의식의 유무를 인격동일성의 기준으로 삼아 책임을 따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개념에는 과거의 행동을 자아가 의식하고 현재의 경험과 과거의 행동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여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만약 자아가 일시적episodic이고 순간적transient인 성격을 가진다면 인격동일성과 자아 그리고 이를 이어주는 기억의 문제는 더이상 중요한 이슈가 아니죠. 여기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점이 우리의 자아가 진정 통시적인 자아, 즉 과거의 행동과 현재의 경험을 항상 연결짓는 충실한 동일성을 가진 자아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저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윤리적인 사유는 현행적이자 실용적인 사유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인지라, 제 자아가 항상 과거의 행위와 현재의 경험을 연계하는 통시적인 자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이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까요.
홍상수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영화제목이 생각나네요. 생물학적 육체가 연장된다는 의미에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인물이 맞습니다. 태어나 유아기와 아동기, 청소년기, 성년기를 거쳐 장년기에 이르면서 삶의 성숙과 쇠락, 노쇠와 죽음과 같은 삶의 전형적인 양상을 머리로는 이해하며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나’가 이 양상을 총체적으로 포괄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본다면 ‘잘 모르겠다’ 거나 ‘아닌데’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삶이 일종의 서사敍事, 즉 자신이 과거에 한 행위들을 연속적이고 규칙적으로 통합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오늘날의 철학계의 주류이론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반론도 상당히 존재하여 무시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심리학자 올리버 색스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알마, 2016)’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거기에 맞게 산다. 이 이야기가 우리 자신이고 정체성이다’라고 말합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자아의 원천들(새물결, 2015)’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불가피하게 서사 형식으로 설명한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과 결을 맞추어보면, 자신의 삶을 이야기의 연속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류 사상에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의 최애 사상가 사르트르는 자기가 직접 자기 이야기를 하는 행위를 ‘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 부릅니다. 이 용어는 사실 프랑스어 글자 그대로 따지면 ‘그릇된 믿음’이라는 의미인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주로 사용한 철학 개념입니다.

인간이 사회적 강요에 의한 억압으로 거짓된 가치관을 수용하고 내적 자유를 포기하여 진정성있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되는 상황을 지칭하는 용어이죠. ‘자기기만’에 포괄되는 또다른 개념들이 ‘자만自慢’과 ‘르상티망ressentiment’입니다. 두 개념 모두 자신이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참된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 추구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지칭합니다.
르상티망은 개인이 느끼는 좌절감의 원인과 책임이 자신 스스로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정동情動입니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에 대해 열등감과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이 정동을 공격하고 부정하고 거부하고 정당화하여 마침내 자신만의 비뚤어진 가치체계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죠.

(출처:네이버 블로그)

선망의 원천을 객관적으로 열등하다고 식별하고 자신의 약점과 왜곡된 감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태이지만, 자신의 불안정과 결함의 극복을 자기 스스로 막아 좌절의 원인을 해결하기는 커녕 미봉책 혹은 방어기제로 자신을 보호하는 시스템입니다. 많은 경우 르상티망이 동원되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격을 하기도 하죠. 앞서 소크라테스를 언급하였습니다만,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에는 자신을 철저히 성찰하라는 의미보다는 인간적인 삶의 가치와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항상 눈여겨 보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다시 말해 ‘과도한 성찰’은 오히려 자만이나 르상티망에 빠지게 만드는 함정일 수도 있다는 거죠.

철학자 아이리스 머독은 ‘성찰하지 않는 삶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고결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머독은 또한 ‘자신이라는 기계를 아주 조금만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인식은 대단히 단순한 수준을 제외하고 내게는 일종의 기만처럼 보인다. (…) 그것은 공상이라는 방어기제 밖에 있는 것에 대한 애착이지 방어기제 자체를 꼼꼼히 조사해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방어기제는 면밀하게 조사하기만 해도 종종 그 힘을 강화할 수 있다.

‘과도’하게 성찰하는 삶은 아예 성찰하지 않을 때보다 훨씬 해로울 수 있다’라고도 이야기합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사실을 다루지 않는다’라고 경고합니다. 수많은 미스테리 소설에서 등장하듯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르게 고착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는 심리적 편견이 아니라 신경생리학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기억에 의존적인 서사가 실제 일어난 일과는 무관하게 진술된다고 해서 이를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불완전한 객체로서의 기억을 자아의 기반이라고 생각하면 오늘날의 자아의 개념 또한 불완전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자아 성찰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의미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성찰의 대상이 불완전하고 애매한데 무얼 어떻게 접근하란 말인가. 그럼 불가지론이나 양비론과 같이 ‘어쩔 수 없지 뭐. 다 집어 치우는 수 밖에…’라고 니힐리즘에 빠져버리는 것이 마음 편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을 확실히 정의할 수 없으며 신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사랑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없으니까요.

니힐리즘(출처:브런치)

수학자 쿠르트 괴델은 일찌기 불완전성정리를 통해 이와 유사한 문제를 다룬 적 있습니다. ‘불완전성정리’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정리. 페아노 공리계를 포함하는 어떠한 공리계도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즉 자연수 체계를 포함하는 어떤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그 체계에서는 참이면서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
2정리. 페아노 공리계가 포함된 어떠한 공리계가 무모순일 경우, 그 공리계로부터 그 공리계 자신의 무모순성을 도출할 수 없다. 뭐, 이 문장을 인용한 저도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떠한 체계 내에서 참임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 즉 자기 자신은 자기 스스로 옳은 지 그른 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라고 풀어서 해석해 봅니다.

이를 성찰의 문제로 옮겨보면, ‘자아 성찰은 자기 스스로는 불가능하다…’라고도 확장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 자아성찰의 대상이 자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성찰하는 일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궤변 아닌가?…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 사고방식이 수학적으로 증명된 확실한 사실이며, 반박이 불가능한 ‘정리定理’입니다. 나는 나에 대해 나 스스로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2-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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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