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성찰과 상호의존(2-2) -조현일 에세이

깃털수신(우케미)

계고나 연무 중 기술을 펼치는 이를 보며 가끔 ‘와, 우케가 참 수신을 잘하는구나…’하고 감탄하시거나, 반대로 ‘아, 나게의 기술을 우케가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는가…’하고 탄식하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이 글을 쓰는 저도 수신을 잘 하는 분들께 제발 제 우케가 되어달라고 연신 부탁을 드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엔 나게가 기술이 뛰어나면 우케가 자연스럽게 잘 받아 수신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혹은 우케가 잘하면 나게가 조금 미숙해도 충분히 눈가림이 될 수 있을거야…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다만, 실상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동감하실 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

얼마전 유단자가 된 경험 일천한 제가 말씀드리면서도 송구하지만, 감히 말씀을 드리자면 나게와 우케의 관계는 ‘상호보완의존相互補完依存’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에반게리온의 ‘인류보완계획’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불완전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인류를 통합하여 완전한 통합체로 보완하려는 이카리 사령관의 원대한 계획!)
나게와 우케는 서로가 마치 거울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게의 기술과 태도는 우케의 수신에 반영되어 비로소 표현이 되며 우케의 기량과 역능은 나게의 의연한 태도를 통해 비로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게와 우케 개개의 기술적 역량과 무위武位는 서로에게 반영되기 전까지는 내재적으로 존재할 뿐 성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타자인 서로에게 투영되는 순간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개개의 단점은 서로의 배려와 기지를 통한 보완으로 상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연무에 있어서의 개개의 성찰(자신의 역량의 확인)은 서로에게 의존하여 확장하거나 보완하는 과정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키도만의 특성은 참선이나 타무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홀로 이루어지는 훈련이 아닌 우케와 나게의 공동수련으로서의 ‘계고’라는 ‘상호보완의존’적인 훈련방식을 경험해 보지 않은 이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뷰티 유튜버는 ‘거울을 들여다 보면 자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죠.’라고 말하나마나하게 말합니다. 근데 조금 찬찬히 생각해보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아를 사유하는 행위는 그리 우습게 볼 건 아닙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얼굴 혹은 신체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상당한 인식수준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상당한 지능을 가진 동물만이 자신의 ‘반영’을 보고 자신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인간도 유아기에 거울을 보며 그 이미지가 자신임을 확인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죠.

하지만 자신의 반영을 보며 자신을 성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반영을 바라보는 자아가 이를 타자화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위를 그대로 반복하는 반영은 자아의 행위에 진정한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형을 확인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지언정 의식적인 자아를 성찰하기엔 역부족인 셈입니다. 따라서 자아가 아님이 확실한 타자를 통해 자아를 확인하는 과정이 이어져야만 합니다.

여기에 또다시 필요조건이 등장하는데, 타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반드시 인간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타자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사고를 접하면 나도 슬프거나 화가 나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고생하는 이를 보면 마음이 아프고 국가대표들이 골을 넣으면 함께 기뻐하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많은 타인들과 공유하는 감정입니다. 심리학자 윌리엄 맥두걸은 ‘공감은 자동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맥두걸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는 감정의 유용성을 따지며 공감을 선택하거나 회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감능력(그림출처:네이버 블로그)

수많은 사건 발생에 대해 일일이 반응하며 공감한다면 우리는 눈뜨고 깨어나 몇 시간도 안되어 감정적으로 소진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감 능력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지만 회피가 가능할 정도로 조절이 가능한 감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사회적 능력이 공감능력이라는 점에서 이 능력의 우월을 잣대로 인성을 평가하는 경향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공감능력을 평가대상으로 삼는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동감하리라 생각합니다. 공감을 사회적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 다룰 게 아니라 보편적인 인성의 요소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공감’을 ‘능력’으로 보는 시각에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이 포함되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엔데믹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비대면적인 소통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오늘날의 회사 조직에 있어서 젊은 세대의 부적응을 문제삼는 상사들은 주로 젊은 세대의 공감능력의 부재를 지적합니다. 화상회의나 실제 회의에서 젊은 세대의 토론 참여가 적극적이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맞서 젊은 세대는 권위적이거나 수직적인 조직문화를 꼬집지만, 지난 세대에서 수없이 테스트되어왔던 수평적 조직문화의 형성이 여전히 실무자 만족을 떨어뜨리고 조직 성장을 저해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양비론으로 빠지게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일반적인 조직 내에서의 회의에서 도출될 수 있는 결과를 묵인, 승리, 타협, 통합이라 정리하고 조직구성원들은 가장 바람직한 결과인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경제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조직의 활동에서 개인과 집단 모두가 진정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투쟁의 결과인 묵인과 승리, 혹은 타협이 아닌 ‘통합’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장 뛰어난 성과를 산출하는 조직의 요소가 팀 내에 있어서의 능력이 뛰어난 개인의 비율, 카리스마 있거나 공감대를 중시하는 리더의 존재, 혹은 조직 내의 다양성 혹은 동질성의 추구 정도라고 보았던 기존 경영학 담론의 주제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국면입니다.

자아성찰(출처:크라우드픽)

조직 내에서 문제가 있을 때 개인을 거론하면서 비난하지 않고 껄끄러운 문제를 던지지 않으며 상대의 의견에 무조건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며 구성원 개개인의 결점에 대해 충분한 관용을 보일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조직이 가장 이상적인 형식의 조직 구성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상호의존적이고 서로간에 특별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개개인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고 유대감을 탄탄하게 만드는 조직 구성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단순히 ‘상호보완의존’적인 우케-나게의 관계에 ‘서로 공감하고 배려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야 비로소 이상적인 구도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호간의 예를 갖추고 상대와 눈을 맞추는 수련자는 항상 연무에 앞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완벽한 타자로서의 내 눈앞의 상대와 공감하고 배려하는 보완-의존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나?’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스스로 내리고 계시다면 자아성찰을 이미 시작하고 계신다고 보셔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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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