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기도에 몰두했던 학생시절(小林保雄, 合氣道 8段)

고바야시 도장
총사범 고바야시 야스오

 

제가 합기도를 지도한다고 하면 몇 단이냐고 자주 묻습니다. 농담으로 태어날 때부터 9단보다 높았다고 답하면 깜짝 놀라곤 합니다. 실은 제가 태어난 곳이 도쿄도 치요다구에 있는 구단자카(九段の上) 언덕 꼭대기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고 아베 전 수상의 일반인 분향소가 있던 자리 바로 옆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야스쿠니 신사 쪽에 파출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에 잡화점을 열었죠. 파출소 순경들은 한가할 때 가게에 와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저에게 유도를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 당시 강도관은 스이도바시 역 옆에 있었고 우리집에서 걸어서 15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유도 수련을 하면서 유도친구들이 생겼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스모 선수였는데 나중에 거합도 연맹 회장이 되신 단자키 사범의 자식이었습니다. 합기도라는 신기한 무도가 있으니까 가보자고 해서 견학을 하러 갔습니다. 그게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이었습니다. 세 팀의 사람들이 유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이기고 지는 게 없는 분위기와 서로 던지고 수신을 하는 움직임에 뭔지 모를 강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넓은 강도관 도장과 달리 다다미 50장 정도 넓이의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다다미가 너덜너덜했던 게 기억납니다. 견학을 한 후 집에 가려고 할 때 지도하시던 선생님이 해주신 “마음에 들면 수련하러 오세요.”라는 한 마디에 합기도를 수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60년대 옛 본부도장과 고바야시 선생

메이지 대학 공학부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자 마자 4월부터 합기도 본부도장에 입문했습니다. 견학하러 갔을 때 말을 걸어주셨던 분은 타다 히로시 사범이었습니다. 함께 견학하러 갔던 친구는 3일만에 그만두었지만 저는 86세인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흐름이 바뀝니다만 쇼와 30년대(1955년~1964년)에는 도쿄 도청 안에 이민과가 있었습니다. 그 이민과에서 일하는 사람이 합기도 수련을 하러 와서 우리 대학생들을 보고 브라질로 이주하지 않겠느냐며 말을 걸었습니다. 수련 친구 중에 실제로 이주한 사람도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가난하고 1달러당 360엔 하던 시대여서 일본은 아직 재기하는 도중이었습니다.

미국을 목표로 뒤쫓아 뛰어 넘자며 사람들이 정말로 열심히 일해 전후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저는 메이지 대학 입학과 동시에 합기도 수련을 시작해서 대학교에 합기도 동호회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에 무도는 유도부, 공수도부, 검도부가 주류라 합기도 동호회나 소림사권법 동호회는 수련장소 확보에 애를 먹었습니다. 학교내 도장은 사용할 수가 없어서 이이다바시 역 근처에 있는 유도장을 빌려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부원을 모집했더니 합기도는 당시엔 아직 배우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80명 가까이 모였습니다.

도장이 좁아서 다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수련할 때는 세 그룹으로 나눠서 한 그룹은 황거 둘레를 런닝하며 돌기, 또 한 그룹은 신사 경내에 있는 운동금지 간판을 보면서 근력단련, 마지막 그룹이 도장 내에서 수련했습니다. 황거 런닝 그룹이 돌아오면  도장 수련 그룹이 황거 둘레를 런닝하러 나가고 근련단력 그룹이 도장 내에서 수련하는 식으로 돌아가며 수련한 기억이 있습니다.

신주쿠에 위치한 합기도 세계본부도장
비가 오는 날은 도장 집합 시간을 엇갈리게 하는 식으로 머리를 짜내며 수련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이 되자 학교 도장을 하루 쓸 수 있게 되고 그 후에 조금씩 늘어나 매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생 시절에 공부는 제쳐두고 합기도 수련만 열심히 몰두했습니다. 합기도부 수련 외에도 시간이 있으면 신주쿠에 있는 본부도장에 다녔습니다.
본부도장엔 내제자 제도가 있어서 대학생이나 도장에 눌러 살면서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본 각지에서 온 개성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수련하고 교류하면서 인간적인 폭이 넓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무 수련에만 몰두하느라 졸업할 때는 야간 수업까지 나가 겨우 학점을 채워 졸업했습니다.

취직시험 보는 날을 완전히 까먹고 본부도장에서 수련하다가 대학교 취업과한테 혼나기도 했습니다. 취업과에서 저한테는 회사를 소개해 주지 않겠다고 하여 그대로 졸업했습니다. 집에서 놀고 있자니 아버지가 “야스오, 너 일은 안 하냐?”라고 하시길래 “직장이 없어요.”라고 답했습니다.

화내실 줄 알았는데 고생해서 가게를 일구었던 아버지는 “그럼 놀아.”라고 말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본부도장에 가서 수련했습니다. 우에시바 깃쇼마루 선생이 합기도 발전을 위해 여러 곳에서 설명회를 열 때 시중을 들며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부도장에서 지도원 임명장도 안 받고 어느새 본부도장 지도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는 합기도로 먹고 살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지도원 파견 요청이 많았습니다. 본부도장 내제자들은 일본에서는 합기도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계속해서 해외 지도를 하러 나갔습니다. 저에게도 전후배상의 일환으로 당시의 “버마”, 현재의 “미얀마”의 군인에게 합기도를 가르치러 가지 않겠냐고 도헤이 고이치 선생이 얘기했습니다.

고다이라시(小平市)에 위치한 고바야시(小林)도장

한 달 후에 대사관에 가자 버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외국인 선생을 고용하지 않기로 해서 군인 다섯 명이 일본에 합기도와 유도를 배우러 왔습니다. 그 군인들을 제가 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도쿄도 고다이라시에 도장을 열기로 하여 합기도 고바야시 도장이 생겼습니다.

그 후에 해외도장과의 교류도 늘어 현재 해외 40개국과 교류를 갖고 있습니다. 저도 올해로 만으로 86세입니다. 아버지는 93세까지 잘 사셨습니다. 그것을 뛰어넘도록 매일 정진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 맘대로 하게 해주신 여신님(아내)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합기도 고바야시 도장과 지도부에게 많은 협력 부탁드립니다.

<2022年 11月 第71号, 合氣道 小林道場新聞>

김의수
㈜Contents Lab Zavak 실장 SBS 방송 아카데미 제8기 일본어 영상번역과정 졸업 / 최우수상 수상 SBS 드래곤볼 시리즈 더빙번역 투니버스 격투왕 바키 더빙번역 바람의 검심 DVD 부클릿 번역 감수 그 외 일본 영화 및 애니메이션의 DVD, BD 자막 번역 다수 E-Mail: yuuj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