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 파라벨룸(2-2)-조현일 에세이

 

크림반도(출처:구글이미지)

파출소에 끌려온 주취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왜 술을 마셔야 했으며 어째서 행패를 부릴 수 밖에 없는지 나름의 이유가 있죠. 크리미아와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강점하려는 러시아도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러시아는 서유럽 국가들을 침략군으로 간주하고 러시아는 오히려 피해자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행동양식에는 역사적으로 서유럽에 대한 공포와 트라우마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분명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점유하고 있지만 가용자원은 유라시아 북반부에만 치중되어 있으며 광대한 영구동토인 시베리아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언제나 ‘부동항’, 즉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얼지 않는 항구를 희구해 왔죠.
바다를 향한 지정학적 교두보인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제정 러시아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루기도 했습니다. 1812년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제국과 프로이센과 협력하여 60만을 동원하여 러시아를 침공하여 모스크바를 함락하였습니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러시아 인민들이 짓밟혔으나 겨울전쟁에 취약한 프랑스군은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점령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죠.

러시아는 이 전쟁을 ‘조국전쟁’이라 칭하며 러시아 국토수호성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당시 독일은 프로이센 제국이라는 군사강국이었는데 먼저 프랑스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이어 러시아를 향해 군화를 밟아 나갔습니다. 당시의 제정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우습게도 과거에 자국을 유린했던 프랑스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나가떨어지자 곧바로 동원령을 내려 프로이센과 총력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조국 전쟁, 프랑스 혁명 군대에 맞선 러시아 전통 군대의 전투  [출처] 맥세계사편찬위원회

군수산업이 발달한 독일의 침공에 대항하는 농업 중심인 제정 러시아는 자국 방어전을 치루면서 재정이 파탄나고 생필품 생산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피폐해 졌습니다. 러시아 국민의 불만은 무능한 황제로 향했고 드디어 1917년 공산당의 지도자인 레닌이 프로이센으로 대표되는 자본제국주의의 확대를 악마화하고 전쟁의 종식을 주장하는 혁명을 일으킵니다.

이 혁명으로 200년이 넘도록 유지되어온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상에 공산주의국가가 탄생합니다.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고 프로이센이 물러갔지만 러시아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인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캐나다, 중화민국이 공산주의혁명이 자유주의진영으로 확산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러시아를 향해 군대를 보냅니다. 러시아는 이들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공산혁명에 저항하는 ‘백군’과도 내전을 치룹니다.
연합국으로부터의 파병과 내부의 적인 백군과의 전쟁에서 희생된 이가 천만에 가까왔다고 하니 러시아는 서유럽의 각국에 이를 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독일은 인류역사상 최대규모의 전쟁을 러시아와 벌이고 맙니다.

이른바 ‘독소전쟁’이라 불리는 이 비극은 나치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러시아 국경을 넘어가면서 촉발되었습니다. 게르만-아리아인의 ‘동방생존권Lebensraum’을 확보하고 유대인과 볼셰비즘을 제거하며 ‘열등인종’인 슬라브족을 정복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한다는 히틀러의 망상에 취한 나치독일군은 1941년부터 45년 종전까지 소비에트연방을 공략합니다.
이 말도 안되는 전쟁에서 소련군은 공식적 수치로 2천9백만 명이 사망했으니 제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5천만 명의 60%에 달합니다. 비교적 짧은 시기에 이만큼의 사망자가 나온 전쟁이 없었으니 추산해 보면 하루 평균 2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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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종료되고 소련 인구 남녀 성비가 4:7이 될 정도로 대부분의 남성이 독소전쟁으로 희생되었죠. 소련은 이러한 수차례의 비극적 전쟁으로 ‘포위심리siege mentality’라는 특이한 트라우마 행동양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독소전쟁의 전쟁터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였으며 이 지역의 러시아계인들은 자국의 영토가 언제나 포위되어 있기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결의를 할 수 밖에 없는 피해의식이 집단무의식으로 개개인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러시아의 이야기입니다. 현대사에서 바라본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신들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만, 사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과 자신들을 구별합니다.
이 차별화의 맥락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은 4세기 경 유라시아의 실크로드 주변으로 유목민들이 왕래하는 길목이었으며 동슬라브인들이 정주하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영토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드니프로강의 북쪽에 수도인 키예우 혹은 키예프가 있으며 흑해의 건너편에 비잔틴제국이 자리잡고 있어 키에프는 비잔틴과의 무역으로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점을 중심으로 벨라루스 지역까지 걸쳐 ‘키예프-루시 공국’이 국가를 공고히 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의 국명은 이 ‘루시’에서 유래하였습니다.

988년 키예프-루시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세례를 받아 러시아 정교회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러시아인들에게 키예프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민족적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마치 예루살렘을 두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듯 키예프는 모든 러시아 민족이 정신적 성지로 여기는 곳이기에 푸틴도 키예프를 복속하기위해 이토록 애가 타는 겁니다.

12세기 말 몽골이 키예프 공국을 침략하고 러시아 민족은 뿔뿔이 흩어지는데 이 난민들이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게 됩니다. 이들은 러시아 공국을 건국하고 다른 난민들은 키예프 지역을 떠돌다 몽골의 킵차크-칸 국이 무너지자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가 코사크 군사공동체로 촌락을 형성합니다.
이때부터 이 지역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변경’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절묘한 위치에 자리한 우크라이나는 14세기 후반에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침략을, 15세기에는 오스만제국의 침략을 받았다가 16세기에는 또다시 리투아니아-폴란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즈음부터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인들은 폴란드어의 영향을 받은 자국어를 통용시키게 되었고 러시아 문화와도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역사의 행보를 걷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벌이게 되고, 소련의 건국의 아버지인 레닌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드디어 우크라이나는 스스로의 국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레닌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는 시점에서 우크라이나는 다시 소련과 폴란드에 흡수되고 맙니다. 러시아와 폴란드는 왜 그토록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을까요?

우크라이나 국기

우크라이나의 국기는 청황의 2색으로 파란 하늘과 노란 밀밭을 상징하는데, 국기에서 나타나듯이 키예프 남쪽의 흑해 북부에 대곡창지대가 엄청난 밀을 생산하는 꿀이 넘치는 토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빵바구니’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죠.
1932년에는 러시아에 ‘홀로도모르’라 불리는 대기근이 발생한 적이 있는데 토지를 국유화한 레닌의 뒤를 이은 스탈린이 농업생산 집단화를 추진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주요 농작물인 밀을 수탈하여 정작 곡창지대에 살던 우크라이나인 2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한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 홀로도모르를 아직도 기억하며 러시아인들을 향한 증오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우크라이나의 독자적인 역사는 단절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5개의 공화국의 연방으로서의 소련에 흡수되고 맙니다.
문어발식으로 동유럽을 공산화시키고 확장주의 일변도로 나아가는 소련에 두려움을 느낀 서유럽국가들이 만든 군사동맹이 다름아닌 나토NATO로서 이는 반대로 서방국가들의 두려움을 반영하는 구도였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 중심의 군사동맹인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설립되었죠.

레닌-스탈린-후르시초프-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의 계보를 이어 소련공산당의 수장이자 크렘린의 안방을 차지한 고르바초프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연방정부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15개 공화국의 반발로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불합리와 영토상실의 트라우마로 군비를 필요 이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피폐해지는 국가재정의 실정을 소련국민들이 제대로 알아야 국가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정보공개)를 통해 국가의 실정을 알리는 과정에서 소련공산당의 기만과 착취가 함께 드러나게 되자 인민들은 반대로 공산당에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개혁의 역효과가 두려웠던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결국 소비에트연방은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습니다.

소련의 영향이 약해지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이어 1991년 12월에 소련이 붕괴되자 우크라이나도 곧바로 독립을 또다시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소련 붕괴로 무너진 마당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어째서 해체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도리어 소련붕괴 당시 16개국이었던 나토가맹국이 30개국이상으로 확대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주취자가 술을 마신 이유가 모두 다르듯, 각 진영들에 그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무너지긴 했지만 핵을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의 막대한 군사력과 확장의지에 대한 공포, 군사동맹을 통해 서방세계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경제논리, 미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려는 패배주의 등이 이유가 되겠습니다.
러시아 입장에서야 바르샤바조약기구가 무너진 상황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한 동맹국가들이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으며 완충지대였던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나토동맹과 직접 국경을 맞대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겠죠.

이제 다시 2022년의 개전 시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앞서 돈바스에서 도네츠크와 루간스크가 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고 언급하였습니다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괴뢰정부인 이들과의 내전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2015년 ‘민스크 합의’라는 강화조약을 체결합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프랑스, 특히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도네츠크-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자치를 인정하면 러시아군은 철군한다는 합의로 일단 내전은 매듭지어졌습니다만, 러시아는 지난 8년간 압박을 멈추지 않고 군사행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2019년 당선된 현재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민스크합의가 국가분열을 조장하는 불평등조약이라 규정하고 2021년 1월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죠. 여기에서 푸틴이 간과했던 바는 2014년 크림반도 점령시의 5만의 허약한 우크라이나군을 상대하여 조기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예단이었습니다.
퇴역군인 90만과 나토가맹국들로부터의 군비지원을 전혀 예상치못한 점이 패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방심한 틈을 타 백만군대를 육성하고 GPS 조준 다연장미사일(하이마스)를 배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 왔던 겁니다.

하이마스 (출처: ⓒ AFP=뉴스1)

서두에 인용한 라틴어 경구 ‘Si vis pacem, para bellum’를 다시금 상기할 여지가 있습니다. 칼날이 칼집에 있어 발도되지 않는 상황이 가장 좋겠지만, 일단 칼이 뽑힌다면 칼을 사용하는 방법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 하듯이. 만약 전쟁 발발에 특정 패턴과 논리적인 사고가 개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누구도 러시아의 월경을 미리 예상할 수 없었고 누구도 전쟁의 양상을 점칠 수 없었듯이, 전쟁은 철저히 비논리적인 행동양식입니다.
냉철한 분석과 논리적 판단이기는커녕 질투와 분노와 선입견과 오해를 그저 폭력으로 덮으려는, 작은 거짓말을 더 큰 거짓말로 희석시키려다 스스로가 만든 거짓말을 진실로 믿어버리는 개미지옥의 무저갱입니다.

앞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서로 다른 입장과 역사적 배경을 언급하였습니다만, 마치 1950년 한국전쟁을 방불케하는 지리한 고지전이 이어지며 수많은 군인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 상황이 진행되는 와중에 특정 국가를 향한 편향된 시각을 피력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시작하였건 어떤 방식으로 싸우건 모든 전쟁은 비극이며, 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피해자는 각국의 국민들과 군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나토의 압박을 막아내려는 러시아도, 크림반도와 돈바스의 영토를 빼앗기기 싫은 우크라이나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수백만의 무덤과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그 어떤 이유를 들이민다고 해도 설득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자라는 밀로 만든 빵이 지난 수년 간 죽은 수천만 명의 군인들의 피를 자양분으로 자란 결실이라면 그 슬픔을 어떻게 목구멍으로 넘겨 배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________________(위 글은 작가 개인의 판단이므로 독자의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