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 파라벨룸(2-1)-조현일 에세이

태권V (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70년대말에 어린시절을 보낸 저는, 선생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수업의 기억보다는 소풍(현장체험수업)이나 학교생 전체가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간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유는 잊어버린지 한참이지만 한달에 한번은 대한극장이나 피카디리극장에서 총천연색 만화영화를 보거나 국가 이데올로기의 홍보의 느낌이 강한 영화들을 선생님들의 인솔로 보러 갔더랬습니다.

당시에는 태권V 시리즈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상당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과는 너무나도 달리 아이들이 넘쳐나 한 반이 70명이 넘어가기가 대수여서 어쩔 수없이 35명이 오전에 학교를 가고 나머지 35명이 오후에 등교하여 수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전에 등교하는 친구들은 볼 수 없는 아침시간 만화영화에는 ‘이겨라 승리호’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그랜다이져’ 등의 다양한 로보트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어 오후에 등교하는 친구들이 그 내용을 친절히 설명해 주기도 했습니다. 재방송도 케이블도 없던 시절이니 놓치면 영원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죠.

일본색이 강한 장면은 방송사에서 철저하게 삭제해서 모든 로보트가 국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어째서 등장인물들의 헤어컬러가 저리도 다양할까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오전반 급우들의 에피소드의 설명이 끝나면 누구나 궁금해지는 질문이 쏟아집니다.
‘그럼 태권V와 그랜다이저랑 싸우면 누가 이겨?’ 진지한 급우 몇은 어렵사리 구한 데이터를 들이밀며 승패를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랜다이저와 태권V 모두 하늘을 날 수 없는 로보트인 바, 부스터가 공격지원을 하는 그랜다이저가 합체를 통해 공중공격을 할 경우 태권V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태권V는 무술 프로그램이 탑재되어 있기도 하지만 수중전을 위한 특수패키지(스쿠버장비)를 갖추고 있어 그랜다이져와의 전투를 해양으로 유도할 경우 우위를 점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체안도 등장하였습니다.
태권V가 우주공간으로 날아가는 영상을 본 우리들은 궤도에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추력이 부족하니 새턴 V 정도의 부스터가 필요할 지도 모르며 어느 정도의 연료가 필요할 지 계산하기 위해 고가의 카시오 계산기를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할 나위 없이 유치한 ‘누가 이길까?’ 놀음이었습니다만, 전쟁(사)학자들은 이 놀음을 진지하게 진행합니다.

이라크 전쟁(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2003년 3월에 발발한 이라크 전쟁(제2차 걸프전)이 개전 되기 수개월 전부터 전쟁학자들은 1990년의 걸프전의 전투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쟁의 추이를 예측하기 위해 수퍼컴퓨터를 활용하였습니다. 2003년 2월 콜린 파월이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탈레반에 지원하고 있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전쟁을 예고하기 이전부터 데이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워게임이 진행되고 있었죠.
탈레반 고위간부였던 이븐 셰이크 알 리비를 호되게 고문하여 얻어낸 첩보를 바탕으로 탄저균의 생화학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오시라크 원전의 핵무기도 보유하고 있을지 모른다며 전쟁의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즉각 규정하고 UN 결정에 반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이라크 침공을 결정합니다.
전쟁이 발발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UN는 사찰단을 이라크로 급파하였고 예상했듯이 대량살상무기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부시 정부는 ‘비인도적 독재정권의 제거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강행합니다. 강행결정에 미국의 국방연구소의 전쟁학자들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전제로 하는 전면전에서 어떤 양상이 일어날 것인가 예측해야만 했습니다.

태권V와 그랜다이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핵과 탄저균을 보유한 이라크와 강력한 해공군을 보유한 미국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싸움은 어디서 해야할까? 미국 본토가 아니라 걸프와 사막이니 어떤 전략을 써야 할까? 엄청난 비용이 투입되는 전쟁인데 빨리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얼마나 전투가 지속될 것 같은가? 다양한 시나리오가 제시되었고 유력한 몇 개의 시뮬레이션이 활주로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텔스 전폭기와 당장이라도 걸프만에 상륙준비가 되어 있던 에이브람스 전차의 컴퓨터에 입력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CNN과 전쟁역사가들의 분석을 통해 전세계인들에게 주지의 사실이 되었지만, 미군이 수 년에 걸쳐 이라크 침공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비논리적이며 즉흥적으로 시작되는지 말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그렇다면 이 전쟁은 어째서 이토록 비논리적이고 반직관적이고 억측으로 가득차 있을까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장담하였고 개전 일주일이면 수도 키예우가 함락되면서 종전될 것이라 예측했던 싸움이 어째서 이토록 장기전으로 확전되고야 말았던 걸까요? 이 물음에는 누구도 답하기 힘들 것입니다.
비논리와 반직관과 억측에 논리적 분석과 가능성의 가늠이라는 잣대를 도저히 댈 수가 없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일이 이렇게나 시궁창에 빠지게 된 맥락을 들여다보는 접근방식을 취해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개전의 시점은 2022년이지만 사실 이 싸움의 맥락은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다툼의 뿌리를 보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조지아에 개입할 때부터 ‘대러시아의 부활’을 내세우며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등과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의 창설을 주장해 왔었습니다만, 2013년 말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푸틴의 뜻을 거슬러 유럽연합과의 경제협정을 체결합니다.
이 경제협정을 바탕으로 이후에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이어 나토에도 슬쩍 발을 들여 놓으려는 속셈이었죠. 하지만 친러파였던 야누코비치는 푸틴의 반대에 풀이 죽어 유럽연합과의 협정 체결 교섭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우크라이나 국내의 민족주의파와 친유럽파가 반정부운동을 벌여 정부축출을 감행합니다.

정치적 코너에 몰린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정권이 붕괴되고 맙니다. 고도화된 민주/자본주의 사회를 누리고 있는 우리로서는 아무리 민족주의자가 반정부운동을 벌인다고 해서 대통령이 도망을 치는 막장 드라마가 가능할까 싶지만, 우크라이나는 1991년 고르바쵸프의 구소련이 붕괴하고 신생독립하여 아직 확고한 기반을 닦지 못한 국가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구소련시대에 크림반도는 소련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공화국의 영토였습니다. 스탈린 사후에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후르시초프는 1954년 우크라이나와의 친분을 강화하기 위해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양도합니다.

스탈린 통치하에서 우크라이나가 학정에 시달려왔다는 사실을 잘 아는 후르시초프가 우호의 증표로 크리미아를 우크라이나에게 선물한 겁니다. 그런데 91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자 크림반도는 연방붕괴의 혼란을 틈타 1992년 ‘크림자치공화국’이라는 국명으로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합니다.
지정학적인 요충지인 크림반도를 포기할 수 없었던 우크라이나는 크림자치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힘으로 누를 수도 없었기에 ‘자치구’로 방치하기로 하였고, 이후에 계속적으로 크림반도의 귀속을 둘러싼 영토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크림반도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방치하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2014년 친러 야누코비치 정권이 붕괴하자 크림반도의 러시아계 주민들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가 더이상 크림반도의 자치를 묵인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확산하였고, 이를 감지한 푸틴은 불안을 틈타 무장군인들을 크림반도로 급파합니다.
표면상으로는 크림반도의 정치적 불안을 안정시킨다는 ‘경찰업무’였지만 AK소총을 든 군인이 입구를 지키는 투표소에서 ‘크림반도의 러시아 편입’의 주민투표를 강행하였죠. 실탄이 장전된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이 노려보고 있는데 어떻게 반대표를 찍을 수 있겠습니까.

2014년 3월 16일, 주민투표의 결과가 발표되고 드디어 크림반도는 러시아에 편입되어 버렸습니다. 죄없는 크림반도 주민들은 정치놀음에 독립을 얻지 못하고 우크라이나로 넘어갔다가 다시 러시아의 일부가 되어 버린 비극의 피해자입니다. 이와 동시에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를 포함하는 ‘돈바스’ 지역에서 친러 무장세력이 무력투쟁을 시작합니다.
물론 러시아는 군의 개입을 부인하였지만 실제로는 러시아가 파견한 용병들이 돈바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과 대립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전쟁 (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이 분쟁이 시작되기 이전의 우크라이나는 나토에의 가입을 찬성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는 분열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병합되고 돈바스에서 러시아와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오히려 러시아에 저항하여 싸우자는 민족주의 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유럽연합과 나토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수호하자는 주전론자들이 정치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주전론의 부흥은 푸틴이 꿈꾸는 ‘위대한 러시아의 부활’이라는 러시아민족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푸틴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부활이 국가 분열로 이어지기를 바랬지만, 그 반대로 우크라이나를 내부적으로 결속시키는 양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토와 유럽연합은 ‘정의’를 세우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국권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연합의 국가들에게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2008년 4월 루마니아에서의 나토수뇌회의에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맹을 지지하는 선언이 발표된 바 있으나, 유럽의 곡창지대로 엄청난 양의 밀을 생산하는 우크라이나와 에너지 강국인 러시아 중 한쪽을 편들 경우 경제적인 보복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석유와 천연가스를 선택하면 빵을 먹지 못하게 될 것이고, 빵을 선택하면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할 것이었습니다. 나토 입장에서도 우크라이나를 가맹시킬 경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되면 군사동맹국으로서 러시아와 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만약 미국 주도의 나토가 대-러시아 전쟁에 개입하면 그야말로 핵무기가 동원되는 제3차 세계대전… 이러한 딜레마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게서 압박 받으면서도 나토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전형적인 ‘완충국가’의 지정학적 함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우크라이나 내부의 친러 세력(러시아가 심은 내분의 씨앗)과 민족주의 세력이 강경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러시아는 22년 2월 24일 드디어 포병대와 미사일 부대의 전면 포격 시작으로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하고 기갑공수부대가 벨라루스, 돈바스, 크림반도의 세 지역의 게이트웨이로 전격전blitzkrieg을 감행하여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넘고야 맙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면전이 개전하기 며칠 전부터 미국은 전쟁 발발 가능성을 점쳐 왔으며 크렘린궁은 우크라이나와 미국을 향해 지속적인 선전과 도발을 계속해 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전쟁가능성을 언급하자 제가 아는 몇몇 지인들은 만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실제로 전쟁을 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물어왔습니다.
국지전의 가능성은 충분했습니다. 아니, 이미 국지전은 지난 10년 동안 계속되어 왔기에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죠. 하지만 선전포고에 이은 전면전은 양상이 다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서방세계에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지만 협력관계 또한 긴밀하기에, 전면전을 시작한다는 선언은 이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천문학적인 경제적 피해와 심각한 인프라 손실을 감수하겠다는 결정이 되겠는데, 이는 누가 보아도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에게나 ‘어떤 미친 놈이 21세기에 감히 전쟁을 시작하냐? 논리적으로 생각을 좀 해보고 물어보지 그래?’라며 반문을 했죠. 태권V와 그랜다이저가 싸우려면 서로간의 전략전술적 장단점을 파악하고 어떤 전략전술을 통해 승리를 쟁취할까 고민을 해 보아야 하며, 서로간의 전력차가 크지 않다면 싸움을 통한 이익이 손해보다 그리 크지 않을 것이며,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냉철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가 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피난민 (출처:연합뉴스)

태권V와 그랜다이저의 싸움이야 파일럿 김훈이나 외계행성에서 지구로 유배된 지크프리드 왕자가 개인적으로 벌이는 전투가 되겠지만(싸우는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국가간의 전면전쟁은 국민 전체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는 비참한 결과를 수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심각하고 큰 스케일의 정치경제적 결정을 심사숙고하지도 않고 내린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은 실제로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개전 이후 또다시 지인들에게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그럼 전쟁은 언제 끝날 수 있는거야?’ 우크라이나의 절대적인 군사 열세의 데이터만 보면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다보니 전쟁이 시작되었군. 하지만 열흘 이내에 끝날거야.’ 주식시장에 민감한 지인은 ‘네 말이 맞기를 바란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쟁은 아직 출구가 보이지 않는 교착 상태입니다.

러시아는 본격적인 전쟁 이전인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선진국정상회담인 G8에서 배제되고 국제거래망인 ‘스위프트(국제은행간통신협회; 국제송금네트워크)’에서도 퇴출되면서 국제사회로부터 강력한 경제 제재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이 모든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굳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우크라이나와 파라벨룸(2-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________________(위 글은 작가 개인의 판단이므로 독자의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