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연습하다.-김진해 교수의 수련후기-

4년 전 캐나다에서 합기도를 처음 접했습니다. 철학자이자 교육운동가인 우치다 타츠루(內田樹) 선생이 자신의 책 속에 합기도 얘기를 언뜻언뜻 비쳐 ‘이건 뭐지’ 했었죠. 그는 합기도 7단이고, 고베에 있는 자신의 집 1층에 개풍관(凱風館)이라는 도장을 열어 배움의 공동체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평생 합기도를 수련하면서 ‘배움’이라는 게 어떻게 촉발되는지, ‘공동체’는 무엇이고, ‘어른’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책에 썼습니다. 궁금했습니다. 하나의 무술을 평생 연마하는 것도 놀랍지만, 무술을 통해 배움과 삶의 원리를 깨우친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도장을 찾아 등록을 했죠. 일본인 왕사부와 캐나다인 사부와는 말도 통하지 않아 막막했습니다. 몸은 막대기처럼 뻣뻣했죠. 오른발을 내디뎌야 할 때 왼발이 나갔고, 한 바퀴 돌아야 할 때 반 바퀴밖에 못 돌았습니다. 동그랗게 굴러야 하는데 네모나게 굴렀습니다. 나아지는 건 없고 굳은 몸은 매번 굼뜨기만 했습니다. 던져질 때마다 땅바닥에 마른 생선 패대기치듯 둔탁했습니다. 파키스탄 출신의 유단자 선배는 그게 재미있는지 더욱 힘껏 저를 패대기쳐 주었습니다. 도약은 없고 지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게 좋더군요. 바닥에 던져져도 기쁘다니. ‘행복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더군요.

1년을 어설프게 배우다가 귀국하자마자, 천만다행(!)으로 본부도장에서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논리 싸움이 직업인지라 상대를 설복시키면 우쭐하고 설복당하면 우울해지는데, 합기도를 배우고 나서야 이렇게 남을 이겨먹으려는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삶이란 것이 누군가를 이겨야 올라서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합기도는 이 시대의 상식에 도전하는 무도입니다. 한없이 부드러워지라거나 억울함을 참으라거나 비겁하게 도망가라는 게 아닙니다. 삶의 모순을 피하지 말고 힘껏 껴안으라는 거죠.

우리 선생님은 변덕스러우십니다. 힘을 빼라고 했다가 힘을 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생각을 안 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손에 집중할라치면 허리를 중시하라 하고, 허리에 신경을 쓰고 있으면 거리를 강조하십니다. 상대가 쫓아오면 잽싸게 도망치라고 하시다가 상대의 중심을 향해 상대보다 더 먼저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음식을 대하는 선생님 모습도 비슷하군요. 고기를 좋아하시는 듯하다가 국수를 좋아하시고, 국물음식을 즐기시는 듯하다가는 볶음에 환호하시더군요…. 여하튼 주문한 음식은 항상 깨끗하게 비우십니다. 그게 몸으로 체득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유연함이겠죠. 예측불허와 포용력!

선생님의 변덕(!)은 합기도란 무도가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이겠죠. 움직이기(동, 動)와 멈추기(정, 靜)는 끝없이 반복되고, 공격자가 일순간 방어자가 됩니다. 이완에서 오는 힘의 자각이야말로 합기도 수련의 핵심일 텐데, 이 얼마나 모순된 말입니까. 힘을 빼야 힘을 쓸 수 있다니!

합기도는 어디에 도달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반복입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지만 반복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혼자 잘 한다고 끝나는 일도 아닙니다. 유연한 고수는 초심자를 만나면 초심자로 내려섭니다. 상대에 따라 다른 기운과 빠르기로 조화롭게 대응하는 걸 반복합니다. 조화와 공존의 기술을 얼마나 완벽하게 구사할지를 고민할 뿐입니다. 고수는 남들이 못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남들도 하는 걸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더군요.

합기도 도장은 조화로운 삶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어봤자 깨지거나 버려질 뿐입니다. 끝없는 흐름 위에서 상대와 적절한 거리와 속도를 유지하면서 다가서기와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게 인생 아니겠나 싶더군요. 그게 맞더라구요. 합기도는 어느 한 편에 서기보다는 모순과 갈등의 한가운데 있는 연습을 하게 합니다. 거기에 길이 있으므로.

그동안 수련을 하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제 속에는 제대로 된 힘이 아니라 완력만 있었습니다. 그걸 정신적 번뇌나 골똘한 생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닥에 몸을 굴리고 내동이쳐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작위적이거나 의지적이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럽고 적절하면서도 정확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걸 말이죠.

몸은 자연의 힘을 흘려보내는 곳입니다. 몸은 타인과 교류하면서 타인이 처한 상황을 살피고 상대의 힘을 느끼되 반발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흘려보내는 곳입니다. 상대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설득하되, 그저 상대의 너그러움에만 기대지 않는 당당함도 지녀야 하더군요. 무도는 신체를 단련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도는 같이 사는 법을 익히는 길입니다. 헬스는 주위 사람과는 무관하게 자신에게 집중하는 고립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운동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위의 시선을 가장 의식하지요. 그래서 헬스는 근육을 타인에게 전시하는 일로 마무리됩니다. 축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운동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이겨야 합니다. 공은 보내도 상대선수는 발을 ‘담가서라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인 거죠(제가 그래왔습니다). 하지만 합기도는 경쟁을 반대합니다. 목표 달성이나 승패에 관심이 없습니다. 공존과 공생을 지향하며, 삶의 복잡성을 인정합니다.

 

새처럼 우리 나날이 항상 도약하거나 비약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진부한 일상의 반복이라는 게 사실에 더 가까울 겁니다. 이걸 받아들인다면, 이 진부한 반복 속에 있는 미세한 차이와 변주를 확연하게 알아차리는 능력을 키우는 게 과제일 겁니다. 어제와 똑같아 보이는 오늘이지만 어제와 다른 오늘. 어제보다 잘하려고 반복하거나 먹고살기 위해 마지못해 반복하는 게 아니라, 반복 자체를 사랑하고, 도약 없이 정체된(정체되어 보이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견뎌내는 일이 삶입니다.

그 반복 속의 차이를 감각하려면, 반복을 반복할 수 있게 자신을 추동할 내적 규율과 습(習)을 익혀야 하겠죠. 거기엔 약간의 무심함과 결과를 크게 기대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게 합기도 수련(修練)이더군요.

오늘도 젊은 모 도장장님한테 숨이 턱에 차도록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나옵니다. ‘내가 이걸 하고 있어!’, ‘이렇게 세게 던져지고 있다구!’, ‘던져지고 다시 일어나고 있다구!’ 게다가 우리 딸도 합기도를 배우고 있으니, 기적입니다. 5급인데 공중수신을 했다고 뻐기는데 믿어야 할지…

김진해(본부도장 오전부, 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