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중심편향/근육감각자동화

 테이블에 앉으니 꽃무늬 테이블 보 위에 명란파스타가 하얀 플레이트에 예쁘게 올려져 있습니다. 약간 늦은 점심이라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포크를 들어 파스타에 넣어 돌돌 말아 올립니다. 적당히 삶아진 면에 마요네즈와 섞인 명란이 약간 묻어있어 핑크색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입 안에서 살살 녹을 파스타 맛을 생각하며 벌써부터 혀에 감칠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와인도 곁들이면 좋겠지만, 대낮부터 알코올을 들이키는 건 회사 구내 식당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겠군요.지난 주에도 수요일에는 그랬으니 내일은 타르타르를 올린 커틀릿이 나올 지도 모르겠네…하며 기대해 봅니다. 이렇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파스타를 먹으며 저는 파스타를 먹는 방법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파스타를 먹는 행위가 그리 어려운 동작은 결코 아닐테니까요.

포크를 들어 파스타 면을 말아 올리고 입으로 가져오는 동작 그 자체가 고도의 숙련을 요구하는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이러한 행위, 즉 파스타를 먹는 방법을 ‘안다’는 건 어떤 종류의 ‘앎’일까요?
일찌기 가장 하찮고 기본적인 일도 따지기를 좋아했던 데카르트가 살아있다면 필시 제가 파스타를 먹는 행위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분석하려 했을 것입니다.

먼저 명란파스타가 올려져 있는 플레이트를 감지하고 이에 대한 정신적 표상을 형성합니다. 테이블과 파스타의 플레이트와 구내 식당이라는 사물/환경의 인지적 표상을 형성하여, 포크를 들어 음식을 섭취하겠다는 사물에 대한 지향적인 의도를 확정하고 이 의도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앎’이란 정신의 내부적인 작동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명란파스타를 섭취할 때 일어나는 행위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아닌 듯 합니다. 우리는 일단 어떠한 행위가 익숙해지면 순간순간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사고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하나의 동작을 일일이 사고하여 신경쓰며 근육을 움직인다면 이 행위를 ‘안다’고 표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명란파스타를 인지하고나면 어느새 입 안에 들어와 있는 맛있는 파스타를 느끼고 있을 테지요. 하지만 명란파스타를 먹는 행위는 원시적인 반사행동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행위에는 무언가를 먹고 에너지를 얻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몸과 행위와 의도와 의식에 대해 깊은 생각을 거듭하는 철학 분과가 ‘현상학現象學’입니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일찌기 지식은 체화體化된다는 주장을 한 바 있습니다. 몸이 세상에 대한 정신적 표상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반응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입으로 가져가 먹는다는 행위는,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포크의 사용법을 머리로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포크를 사용하여 명란파스타를 입으로 가져오는 행위를 아는 주체는 ‘몸’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행위는 신체가 변화함에 따라 변하며, 이에 동반하여 세상도 변한다고 말합니다. 포크는 절대불변의 사물이 아니라 우리 몸의 인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객체’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팬데믹으로 우리의 정신 건강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 비참한 상황을 회피하여 이전의 생활방식으로 회귀하거나, 혹은 혼란 속에서 평정심을 되찾기를 희구하고 있죠.

흐트러진 정신을 바로잡아보려고 어떤 이는 마인드컨트롤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저는 혼잡한 환경에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숨을 천천히 내쉬며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단절하고 남극의 얼음 동굴을 상상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그 장소에서 내 페르소나를 대신하는 동물(펭귄)을 만나는 상상을 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식을 배운 바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영화 ‘파이트클럽’에서도 주인공이 똑같은 방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론은 평정심을 찾기 위해 관점을 바꾸는 오랜 전통의 노하우의 하나입니다. ‘우주를 포용하고 영원을 헤아리며 만물의 변화를 목도하며 삶의 시작에서 죽음의 덧없음을 기억하라.’ 로마 황제 마커스 아우렐리우스가 남긴 경구입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말씀하였듯, 관점의 변화는 시공간의 인식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현상학적 인식 변화가 직접 물질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메를로-퐁티의 주장은 언뜻 일반적인 직관을 벗어나 있는 듯 보이지만 주목해 볼 만한 철학적 사유일 것입니다.

 현상학의 주장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마도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하여 격한 갈등과 감정적 동요의 원인을 다른 방향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변용變用’의 가능성일 것입니다.

관점이 달라진다고 해도 문제가 현실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상황의 와중에 있던 나 자신의 위상이 변화한 것이죠. 이때 일어나는 현상은 ‘자기중심적 편향’에서 벗어난 자신의 발견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나르시즘과 약한 과대망상의 성향을 가지는데, 자기중심적 편향을 버리는 순간 사고의 우선순위가 달리지게 됩니다.

세분화된 문제의 각 요소의 가중치가 달라지면서 개인은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현상학적’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를 ‘조망효과眺望效果’라고 부릅니다. 아웅다웅 다투며 일상에 치이는 그 누군가도 아폴로 11호가 보낸 푸른 별 지구의 사진을 보며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심리적 변용입니다.

달에 발을 내디딘 올드린은 월면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국경의 의미를 잊고 전쟁을 비이성적 자해행위로 인식하였다고 하죠. 메를로-퐁티는 ‘체현의 지각이론’을 통해 우리 몸이 어떻게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지 고찰하였습니다. 결국 개개인의 환경에 대한 이해는 신체를 통해 발현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사회는 변화하고 이와 동시에 모든 신체는 노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체는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신체의 대사와 근육의 반응을 고려하여 감각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특정 행위를 하는 와중에 의식적인 인지적 매개 없이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반복 훈련을 자발적으로 수행합니다. 이를 ‘근육 감각 자동화automatization of sensory muscular process’라고 부릅니다. 최초에는 인지 매개 과정이 필요하지만 반복 숙달로 자동화되면 생각하지 않아도 행위를 할 수 있게 되죠. 다름아닌 명란파스타를 먹는 기술의 습득입니다.

몸이 환경과 상황을 인지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외부에서 감각기로 전해지는 데이터에 의해서도 변화합니다만, 반대로 몸의 상태의 변화에 따라 상호작용 방식도 변화하게 되죠. 생물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박쥐의 생태를 연구하여, ‘우리가 초음파 감지 능력을 가지는 박쥐가 된다 하더라도 박쥐의 행동을 경험할 수 있을 뿐 박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학자들이 네이글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으니까요.

도장, 눈앞에 놓인 생존을 위해 절차탁마의 수련에만 집중해야하는 별세계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인식 방식은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이에 사회적으로 습득한 ‘암묵적 편견’이 작용하기도 하며, 감각 정보에 의해 행위의 일반화를 도출하고도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동적인 ‘습관’을 고치기도 하지 않습니까. 앞서 관점의 전환을 통한 자기중심적 편향을 극복하는 방식과 근육감각자동화를 통한 습관의 형성과 시행착오를 통한 습관의 교정을 언급하였습니다만, 이러한 방법론이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장소가 있습니다. 독자께서 매일 향하시는 ‘도장道場’입니다.

 도장은 일상복을 벗어 던지고 두꺼운 직물의 하얀 도포로 몸을 감싸고 사회경제적 지위를 모두 무시하고 개인의 인식과 행위의 체화만이 존재하는 특별한 시공간입니다. 외부 사회에서의 문제는 도장에서는 적용되기는커녕 문제에 신경을 기울일 여유를 주지 않는, 눈앞에 놓인 생존을 위해 절차탁마의 수련에만 집중해야하는 별세계입니다.

전공지식과 사회적 성공을 위한 노하우는 수련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죠. 다만 특별한 동작과 반응을 도출하기 위한 근육감각자동화가 반복적으로 요구되는 커리큘럼에 몸을 맡겨야 하는 개인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전 에세이에서 언급하였듯이, 계고는 답습과 타성에 빠지는 신체를 질타하고 새로운 신체적 사고를 요청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질적인 환경에 처한 신체는 자연스럽게 자기중심적 편향에서 탈피하려는 현상학적 방법론을 찾으려 합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기 스스로를 새로운 환경에 위치시키고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처절하고도 전략적으로 계산된 몸부림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장의 수련을 통해 자신만의 얼음동굴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고 페르소나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누가 압니까, 박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찾을 수 있을지도.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