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누구에게나 외국어를 처음 배우는 순간이 있습니다. 익숙치 않은 외국어를 몸에 익히기 위해 처음 배우는 단어는 재미있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단어군인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접한 외국어 단어가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안녕하세요’에 해당하는 단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솔직해 진다면 조금 다른 답이 돌아올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독일어에서 처음 배운 단어는 ‘샤이세Scheisse’. 함부르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이 단어를 입에 달고 있었습니다. 크게 발음하지는 않지만 들릴듯 말듯 반복해서 들려 뜻도 모르고 머리속에 각인되어 버렸죠.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기술제휴가 결정되어 독일 함부르크로 먼저 떠나신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은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독일어 한마디도 모른채 루프트한자 여객기에 올랐습니다.

국제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아 외국 학생들을 위한 독일어 수업에 들어가니 선생님께서 대뜸 제가 아는 독일어 단어를 하나만 말해 보라고 물으십니다. 농담조로 ‘샤이세’라고 하니 선생님께서 껄껄 웃으시더니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시며 또다시 그 단어를 입에 올리면 머리통을 부숴버리겠다고 정색을 하셨습니다.

아는 단어가 욕이니 저에게 적잖이 실망하신 선생님께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수업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너희들의 언어권에는 없지만 독일어에는 존재하는 재미있는 단어’라며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칠판에 적어주셨습니다. 수업에 끝나고 동급생들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영어에도, 일본어에도, 프랑스어에도, 중국어에도 없는 단어였습니다.

‘샤덴프로이데’는 남의 불행과 고통을 보며 느끼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고통을 의미하는 ‘샤덴Schaden’과 기쁨을 의미하는 ‘프로이데Freude’의 합성어입니다. 의미상으로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나라 속담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옛말은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아는 이의 성공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을 의미하니 독일어 단어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학의 연구자들에 의하면 샤덴프로이데는 인간 본성의 공격성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관찰자의 위상에서 타인의 고통을 보며 타인이 속한 공동체의 지위가 하락하는 상태를 자신이 속한 그룹의 위상이 상승한다고 해석하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 관계성은 곧바로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경쟁적 구도에 연결됩니다.

타인의 실패는 곧 나의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경쟁에서의 개인적 정체성의 인식이죠.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샤덴프로이데는 부도덕하고 불합리한 행위를 하는 타인이 처벌을 받을 때 느끼는 희열로도 해석됩니다. 악이 처벌받는 과정을 목도하며 공정성과 정의를 인식하는 과정에서의 쾌감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내가 속한 특정 사회구조 내에서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를 확인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독일인도 스스로 ‘샤덴프로이데’를 느낀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관계없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과 공감을 가지는 태도가 보다 높은 덕을 실현하는 방식이니 스스로에 대한 조롱이 아닌 이상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은 부덕不德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의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부덕으로 가득차 있는 듯 합니다. 타인을 향한 분노와 조롱과 혐오가 온라인 커뮤니티의 네트워크를 타고 전방향으로 확산되어 있습니다. 성공한 이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공개하고 비판을 가장한 원색적인 인신공격이 넘쳐납니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나락까지 떨어뜨리기 전까지는 살벌한 공격을 그만두려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던 이 부덕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요?

타인을 존경하고 추앙하는 대신 추락시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비뚤어진 태도는 ‘샤덴프로이데’를 닮은 듯 합니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유교의 사회 규율을 따라왔기에 ‘샤덴프로이데’를 드러내는 대신 내재화시켜 왔습니다. 과거급제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옆집 아들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지만 한편으로 질투한다고 해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죠. 하지만 전통사회가 붕괴하고 능력위주의 경쟁사회로 급변하면서 개인간의 혹은 공동체간의 경쟁이 표면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누군가의 지위가 상승하면 뒤쳐진 나의 지위는 동시적으로 하락하게 되는 제로섬 게임이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는 인식이었습니다. 부동산과 학벌, 계좌의 잔고의 비교로 개인은 언제나 뒤쳐질까봐 공포에 떨고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샤덴프로이데가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팽배한 이유는 타인의 불행이 안도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타인의 추락이 반사 이익을 초래하리라는 계산적인 기대입니다.

성공한 타인의 추락을 보며 그의 본질이 나의 본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고 열등감을 해소하지만, 이 사악한 감정을 정당화하기위해 허울좋은 ‘정의’라는 가치를 내겁니다. 여기에 언론은 대중을 자극하기 위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쏟아내며 진실을 호도합니다. 하지만 샤덴프로이데가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는 현상황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이 성취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는 슬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단순히 개탄할 사안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원이 슬퍼하고 반성해야만 할 일입니다.

사회의 불공정에 대한 피로, 법치주의에 대한 실망, 신뢰할 수 없는 사회 지도자층을 향한 분노, 부유층에 대한 길잃은 선망과 무산자無産者에 대한 혐오, 그리고 상대적인 박탈감…
‘정의’의 탈을 쓴 불합리한 구조에 대한 분노는 결국 ‘샤덴프로이데’라는 왜곡된 감정으로 확산되어,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보복하는 광기어린 원시 사회로 퇴행시키는 주체가 됩니다. 이러한 ‘퇴행退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는 한 발 물러서는 중도中道의 태도일 것입니다.

아이키도合氣道 계고稽古

개념상의 중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인데, 아마도 우리 도우道友들이 선택한 방식은 도장에서의 수련일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계고稽古 중 주어지는 도전적인 육체적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상에서 비롯한 피로와 분노를 순화시키는 순기능도 있지만, 아이키도合氣道의 덕목인 ‘배려配慮’를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도 수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분노와 실망과 선망과 혐오를 체련體鍊을 통해 단순히 억제하거나 방출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의 신체를 일부러 특정 상황에 처하게 하여 그 반응을 순수하게 유도하는 아이키도의 수련 방식은 감정의 해소解消를 넘어서 배려의 학습에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개념으로서의 ‘배려’는 누구나 쉽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는 있지만, 정신적인 보호기제로서의 선입견이나 감정에 휘둘리게 되면 실천은커녕 앞서 언급한 분노와 혐오에 덧씌워지게 됩니다.

수신하는 상대가 다치지 않고 몸을 가눌 수 있도록 돕는 실천적인 배려는 생각만 가지고서는 행동으로 발현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반복적인 수련을 통해 배려를 머릿속의 개념이 아닌 ‘몸’에 스며들도록 해야만 할 것입니다. 형形에 이미 배려의 사상이 녹아 있으니 형의 부단한 반복 수련이 이루어 질 수만 있다면 배려는 수련인의 신체에 개념이 아닌 실천으로서 스며들 수 있습니다.

샤덴프로이데에 휩싸인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파괴적인 분노와 혐오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배려의 학습을 통해 퇴행을 단호히 거부하는 덕德을 실천하시겠습니까.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