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합기도의 역사 – 창시자의 마지막 ‘합기도는 세상을 위한 것’

16. 본부도장 개축과 우에시바 모리헤이 승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1955년의 합기도 공개연무회 이후 다른 연무회에도 나와서 합기도의 진수를 선보였으며 도쿄와 이와마를 왔다갔다 하며 지방 출장지도도 다녔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사카 스이타시에 있는 아베 세이세키의 도장과 와카야마 신구시에 있는 히키쓰치 미치오의 도장에 자주 갔습니다. 아베 세이세키는 유명한 서예 선생이기도 했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만년에 서예가 크게 늘었던 것은 아베 세이세키의 영향이었습니다. 그리고 신구시에 있는 구마노숙도장은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내 도장이다.”라면서 자주 갔습니다.

왼쪽부터 사쿠마 기요시, 우에시바 모리헤이, 아베 세이세키

1960년 11월 3일 문화의 날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자수포장을 받습니다. 자수포장은 과학기술이나 스포츠 예술 분야의 공로자에게 주는 일본 정부의 훈장입니다. 무도가 중에는 유도의 미후네 규조 10단, 검도의 오가와 긴노스케 범사, 모치다 모리지 범사 등이 받았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대선생에게 이제 와서 뭘….”이라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 훈장을 담담하고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금 이렇게 합기도가 인정받게 된 것이 대단히 기쁩니다.”라는 게 수상의 변이었습니다.

마우이섬 최고봉 할레아칼라에서 축문을 올리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1961년 2월 28일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하와이에서 크게 활약하던 도헤이 고이치의 초대를 받아 하와이 합기도 본부회관 낙성식에 참가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 출발행사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와이에 가는 것은 생각해 보면 이번에 ‘은의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지금은 국내에 ‘황금의 다리’를 놓고 있지만 해외에도 더욱 다리를 놓아서, 결국 합기도를 가지고 동서에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모든 나라에 다리를 놓아 화합과 사랑으로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합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도 수행중이기 때문에 다리를 놓는 것만이 아니라 더더욱 진정한 무의 길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무산합기라는 것은 그처럼 진정한 무를 가지고 세계인류를 화합으로 이끌고 만유를 보편적인 사랑으로 감싸안는 것입니다.”

전설의 달인을 볼 수 있다는 기대로 하와이의 제자들은 무척 기뻐했고 이동할 때도 무장경관이 5대의 오토바이로 호위하며 퍼레이드 하듯이 이동하여 관광객들이 신기하게 볼 정도였습니다. 약 40일에 걸친 하와이 합기도 여행은 현지인들에게 매우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1964년 11월 3일 합기도를 창시한 공적으로 훈4등 욱일소수장을 받았습니다.

12월 3일 본부도장에서 열린 축하의 자리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이번에 폐하로부터 서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합기도인들을 대신하여 국가의 호의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합기도에 온 마음을 기울여 지구수리고성을 위해 일조하고 세계의 진정한 화합의 길을 만들어 가지 않겠습니까.”
이때쯤부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도쿄에 있는 날이 많아집니다. 본심은 이와마에서 무농일치의 생활을 계속하고 싶었겠지만 합기도의 발전을 위해 모두가 바라는대로 나서준 것입니다.

공익재단법인 합기회(AIKIKAI)

그리고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1967년에 옛본부도장을 근대적 3층 건물로 새로 지음으로써 합기회의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평생에 걸쳐 이때 딱 한번 아버지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다음해인 1968년 1월 12일 새 도장의 낙성식이 거행되었는데 참가자가 800명이 넘어 대성황이었습니다.

도장이 새로 지어진 이후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아침 수련에 빠짐 없이 나와 지도하였으며 제자들이 나이를 생각해 좀 쉬시도록 권하면 몹시 언짢아 하며 “나는 125살까지 살 것이야. 아직 수행을 더 해야 해.”라며 꾸짖었습니다.

아침 수련에 빠짐 없이 나와 지도하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1968년 10월 5일 히비야공회당에서 “신도장 낙성기념 전일본 합기도 연무대회”가 열렸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하얀 하카마를 입고 합기도의 진수를 연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마지막 공개연무였습니다.

1969년 3월 8일 이와마에서 돌아온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신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병이었던 간장장해로 인한 황달증상이 나타났는데 아무래도 상태가 이전과 달라 의사에게 보였더니 “마음 놓을 수 없는 상태이니 전문의에게 보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다음날 아침에 벌떡 일어나더니 수련해야 한다며 도장에서 몇 분간 마지막 수련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시 용태가 나빠져서 바로 게이오대학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결국 간암 말기로 판명되어 수술을 권했으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어서 도장으로 돌려보내 주게. 나는 도장에서 죽을 것이야. 도장에 있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질 않아.”라고 하므로 3월 26일에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도장 한구석에서 수련하는 소리를 듣고 땀냄새와 열기를 느끼며 끈임없이 합기의 동작을 반복했습니다.

4월 15일부터 용태가 나빠져서 이젠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생전에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제자들을 한 사람씩 만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합기도는 세상과 나라를 위한 것이네. 나 한 사람의 것이 아니야. 천하국가를 위한 거라고 생각해서 더욱 애써 주시게.”라며 마음을 담아 격려했습니다.

특히 오오사와 기사부로를 불러서 “모두를 잘 추스려서 깃쇼마루를 도와주게.”라고 하였으며 4월 25일 밤에 갑자기 열이 올랐을 때 깃쇼마루의 손을 꼭 잡고 “부탁한다…”라고 미소를 짓자 깃쇼마루는 “네.”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후 바로 혼수상태에 빠져서 4월 26일 오전 5시에 잠자듯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만86세였습니다.

같은 날 일본정부에서 서보장이라는 훈장이 수여되었으며 장례식을 전후로 다나베시 명예시민, 이와마쵸 명예쵸민 칭호를 받았습니다. 유골은 고잔사 경내에 있는 우에시바가 묘지에 매장되고 유발은 이와마에 있는 이바라기 도장, 아야베 덴노다이라에 있는 대본교 우에시바가 묘지, 신구에 있는 구마노숙 도장에 나누어 보관되었습니다.
6월 14일에 우에시바 깃쇼마루가 제2대 도주를 계승하였고 6월 26일에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아내인 하츠가 남편을 뒤따르듯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잔사에 있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묘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세상을 떠난 후 합기회는 제2대 도주인 우에시바 깃쇼마루를 중심으로 발전해 갑니다만 내부적으로 갈등 요소가 드러나게 됩니다. 합기회 본부도장의 사범부장으로 활약하며 합기도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도헤이 고이치와 깃쇼마루 제2대 도주 사이에는 합기도에 대해 서로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합기란 상대의 기에 맞추는 것이란 입장이었고 도헤이 고이치는 상대의 기에 일일이 다 맞출 수는 없으며 천지의 기에 맞춰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야마오카 텟슈의 흐름을 잇는 일구회(一九會)의 미소기 수행과 일본에 처음 요가를 전파한 나카무라 뎀푸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영향으로 기(氣)를 유난히 강조한 도헤이 고이치는 합기도에도 자신이 주장하는 기(氣)를 수행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와이에서 장기간 활동을 하면서 몸집이 큰 현지인들을 상대로 합기도를 전파했는데 힘이 월등한 외국인을 상대로 합기도 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경험은 자신의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인 1969년 1월 15일에 도헤이 고이치는 스승인 우에시바 모리헤이로부터 합기도 10단을 허락받습니다.

도헤이 고이치 10단 승단 축하회
도헤이 고이치

그리고 1971년에 합기회 안에서 기(氣)를 중심으로 한 지도를 하고 싶다고 당시 본부도장장이었던 오오사와 기사부로에게 제안합니다만 합기회는 우에시바 깃쇼마루 선생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해나가야 한다며 거절당합니다. 그러면 합기회 밖에서는 해도 되냐고 묻자 얼마든지 하시라는 대답에 따로 “기 연구회”를 조직합니다. 그러다 도헤이 고이치가 합기회를 떠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우에시바 깃쇼마루가 하와이와 미국의 합기도 도장에서 도헤이 고이치의 사진을 전부 떼라는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이에 도헤이 고이치는 더 이상은 함께 할 수 없다며 완전히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리하여 1974년에 “심신통일 합기도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합기회에서 나가버립니다. 도헤이 고이치는 명실공히 합기회 사범 최고 실력자였고 오랫동안 합기회의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합기회가 받은 타격은 상당히 컸습니다. 도헤이 고이치를 따라서 나간 사범 및 회원들도 다수 있었기에 합기회로써는 매우 뼈아픈 일이었습니다만 모두가 도헤이 고이치를 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氣)를 전면에 내세우고 합기도 수련의 중심에 두는 도헤이의 방식에 찬동하지 않는 사범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방식만이 옳다고 믿었던 도헤이 고이치는 합기도를 지도할 때 기술에 대해서 잔소리가 심했으며 사범들에게도 심한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니시오 쇼지 사범에게도 “니시오의 합기는 합기가 아니다. 니시오는 기(氣)를 내는 방법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 등 다소 독선적인 면도 있었기 때문에 도헤이 고이치에게 반발하는 사범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도헤이 고이치가 합기회에서 나간 것을 오히려 시원하게 생각하는 사범들도 다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이 일로 합기회는 더욱 결속을 다지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시미즈 겐지

도헤이 고이치보다 한 발 앞서 합기회에서 독립한 사범도 있었는데 시미즈 겐지 선생은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세상을 뜬 직후 1969년에 “시미즈 도장”으로 독립해 나왔습니다. 시미즈 겐지의 합기도가 딱히 기술이나 이념에서 합기회와 다른 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지도하는 합기도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합기도와 같을 수도 없는 것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장을 세우고 독립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982년에 자신의 고향인 후쿠오카 덴토(天道)에서 이름을 따서 “텐토류(天道流) 합기도”로 이름을 바꿉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스나도마리 간슈

그리고 또한 구마모토를 중심으로 규슈 지역에 합기도를 전파하던 스나도마리 간슈도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세상을 떠나자 합기회를 떠나 “만생관 합기도”로 독립을 합니다. 특히 합기도의 호흡력과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했는데 형인 스나도마리 가네모토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평전을 써서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도미키 겐지

도미키 겐지의 경우는 이미 패전 직후부터 합기도에 시합을 도입하여 독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와세다 대학교의 교육자 시절부터 학교에 합기도부를 창설하여 경기형식을 도입하였고 1961년에는 경기방식을 거의 확립했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 일본합기도협회를 설립함으로써 완전히 독립했다고 할 수 있는데 도미키 합기도, 도미키류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정식명칭은 “쇼도칸(소도관) 합기도”입니다.
쇼도칸이라는 이름은 도미키 겐지가 일본의 연호인 쇼와(소화)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본 자위대 격투술에 일부 채용됨으로써 실전성이 높다는 평가도 있습니다만 역시 합기도에 경기방식을 도입한 것은 합기도도 8단이지만 유도도 8단인 도미키 겐지가 오랫동안 수련한 유도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야마구치 세이고

그리고 합기도의 역사에서 꼭 알아야 할 인물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합기회 본부도장 사범이었던 야마구치 세이고입니다. 야마구치 세이고는 1943년에 학도병으로 동원되어 가미가제 특공대원이 되었으나 전쟁이 끝나면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1년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입문하여 합기도에 전념하게 됩니다.
1958년 7월에 버마(현재의 미얀마)에 파견되어 국방군에게 합기도를 지도하였고 1961년부터 다시 본부도장에서 지도했으며 메이지 대학 등에서도 지도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서도 합기도를 지도했는데 야마구치 세이고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훌륭한 합기도 선생이 매우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프랑스 합기도계에서 가장 유명한 크리스티앙 티시에 선생, 일본 본부도장의 야스노 마사토시 선생, 여성 합기도가 오카모토 요코 선생은 물론이고 한국에 매년 방문해서 지도하고 있는 야마시마 다케시 선생도 야마구치 세이고 선생의 합기도를 전하고 있는 실력자입니다.
사가와전 대동류 합기유술의 기무라 다쓰오 선생과 가시마신류 검술의 이나바 미노루 선생도 야마구치 세이고 선생에게 합기도를 배웠습니다.

자신을 전혀 내세우지 않아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본부도장의 진짜 실력자였고 그 제자들에 의해 점차로 알려지게 된 선생입니다. 야마구치 세이고 선생은 1994년 1월에 합기도 9단이 되었고 1996년 1월 2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마시마 다케시 선생 한국 강습회

“한 사람이라도 많은 이에게 합기도를”

그리고 또 한 사람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이 있습니다. 1954년에 메이지 대학에 입학과 동시에 합기도 본부도장에 입문하였고 1958년부터 본부도장 지도원이 되었으며 1969년에 자택에 “고바야시 도장”을 설립하였는데 1972년 11월부터 본부도장 지도사범을 그만두고 자기 도장 경영에 전념하였습니다.

고바야시 도장은 기본 이념을 “한 사람이라도 많은 이에게 합기도를” 보급하는 것에 둠으로써 일본 국내에도 산하에 수많은 지부 도장을 두고 합기도를 널리 보급하였으며 적극적인 해외교류를 통해 해외에도 활발하게 합기도를 전파하였습니다. 대한합기도회의 윤대현 회장도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1991년부터 한국에 합기도를 전파해 왔습니다.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과 윤대현 대한합기도회 회장

우에시바 모리헤이에 이어서 제2대 도주가 되어 합기도의 보급과 발전에 진력했던 우에시바 깃쇼마루는 1999년 1월 4일 세상을 떠나고 합기회는 우에시바 모리테루가 제3대 도주를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합기회는 2014년 기준으로 일본국내 2,400곳에 도장과 단체가 있으며 해외에도 140개 나라와 지역에 연맹, 도장, 단체 등이 있으며 서로 활발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특히 해외에선 프랑스가 합기도를 열심히 수련하고 있으며 그 수련인구가 30만에 이른다고 하고 유단자만 해도 3천 명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2012년부터 일본에서는 중학교에서 무도교육이 필수과목이 되면서 학교에 따라 합기도 수업이 도입된 곳도 있습니다.

사이토 모리히로 선생이 지도하던 이와마 도장은 사이토 모리히로 선생이 2002년 5월 13일 서거한 뒤 2004년에 그의 아들에 의해 합기회에서 독립하여 이와마 신신합기수련회로써 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합기도는 여러 조직으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합기회(AIKIKAI)가 가장 큰 조직으로 널리 합기도를 보급하고 있으며 다른 조직은 합기회에 비하면 매우 미미한 활동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이 작다고 해서 그곳에서 지도하는 합기도의 수준이 낮다고는 할 수 없으며 각자의 지도 이념과 개성에 따라 모두 열심히 합기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합기도가 다른 무도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승패를 가리지 않고 만유애호의 정신에 따라 나를 공격한 상대도 다치지 않도록 기술을 펼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수련을 하면 할수록 기술을 통해 상대와 나 자신를 돌아보고 화합하는 마음을 기르는 장점이 있으며, 점점 인간의 마음을 잃고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사회가 되어 가는 현실에서 인간의 마음을 되돌리는 커다란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일수록 약자를 지켜주는 마음을 기를 수 있는 무도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남기신 합기도 말고는 없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일수록 약자를 지켜주는 마음을 기를 수 있는 무도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남기신 합기도 말고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합기도를 세상에 넓히고 후세에도 이어가는 것은 창시자가 남기신 기술을 통해서 창시자의 마음을 넓히고 이어가는 것에 진정한 뜻이 있습니다.
창시자의 많은 직제자들이 합기도가 형태만 남고 원래의 진정한 기술과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앞으로 합기도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련자들의 진지한 구도심이 요구되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스탠리 프래닌과 사이토 모리히로

그리고 합기도의 역사에서 진짜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합기도가이자 “아이키도 저널(구 아이키 뉴스)”의 편집장인 스탠리 프래닌입니다.
1962년에 미국에서 양신관 합기도를 시작한 스탠리 프래닌은 그후 도헤이 선생의 합기도, 합기회의 합기도, 사이토 모리히로의 합기도를 두루 경험하며 수련을 쌓았습니다.

스탠리 프래닌은 1977년에 일본으로 이주하여 사이토 모리히로 선생의 이와마 도장에서 수련을 하면서 제2대 도주인 우에시바 깃쇼마루를 비롯하여 수 많은 직제자들을 인터뷰하였으며 대동류 합기유술 다케다 소카쿠의 아들인 다케다 도키무네도 인터뷰를 하는 등, 20년 동안 200회가 넘는 인터뷰를 하면서 합기도의 역사에 대해 수많은 자료를 남겼습니다.

이번 기사에 쓰인 자료도 사실 스탠리 프래닌이 남긴 자료에 기초한 것이 매우 많습니다. 스탠리 프래닌은 2017년 3월 7일 세상을 떠났지만 아이키도 저널은 계속해서 간행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6회에 걸쳐 합기도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알아봤습니다만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뿐 아니라 그 제자들도 치열한 구도심으로 합기도를 넓혀 왔고 각자가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까지 다 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우선 이정도에서 합기도의 역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합기도역사 제5부 다시보기>
<합기도역사 제1부 다시보기>

 

<참고문헌> :
개정신판 합기도 교본 – 합기도의 역사와 전개 – 우에시바 깃쇼마루 저
월간 비전 2008년 12월호 외 몇 개의 합기도 관련 특집기사
기의 확립 – 나카무라 뎀푸와 우에시바 모리헤이 – 도헤이 고이치 저
합기도 수행 – 시오다 고조 저
투명한 힘 – 기무라 다쓰오 저
인터넷 사이트 R 영계이야기.네트 – 데구치 오니사부로 대도서관
인터넷 사이트 임협대사전 야쿠자위키
합기도 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전 – 우에시바 깃쇼마루 저
논문 – 합기도 형성과정 연구 (1) – 시시다 후미아키 (와세다 대학)
신음류를 철학하다 – 에도 야규의 심법과 도법(1) – 아카바네 다쓰오
합기도에 살다 – 타다 히로시 저
합기진수 – 아이키, 마이키, 신인합일이라는 비법 – 야스에 구니오 저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합기도 – 직제자들이 말하는 개조 (2)

김의수
㈜Contents Lab Zavak 실장 SBS 방송 아카데미 제8기 일본어 영상번역과정 졸업 / 최우수상 수상 SBS 드래곤볼 시리즈 더빙번역 투니버스 격투왕 바키 더빙번역 바람의 검심 DVD 부클릿 번역 감수 그 외 일본 영화 및 애니메이션의 DVD, BD 자막 번역 다수 E-Mail: yuuj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