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천명(2-2) 조현일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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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유랑을 마치고 진의 도성 부함에서 일정을 정리하고자 짐을 푼 공자는 제자들에게 기별하여 당시 잠시 거주하던 저택의 정원에 모두를 모았습니다. 저택 앞에 펼쳐진 넓은 강변에 어울리게 밤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공자 일행은 아무 말 없이 북쪽 하늘을 응시하며 빛나는 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공자가 입을 떼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여러 별들이…’ 운을 떼었지만 다음을 잇지 못하고 공자는 몇 번이나 같은 싯구를 반복하였습니다.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여러 별들이…’ 여전히 다음 싯구를 잇지 못하고 있었죠. 자로가 말을 이었습니다.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여러 별들이 이를 감싼다.’ 자로는 그 말을 한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서서 두 손을 좌우로 펼쳤습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도취되어 내면에서 솟구치는 감흥을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로의 싯구에 댓구를 더하는 자공.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여러 별들이 이를 맞이한다.’ ‘자공을 대신하여 자로는 앉은자리에서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별들이 북극성을 맞이하는 자세를 몸짓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안회가 자기 나름의 싯구를 더합니다.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여러 별들이 이를 모신다.’ ‘안회는 공자를 향하여 정좌하더니 마치 공자가 북극성이라도 되는 듯 깊이 머리를 조아리더니 언제까지고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공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여러 별들이 그 주위를 돈다.’ (‘위정’ 편) ‘자로도, 자공도, 안회도 말없이 공자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주위를 돈다’라는 구절의 의미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공자가 말하고 제자들을 둘러보시더니, ‘이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 내게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다른 별들이 주위를 돌고 있는 듯이 보인다. 도는지 안 도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는 도는 듯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이 밤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공자의 제자 안회(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공자의 말에 우리는 모두 밤하늘을 올려보았습니다. (…) 공자가 지금 우리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큰 사고에 의식을 집중하고 이를 바탕 삼아 인간 삶의 문제를 사색한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여러 별들이 주위를 돈다’하고 안회가 암송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안회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 안회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나아가더니 대평원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감동의 파도에 휩싸여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는 이노우에 ‘공자’에서의 인용)

여러번 같은 구절을 읽었지만 저는 여기에서 안회와 함께 눈이 뜨거워집니다.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 콘텐트를 통해 배우들과 캐릭터들의 연기를 수없이 보아왔기에 오늘날의 우리는 타인의 감정 표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슬픈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고 억울한 상황에 분노하고 우스운 상황에서 키득거릴 수 있는 오늘의 우리는 2천5백 년 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감정을 느낄 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공자와 같은 성인을 가까이 모시며 큰 가르침과 제자를 향한 무한한 신뢰에 느낄 무거운 감동을 그들이 어떻게 주워 담을 지 알 수 없군요.

안회는 흘러넘치는 감정을 대평원을 향해 걸어감으로써 일말 주체해 보려고 하였을 겁니다. 소설 속에서 공자와 언강이 만나는 장면도 제가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번개가 평원의 마른 나무에 불을 붙이는 폭풍야의 한복판에 공자와 제자들은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깁니다. 모두들 비를 피하고 천둥이 두려워 혼비백산인데 공자는 가만히 앉아 깊은 사색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 의연한 모습에 경도된 언강은 당장 공자의 제자가 되기를 청합니다.
공자 사후 30년이 지나 언강도 폭풍우가 내리치는 밤 사람들에게 공자의 가부좌를 재현하자고 제안합니다. 다만 언강은 공자와 같은 성인이 아니기에 가부좌가 아닌 정좌正坐를 틀어 앉는군요.

‘비가 내립니다. 아까부터 번갯불이 번득이더니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자, 여러분, 어서 방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사방이 구멍투성이라 비가 조금만 세차게 뿌려도 물이 새어 들어옵니다. (…) 송의 도성 교외의 한 농가에서 공자와 함께 처음으로 천둥 번개가 치는 밤을 새웠는데, 그 이래로 천둥 번개만 치면 이렇게 앉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천둥 번개와 비바람에 몸을 드러내고, 마음을 드러내고, 천지의 마음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 자리에서 무릎을 가지런히 하고 꿇어앉아서 마당 쪽을 바라보십시오. 천둥 번개, 세찬 비바람! 마음 놓으시고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이럴 때는 공자가 늘 그랬듯이,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천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잠시 천둥 번개에 얼굴을 드러내고, 마음을 드러내고, 천지의 분노가 잠잠해지기를 조용히 앉아 기다리기로 합시다.’ (이노우에, ‘공자’)

저는 여기서 언강이 공자의 ‘천명天命’ 사유를 계승하여 실천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얼마전 우연히 밥먹다가 만난 대학동창과 반갑게 인사하다가 ‘아, 우리도 이제 50이 넘었네. 지천명知天命하였는가?’라고 물어오기에 ‘글쎄다…’고 대답했었습니다. 대기업을 거쳐 자신의 회사를 키워내며 사회적으로 성공가도를 걸어왔던 그는 아마도 진작 천명을 이해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리저리 흘러다닌 저로서는 천명을 안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천명 (출서: 티스토리 ‘씨원뉴스’)

이노우에 소설 속의 언강도 마을에 모인 사람들로부터 공자가 ‘천명’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언강은 공자의 만년 노나라 도성의 강학당에서 강설하는 공자가 나이 쉰에 천명을 알았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공자는 ‘천명’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공자가 진과 채로 유랑을 떠나기 전 위나라에 머무르고 있을 때, 황하를 건너기 위해 나루터에 머무른 적이 있었습니다.

진과 채를 이끄는 제후들을 만나 전쟁을 멈추자는 설득을 하기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자로와 자공, 안회도 공자를 모시고 황하의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진나라에 갑작스런 정변이 일어나 두 명의 제후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설득의 대상을 잃어버린 공자는 나루터에서 돌아서며 말합니다. ‘아름답구나, 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이여. 내가 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역시 천명이로다.’ ‘천명을 안다’는 건 하늘이 개인에게 부여한 사명을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거겠죠. 공자가 쉰에 ‘지천명’이라고 하였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50의 생일날 천명을 이해한다는 건 아닐 겁니다. 사람마다 천명을 아는 시기도 다를 것이며 제각기 자기 분수에 맞는 천명을 받게 될 것이죠. 젊어서 천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가치있는 일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며 죽기 직전에 천명이 그런 것이었나 알아차리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모르고 생을 마감하는 이도 있겠죠. 하지만 공자는 만일 천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바쳐 결행하여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결실이 없을 수도 있겠고 체념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를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체념은 할 지언정 그때까지는 체념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복과 재앙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과 죽음, 가난과 재물, 성공과 실패를 모두 하늘에 맡깁니다. 나는 다만 노력을 멈추지 않을 따름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따지지 않는 분투. 이것이 삶을 향한 이상적인 태도입니다.

누구나 잘 아는 바이지만 실천이 어렵죠. ‘어떤 화가 덮치든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타인을 원망하지도 않아야 할 것이며, 매일 아침 하늘을 향해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을 이루기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저 내 머리 위에 하늘이 펼쳐져 있으니 인사를 하는 거라고 하죠. ‘인사를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기분이 좋다. 이유는 모르겠다.’ (괄호는 이노우에, ‘공자’의 재인용)

공자의 철학 예

공자의 말씀처럼, 인간사회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며, 반대로 도가 끊어져 세상이 혼란에 빠지는 것 또한 천명일 수 밖에 없으니, 우리가 이루어 낼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개인의 미약한 힘으로나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 외에 선택지가 있을까요. 개인의 계발에 방점을 두는 서양의 계몽주의자라면 적극 반대하겠지만, 저는 개인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다거나 움직이려는 의도는 부질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쟁도 질병도, 악과 잔인함도 모두 천명의 섭리라고 할 수 있을테니까요. 다만 거대한 천명에 따라 살아가거나 또는 천명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을 뿐입니다.

천명을 깨닫고 옳다고 판단된다면 그 사명에 목숨을 걸 수 밖에 없겠죠. 처한 상황이나 하늘이 주신 사명이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아 천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천명과 싸워 자기자신의 파괴를 감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배덕背德을 목도한다면 인간의 의무로 예禮를 전달하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잔소리하는 꼰대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예를 전할 수 있다면 기꺼이 꼰대가 되겠습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모시자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자 그가 실천한 태도입니다.

공자는 미증유의 난세에서 언제나 절망에 가까운 심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의예지신을 마음을 다해 전달하려 했지만 어떤 군주도 공자의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난세에서도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기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난세 철학의 근본에 ‘천명’을 두고 섭리 속에 자신을 던져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자신의 사명을 신뢰하며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만 하카마를 입고 있다는 상태 자체가 기분이 좋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카마의 다섯 줄을 상징하는 인의예지신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강한 의지의 표현인 성, 그리고 천명. 이 모든 사상을 허리에 두르고 계고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는 공자의 가르침과 천명을 과연 몸으로 성실하게 실천하고 있을까요? 그렇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면 더없이 자랑스럽겠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카마를 입고 있다는 상태 자체가 기분이 좋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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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