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천명(2-1) 조현일 에세이

계고를 마치고 도장의 정리가 종료되면 언제나 그렇듯이 도복을 정리합니다. 말씀드리기는 부끄럽지만, 저는 언제나 어째서 하카마는 좌우대칭이 아닐까 아쉬워합니다. 수백 번 켜고 접고 다시 펼쳐 내지만 어떤 날에는 생각지도 못하게 깔끔하게 줄이 잡히기도 하지만 습도가 높거나 땀이 엉긴 날에는 아무리 이리저리 돌려 보아도 약간씩 비틀려 접혀 안타깝습니다.

군복이라면 삶은 라면줄기를 주름의 안쪽에 펼쳐 넣고 다림풀을 뿌리고 지져버리면 몇달은 주름이 유지되겠지만, 고가의 소중한 하카마에 그런 몹쓸 짓을 할 순 없죠. 풀을 뿌려보기도 하고 스팀을 분사해보기도 했지만 매일 다른 모습으로 접히는 의뭉스러운 하카마가 미울 때도 있습니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계고를 마치고 하카마의 주름을 잡아보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와중에 어린 후배가 제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하카마는 어째서 좌우가 비대칭인가요?’ 그렇지, 좋은 질문이구나. 나도 그 점이 매우 안타깝단다…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선배 체면에 그런 푸념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나중에 당신도 하카마를 입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예요.’라고 오만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제 대답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좀더 다가와 하카마와의 분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후배는 다시금 묻습니다. ‘주름은 왜 있는거예요?’ ‘으흠, 그거야말로 좋은 질문이네.

정면의 5개의 주름과 후면의 하나의 주름은 모두 상징하는 바가 있어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그리고 성誠이죠.’ 요즈음의 초등학교에서는 한자 수업에 적극적이지 않은 바, 허공에 손가락을 올리고 열심히 한자를 써보았지만, 어린 후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 유교의 덕목이요? 공자 말씀인가요?’ 아, 우리나라의 교육이 아직 땅에 떨어지지는 않았구나! 인구도 줄고 출산율도 저조한 나라이지만 그래도 한때는 예의지국으로 불리던 동방의 등불이지 않았던가.

흐뭇해 하던 와중에 덜컥 겁이 난 건 오히려 제쪽이었습니다. ‘이 어린 친구가 인의예지신성에 대해 물어보면 어쩌지? 내가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걸까?’ 떨리는 손으로 하카마의 주름을 정리하고 있자니 어린 후배는 잠깐 제 얼굴을 바라보더니, ‘아, 더워, 물이나 마시러 가야겠다.’면서 멀어졌습니다. 어린이의 호기심은 쉽게 불타오르고 공포스럽게 집착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속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저는 귀가하자마자 서가 구석에 오랜동안 방치되었던 ‘논어’를 펼쳐 인의예지신성의 의미를 찾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공자

잘난 척하느라 한자들을 허공에 써보긴 했지만, 솔직히 저는 각 글자들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페이지를 넘기고 색인을 뒤적여도 인의예지신성의 뜻은 어디에도 간결하고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잠깐, 내가 혹시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던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그리고 성誠이 모두 공자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글자들이 아니었던가? 어째서 공자께서는 자신이 설파한 유교의 주요 개념들을 알기 쉽게 말씀해 놓지 않으셨단 말인가. 사상체계의 기본은 개념의 정의에서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니었나…

어린 시절 공자의 말씀을 한번쯤 접하지 않은 한국인이 있겠습니까. ‘자왈子曰’로 시작하는 문장이라면 누구나 ‘이건 공자 말씀이네’라고 인식할 것입니다. 어린 후배와 마찬가지로 ‘인’이나 ‘예’라는 한자를 보는 순간 공맹사상을 떠올리지 않는 이가 없겠죠. 그렇지만 솔직히 (한문학을 공부하지 않으신 분이라면…) 논어의 구절들은 아름답고 깊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듯 하지만 명확한 의미를 즉각적으로 손에 넣기는 쉽지 않은 듯 합니다. 공자의 말씀이 적혀 있기는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어떤 정황과 맥락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지가 (주해가 제공되는 책도 있기는 하지만…) 불분명한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많은 한자어들도 기원전 550년, 그러니까 2천5백년도 넘는 과거의 중국인들이 사용하던 단어들이기에 오늘날의 한자어와는 뉘앙스가 큰 차이를 보이는 것도 의미가 불명확하고 모호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철학자로서의 공자는 깊은 사색을 통해 얻은 가르침을 동양철학자답게 극명하게 제시하기 보다는 유학의 개념을 다의다층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글자’를 통해 보일듯 말듯 넌지시 던지는 고집스런 태도를 고수하셨기에 후학은 이 말씀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 지 여간 고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안그래도 표의문자인 한자는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데, 철학개념을 이처럼 자세한 설명 없이 모호하게 던지시다니, 참으로 불친절하십니다. 하지만 공자가 당시에 오늘날의 무지한 후학들을 배려하며 개념을 상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으니 자공, 자로, 안회와 같은 그 당시의 제자들이 그만큼 현명하여 그의 말씀을 멋지게 해석할 수 있었기에 오늘날까지도 유학이 계승될 수 있었겠죠. 또한 공자의 가르침은 모두 노래 혹은 시詩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장자

귀족들에게 전유되고 있던 예와 악의 교육을 민간에게 널리 보급하려는 꿈을 꾸었던 공자께서는 모든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확산시켰다고 합니다만, 악보가 없던 당시의 사정으로 가사는 전달되고 있지만 멜로디를 알 수 없어 딱딱한 문장으로 굳어버려 후학은 그저 모호한 의미를 추정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죠.

장자는 에피소드를 곁들인 이야기를 비교적 쉬운 한자들로 전달하기에 이해하기도 편하고 기억하기도 좋고 문장을 따로 떼어 놓아도 쓸모가 있습니다만… 장자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2천5백 년 전의 성인에게 아무리 불만을 토로해 보아도 들어주실 리 만무하니, 어쩔 수 없이 이해하기 힘든 ‘논어’를 다시 서가에 꽂고 보다 접근하기 편한 소설 형식의 ‘공자'(이노우에 야스시, 양억관 역, 학고재, 2013)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작가 이노우에는 ‘언강’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통해 공자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의 에피소드와 말씀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냅니다. 공자와 험난한 길을 걸었던 언강은 공자의 장례를 치르고도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전쟁으로 점철된 난세를 살아간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공자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엉켜 사는 세상에서 예와 악을 성취하려 했던 철학자로서의 공자의 이미지를 쉬운 말로 풀어내기에 이해하기가 수월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1907∼1991)   (출처:동아일보)

‘논어’라는 애매모호한 텍스트가 인간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실마리인 오늘날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존경하는 스승을 회상하는 언강의 회고와 다르지 않습니다. 언강이라는 인물은 자공, 자로, 안회와 같이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인물이 아닌 무지몽매했던 젊은이였던 바 오랜 기억을 애써 더듬어내며 가르침의 의미를 갈구하는 멋진 화자話者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주윤발이 공자로 분한 영화 ‘공자_춘추전국시대’와 같이 공자라는 인물을 직접적으로 상술하는 기법보다 훨씬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노우에의 ‘공자’의 역자 양억관은 책 말미의 ‘옮긴이의 말’에 태사공의 공자 인물평을 실어 인간 공자의 면모를 설명합니다.

_태사공이 말했다. ‘시경’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길은 따라 간다’는 말이 있다. 내 비록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은 항상 그를 동경한다. 나는 공자의 저술을 읽어보고, 그 사람됨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노나라에 가서 그 공자의 묘당, 수레, 의복, 예기를 참관하였고, 여러 유생들이 때때로 그 집에서 예를 익히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경모하는 마음이 우러나 머뭇거리며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역대로 천하에는 군왕에서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생존 당시에는 영화로웠으나 일단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공자는 포의로 평생을 보냈지만 10여 세대를 지나왔어도 여전히 학자들이 그를 추앙한다. 천자, 왕후로부터 나라 안의 육예를 담론하는 모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 공자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으니, 그는 참으로 최고의 성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기세가’, ‘공자세가’, 정범진 외 역, 까치, 1994, 이노우에 야스시, ‘공자’, 양억관 역, 2013, ‘옮긴이의 말’에서 재인용)

출처:네이버 블로그 ‘책이야기’

지덕체를 갖춘 완벽한 인간을 육성하기 위한 전인교육

참고로 육예六藝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서 공자가 고안한 6개 과목의 교육 커리큘럼입니다만, 사射와 어御의 교육이 강조되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한자 그대로라면 활쏘기와 말타기의 프로그램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검술과 체술, 궁술, 창술, 그리고 전차를 모는 기술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무도武道가 관료와 시민이 필수적으로 배워야하는 과목으로 지정되어 있었다는 것이죠. 의례절차를 암기하고 노래를 잘 해야 하며 무도에 능하고 글을 잘쓰고 수학도 잘 해야 하니 그야말로 지덕체를 갖춘 완벽한 인간을 육성하기 위한 전인교육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자는 작가가 아니라 실천가였다는 평가도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술이부작述以不作, 즉 기존의 철학 사상을 취합하여 글을 쓰기는 했지만 새로운 사상을 창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공자의 철학은 당대에서 창시된 체계가 아니라 이전 시대부터 계승되어온 사상의 종합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자의 ‘공학’이 아니라 ‘유학’이라는 명칭이 타당합니다.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이 공자도 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仁을 실천하기 위해 사람들과 부딪치고 엉기면서 가르치는 데 전력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논어의 대부분의 문장들은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공자’의 언강은 공자와 제자들의 미묘한 상호관계를 일화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합니다만, 그 중 제가 좋아하는 대목을 소개할까 합니다.

(공자와 천명(2-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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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