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든 어른과 지혜의 확산(2-2) -조현일 에세이

출처:구글이미지

심리학자 비비언 클레이튼Vivian Clayton과 제임스 버런James Birren은 1980년에 발표한 선구적 논문을 통해 지혜를 인간 개개인의 다양한 기능 영역의 강점이 서로를 강화하며 형성되는 결합체로 정의합니다.
가장 먼저 지식과 이성의 영역, 즉 이해와 학습으로서의 ‘인지’, 그리고 감정과 공감, 즉 자신과 타인에 대한 느낌의 영역인 ‘정서’, 마지막으로 자기 이해와 냉정, 즉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보게 해 주는 덕목들의 영역인 ‘사유’의 결합체이죠. 클레이튼과 버런은 인지, 정서, 사유의 세 영역 패러다임에서 측정 가능한 심리학적 요소들의 집합체로서 지혜를 분석할 수 있다고 상정합니다. 클레이튼과 버런의 ‘지혜’ 개념은 불교에서 설파하는 지혜의 개념과 상당히 닮아있습니다.

출처:엑스포츠뉴스 ‘세계행복보고서’

불교(종교로서보다는 철학으로서의 불교)에서 논하는 지혜는 제스트가 주장하는 시대와 문화와 인종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경제학자이지만 불교철학에도 정통한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는 ‘세계행복보고서2013’에서 불교의 지혜론을 언급합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불교는 오늘날의 ‘지혜’라는 용어 대신 ‘팔정도’라는 도식적인 개념을 언급하지만 의미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①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                   <출처:붓다사랑>

팔정도八正道는 무상無常과 연기緣起에 대한 8가지 ‘올바른’ 대응법을 규정하며, 이는 다시 3가지 차원으로 분류되는데, 다름아닌 인지적 정도正道인 정견과 정사유, 윤리적 정도인 정어, 정업, 정명, 그리고 집중적 정도인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인지적 정도는 항상 변하는 만물과 비영구적이며 상호연결되어 있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체계이며, 윤리적 정도는 거짓말이나 타인을 향한 유해한 업 등 잘못된 행동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회피하기 위한 체계이며, 집중적 정도는 마음이 덧없는 쾌락에 헛되이 집착하지 않도록 훈련하기 위한 훈련 체계입니다.

팔정도八正道  출처:네이버 블로그

플로리다대학의 심리학자 모니카 아르델트Monika Ardelt는 표준심리검사법에서 사용되는 수백 개의 문항을 조사 대상으로 삼아 통상적으로 ‘지혜롭다’고 인식되는 행동을 일관성 있게 식별할 수 있는 문항을 선택함으로써 지혜로움의 객관적인 특성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르델트는 표준심리검사를 12개 문항으로 줄인 축약판 심리검사 설문을 만들고, 이를 불특정 다수의 피험자에게 배포하였습니다.

아르델트의 범주는 ‘사유’, ‘연민’, ‘지식’의 세 카테고리였습니다. 역시나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에서 비교적 객관적인 평판을 따라 지혜롭다고 인지되는 사람들이 아르델트 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지혜를 이루는 세 영역의 상대 강도를 측정함으로써 피험자가 얼마나 지혜로운가, 혹은 서로 지혜 지수를 비교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죠. 과학에서는 어떤 대상이건 어떤 현상이건 상관없이 대상이 계량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이를 실재하는 대상으로 인정합니다. 이 방법론이 근대 이후의 과학이 발전하고 신뢰할 만한 지식체계로 자리잡게 되는 이유였습니다. 따라서 과학은 지혜의 실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혜는 더이상 애매모호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연구하고 정량화할 수 있으며 비교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이죠. 제스트, 클레이튼, 버런 그리고 아르델트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혜를 바라보고 서로 다른 시각에서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지혜의 특징은 다양한 특성들의 통합과 증진입니다. 인지, 정서, 사유, 연민, 지식 등의 다양한 범주의 특성들이 서로 통합하여 시너지를 이룰 때 비로소 지혜로움이 발휘된다는 거죠.

지능이 발달하고 지식이 많지만 공감력이나 연민이 부족한 영리한 전문가는 다른 한편으로는 교활한 사기꾼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공감력은 뛰어나지만 사유가 부족한 사람은 인자하지만 충동적이고 실속이 없어 지혜롭지 못하다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사유는 능란하지만 지식이 부족한 사람 역시 생각은 깊지만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철부지(철 혹은 계절의 변화를 모르는不知 사람)라고 여겨질 수 있죠.

출처:네이버 블로그’트러스트앤매치’

지혜가 범주 내 특성 간의 상호작용을 근간으로 하는 만큼 지혜는 정적이지 않은, 다분히 ‘동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캐나다 워털루 대학의 사회심리학자 이고르 그로스만Igor Grossmann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지혜로운 판단의 편차가 다수의 대중 집단보다도 개인 내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습니다.

오늘은 더없이 지혜롭던 사람이 내일은 기분탓이건 건강탓이건 상황탓이건 어떠한 이유에서 형편없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는 거죠. 이러한 이유로 지혜를 발휘하기 위해선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접촉을 통해 여러 관점을 접하여 경험을 취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외관상으로 혹은 지난 경험상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판단을 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발휘하기 위해선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접촉을 통해 여러 관점을 접하여 경험을 취득해야

그로스만의 또 다른 연구는 지혜로운 사고가 어느 정도 학습을 통한 유도가 가능하다는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많은 커뮤니티가 보다 질 높은 체제인 셈입니다. 그로스만의 실험은 특정 개인에게 특정한 상황에 대해 지혜로운 판단을 요구하고 이 판단을 기술하도록 종용하는 테스트였습니다만, 개개인은 주어진 문제 상황을 일인칭시점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처럼 설명하기보다는 삼인칭 시점에서 타인에게 발생한 일처럼 설명하도록 유도하면 보다 냉정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접근법이 보다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즉 지혜가 교육을 통해 가르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거죠. 이처럼 지혜는 여러 영역의 강점이 균형 잡혀 동시에 발현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특정 영역이 두드러지게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 중에서도 감정적인 균형이 결정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습니다.

지혜는 결코 시종일관 차분하고 고요하며 냉정한 판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혜는 감정을 적절히 절제하여 도발적인 상황에서 자제력을 잃지 않는 균형을 바탕으로 인지, 사유, 지식을 적절히 적용하는 문제해결 시스템입니다.

Rudyard Kipling

시인 키플링Rudyard Kipling이 지적하였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냉정을 잃었을 때 냉정을 유지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다름아니라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에서 감정과 지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위 환경의 패턴을 읽기 위해 사소한 뉘앙스를 소거하여 확실성과 명료성을 억지로라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 평정을 유지하는 의연한 태도가 ‘지혜’입니다.

철학자 제이미 홈스Jamie Holmes는 ‘난센스; 불확실한 미래를 통제하는 법'(문학동네/ 2017)에서 모호함을 해결하려는 충동은 우리 내부에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어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 심리적 압박감으로 인해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증거를 거부하거나 묵살함으로써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확실성과 명료성을 억지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불확실성과 모호성을 솔직히 수용하고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선 감정적인 균형이 필수적입니다. 지혜의 스펙트럼에 있어서 사유의 차원은 기본적으로 현상과 사건을 여러 관점에서 보는 능력이자 자신을 외부의 관점에서 보는 능력이기도 하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기중심주의가 완화되고 타인에게 더 강한 공감과 연민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난센스; 불확실한 미래를 통제하는 법'(문학동네/ 2017)

자기 자신 속에 갇힌 정념과 관점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능력은 지혜의 인지적 측면과 연민적 측면을 통합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특히 아르델트는 사유의 차원이 연민과 지식의 차원에 도달하는 게이트웨이라고 강조합니다. 어찌되었건 지혜는 결과적으로는 행동으로 구현되어야만 합니다. 사유와 연민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탁상공론이자 개인의 지혜로운 내적 고민에 그칠 수 밖에 없죠.

심리학자들은 최근 여러 연구를 통해 지혜가 신체 건강, 정신 건강, 행복, 인생 만족도, 자신감, 정신적 회복력의 증진, 그리고 중독과 충동의 감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고합니다. 또한 지혜는 경제학 용어를 빌자면 ‘긍정적 사회 외부 효과positive social externality’, 즉, 집단 내부에서 지혜로운 소수가 지혜롭게 사유하고 행동하면 그 여파가 나머지 사람들에게까지 미쳐 지혜롭지 않은 다수도 보다 나은 삶을 살게되는 효과를 가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지혜의 하위 특징인 공익 증진과 사익 초월입니다.

지혜로운 판단은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고, 가상/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간에 실제로 발생하는 갈등을 포함한 현실적인 사회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허무한 생각에 그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출하기를 요구합니다.
지혜는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인간관계의 질을 향상시키고 개개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다수의 타인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더우기 지혜는 현실적인 조언의 형태로 확산하여 사회와 체제가 이 조언을 수용하기로 집단 결정할 때 전염적으로 개개인에게 확산됩니다.

이제 갓 50을 넘은 저는 이러한 지혜의 개념에 건강과 신념의 카테고리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반에 언급하였듯이 지혜는 행복한 개인으로부터 발현되며, 개인의 행복은 건강이라는 기반이 필요합니다. 물론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지혜로운 조언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혜가 특성 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증진하는 능력과 태도라면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신체로부터 발현될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속한 가족과 체제와 조직에 대한 신념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수학적 공리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고차원 증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겠죠.

도장(道場)

이러한 신념은 무엇을 위해 건강이 필요한가, 무엇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젊은이들에게는 필요없는 고민을 수반합니다. 젊은 세대가 아직 절실히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을 세대간의 이해 또한 50을 넘은 이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젊은 동년배간의 커뮤니케이션이야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사회적 주도권을 넘겨준 장년은 동년배끼리의 이해조차도 힘겹기 때문이죠. 이러한 다양한 측면의 시뮬레이션과 훈육이 가능한 플랫폼이 도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양한 연배의 인간군상이 학벌과 재력과 같은 사회적 끈을 버리고 한데 모이는 유일한 공간이죠. 한국이라는 고도경쟁사회에서 50은 일선에서 한발 물러서는 슬픈 선택을 강요받는 나이이자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서 혹시 도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막연한 걱정과 신념의 포기를 매일 고민하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도장은 저의 동년배를 위한 유일한 재교육 시스템일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혹은 지혜로운 노인으로서의 지혜로운 판단과 조언의 제공을 강요받는 공간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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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