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착각과 자기기만(2-1)-조현일 에세이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사진출처:Pinterest>

1906년 4월 18일은 유례없이 따뜻한 봄날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중심가를 빽빽히 채운 개암나무에 까치가 둥지를 만드느라 바쁘게 오가고 미션 스트리트 주택가의 쓰레기통 사이를 잔반을 찾아 헤메는 너구리가 바쁘게 앞발을 구르는 소리가 아침잠을 깨우는 평화로운 날의 시작이었습니다.

5시 12분 경 예고도 없이 닥친 리히터 7.9의 강진은 47초간 지속되면서 번영하던 샌프란시스코의 지반을 흔들어 80% 이상의 인프라를 붕괴시키고 주택의 서까래를 무너뜨려 30만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습니다. 단 1분의 지진으로 최소한 3천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당시 가치로 4억 달러 추산의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가치로 따지면 50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재해였죠.

샌프란시스코 교외에 위치하고 있던 스탠퍼드 대학도 지진 피해에서 비껴갈 수 없었습니다. 공과대학 빌딩 420의 박물학과에 고이 소장되어 있던 3천 개 이상의 샘플을 보유하고 있던 표본실도 내진설계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수천 개의 에탄올 표본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어지고 유리단지에 들어있던 표본들은 바닥에 널부러지거나 넘어진 선반과 유리 파편으로 긁히고 잘라져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David Starr Jordan (1851-1931) 인디애나 대학의 총장, 스탠포드 대학의 총장을 역임, 세계 최고의 어류학자

표본과 함께 꼼꼼하게 보관되었던 새롭게 발견된 어종魚種의 이름표도 서로 엉켜 바닥을 딩굴고 있었습니다. 이름표와 표본이 서로 엉켜 라틴어 학명으로 정의되어 ‘생명의 나무’의 한 가지를 차지하고 있던 물고기들은 이제 미지의 존재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가 전체가 지진의 피해를 입었으니 당연히 자신의 표본실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예상한 어류학자(계통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은 헐레벌떡 뛰어와 자신의 영혼의 천국인 표본실의 상황을 비참한 심정으로 목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질서있게 정리되어 있던 어류의 생명의 나무의 계통을 밝히는 표본의 이름표들이 서로 엉켜 뒤섞여 ‘혼돈’을 이루고 있는 연옥. 지난 35년간 세계 전역의 바다와 강을 돌아다니며 표본을 채집한 위대한 결과가 하루아침에, 문자그대로 60초만에 모두 ‘혼돈混沌’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당대 인류에게 알려져 있던 어류 중 5분의 1이 모두 조던이 발견하고 이름붙인 종이었습니다. 그토록 혐오하던 자연의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35년의 세월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죠.

조던 씨는 천천히 무릎꿇고 앉아 깨어진 플라스크에서 떨구어져 바닥을 딩구는 그나마 온전한 표본 하나를 들어올리고 지느러미의 모양와 눈 주위의 비늘 색깔을 돋보기로 들어다 봅니다. 여느 사람같았으면 눈물을 흘렸겠지만… 으흠… 어디보자… 눈 주위의 화려한 색으로 미루어 이 표본은 분명히 아고노말루스 조르다니Agonomalus jordani. 조던은 메모지에 학명을 유성잉크로 쓰고 바늘을 들어 아고노말루스 조르다니의 지느러미에 종이를 꿰맵니다.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거야.

영원히 혼돈에서 벗어나 계통의 질서와 아이덴티티를 유지할 수 있을거라구. 멋진 콧수염을 자랑하는 생물학자/박물학자/어류학자 겸 계통학자, 혹은 유전학자, 혹은 악명높은 우생학자이기도 한 조던은 인생의 대부분을 투자하여 수집한 표본들이 내장을 쏟고 눈알이 튀어나와 수포로 돌아간 절대적 파괴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다시 이름표를 붙여 계통의 질서를 회복하면 되잖아.

절망하기는커녕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사람들을 불러 깨진 표본들에 긴급공수한 에탄올을 들이붓기 시작했습니다. 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이 노과학자에게 전달하려는 신의 메시지, 즉 세상은 혼돈으로 가득차 있으며 외견상 체계가 잡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다시 혼돈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다는 자연의 진리는 더할나위없이 분명했습니다.

혼돈은 ‘만약에 질서가 무너진다면…’ 따위의 가정논법

혼돈 위에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실없는 노력은 모두 무위로 돌아가는 의미없는 시도라는 운명적인 가르침을 조던은 철저히 무시하였습니다. 물리학의 기본의 기본인 원칙, 열역학제2법칙이죠. 엔트로피는 절대로 줄지 않고 증가할 뿐입니다. 혼돈은 ‘만약에 질서가 무너진다면…’ 따위의 가정논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혼돈으로의 회귀는 반드시 일어나며 언제 혼돈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시기의 문제일 뿐입니다.

슬프긴 하지만 상식이며 진리이기에 거부하려는 생각 자체가 그저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던은 실패의 운명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던의 태도에 대해 고찰해보려는 시도가 작가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Why Fish Don’t Exist(정지인 역/ 곰출판/ 2021)’의 주제입니다.

룰루 밀러의 데뷰작인 이 책(소설도 아니고 완전한 논픽션도 아니라서 장르 규정도 분류도 쉽지 않은)은 얼핏 혼돈과 절망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조던이 취한 이해할 수 없는 긍정적인 태도의 근원을 파고듭니다.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며 서가에서 베스트셀러 셀렉션에 꽂혔으니 충분히 영향력있고 성공적인 마케팅의 결과 밀러의 명성을 전세계에 떨치게 한(저명한 피바디 출판상을 수상) 잘 만들어진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책을 읽으려는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되겠습니다만) 스탠퍼드 대학의 총장을 독살하였다는 음모론 혹은 증거가 충분치 않은 혐의 제기는 어떤 독자에게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떤 책이건 사람들이 좋아할 부분이 있겠고 반면 싫어하거나 그저그런 부분도 있을 터, 말도 안되는 궤변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않다면 어떤 텍스트도 나름의 장점이 있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밀러의 책도 독자들을 첫페이지부터 흡입하는 재기발랄한 문체와 생물학자/계통학자 조던의 전기적 내러티브와 자신의 양성애적 성적취향과 커밍아웃의 개인사를 적당히 혼합하여 풀어나가는 재미있는 구성, 혼돈과 질서라는 확실한 주제를 끝까지 밀고나가는 문장의 추진력, 그리고 학자로서의 조던의 훌륭한 업적과 인생 선배로서의 교훈을 다루다가 갑자기 스탠퍼드의 독살의 의혹과 열렬한 우생학의 지지자로서의 만행을 소개함으로써 인물의 평가를 완전히 뒤집는 반전의 배치 등 흥미로운 요소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기에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제목이 시사하듯 물고기fish가 다양한 계통발생적 기원을 가진 복잡한 생물학적 체계라는 지식만으로도 독자에게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충분히 학문적 이득이죠. 다만 영어의 fish에는 animal의 하위종이라는, 우리말에는 없는 폄훼의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기에 우리 독자들은 ‘물고기라는 어감이 뭐가 문제지?’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고, 우생학이 주류학문이 되었던 적이 없었던 우리 학계에서는 미국 학계가 애써 덮으려는 우생학의 어두운 역사의 의미도 공감하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의 진정한 주제와는 조금 벗어나지만 재미있게 읽었던 ‘파괴되지 않는 것’과’자기 기만’이라는 장이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던이 집필한 수많은 학술서적과 철학서적 중에서도 밀러는 ‘절망의 철학’이라는 타이틀의 텍스트를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합니다. ‘절망의 철학’에서 조던은 인생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이들이 과학적 세계관을 조우할 때 필연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허망함을 논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과학, 특히 만물의 근원 원리를 다루는 물리학은 열역학제2법칙을 들어 물질계의 모든 사건과 상태는 운명적으로 무無로 회귀하며 모든 질서는 혼돈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의미도 질서도 없는 태초의 혼돈으로 언젠가는 돌아간다는 허무주의는 삶의 영위에서 의미를 추구하고 결과를 성취하는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다고 힐난합니다. ‘우리가 붙인 불은 숯을 남기고 죽는다. 우리가 지은 성들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사막의 모래만 남긴다. (…)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 생명의 과정을 묘사하려면 기운 빠지게 하는 은유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조던은 굳이 물리학까지 가지 않아도, 자신의 전공인 생물학에서만 보더라도 에너지를 소모한 생물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박테리아에 의해 분자단위로 분해될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던은 이러한 허무주의를 부정하거나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말고 그저 주어진 시간을 게을리 사용하지 말고 충분히 활용하라고 조언합니다. ‘활동적인 야외활동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건강과 함께’ ‘영혼의 고통은 사라진다’고 말입니다. 그는 우리 몸이 일으키는 전기電氣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유사과학적 지식으로서, 전기가 인간의 신체를 통괄하는 에너지의 주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아이키도 수련

‘행복과 만족은 (몸의 전기를 사용하여) 행하고, 돕고, 일하고, 사랑하고, 싸우고, 정복하고, 실제로 실행하고, 스스로 활동하는 데서 온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 밀러는 이러한 조던의 주장을 무념無念으로 해석합니다. 너무 많이 생각하면 시간을 허비하니 생각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할 것. 과정을 만끽하고 소확행을 음미할 것. 복숭아의 ‘감미로운’ 맛, 열대어의 ‘호화로운’ 색깔, ‘전사가 느끼는 준엄한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운동 후 쇄도하는 쾌감 등. (난데없지만, 독자여러분, 아이키도 수련 열심히 합시다!) ‘절망의 철학’의 결말에서 조던은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경구를 인용합니다.

‘당신이 밟고 선 그 땅뙈기가 이 세상에서, 아니 그 어느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가장 달콤한 기쁨을 주는 땅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희망이 없다.’ 조던은 제 또래의 세대에서 유행하던 타투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라틴어 경구로 책을 마감합니다. ‘카르페 디엠.’ 바로 지금을 붙잡을 것. ‘그 어디에도 바로 여기, 지금, 오늘만큼 하늘이 파랗고 풀밭이 푸르고 햇빛이 밝고 그늘이 반갑게 맞이해주는 곳은 없느니.’ 비록 멋진 경구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독자에게 마음의 울림을 전해주고는 있지만(최소한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의 결론은 ‘절망은 선택’이라는 다소 짜증나는 주장입니다.

조던은 절망감이 모든 삶의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단계이지만, 절망감을 떨치지 못하는 패배자를 경멸합니다. 이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기에 ‘지옥불 같은’ 숨결을 내뿜는다며 신랄하게 나무랍니다. 절망감을 가지는 이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는 거죠.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신체적 에너지)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합니다.

‘생명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조던의 현학적인 고상함에 신물을 느끼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 밀러는 사실 조던이 그리도 혐오하는 실존적 탐구에 자신의 문학 커리어를 매진하였으며 이 짧은 글에서 보석을 찾았습니다. ‘생명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아무리 열역학제2법칙에 거스르지 못하여 바스러질 운명이지만 장엄함이 있기에 삶은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밀러의 애초의 의문, 즉 조던이 자신에게 닥친 역경과 좌절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의 문제에 대한 답은 조던 자신의 글에서는 발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거의 자포자기였지만 친우가 보내준 이메일에서 밀러는 의미있는 시각을 발견합니다.

이메일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봅니다. ‘자신의 삶과 에너지를 퍼부어 소중하고 정교한 무언가를 쌓아 올렸다가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걸 목격한 사람은 절망에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의지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누구나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핵심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이를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노르웨이의 숲’과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같은 초기 소설에서 ‘마음의 핵심’을 ‘우물’의 은유로 설파합니다. 누구나 의식 깊은 곳에 가지고 있는 무저갱의 우물.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의 우물로 내려가 눈을 감아 버립니다.

카프카의 ‘파괴되지 않는 것’은 막연한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낙관주의보다는 훨씬 더 심오하고 자기 스스로도 자의식의 일부라고 인식할 수 없는 그 무엇.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파괴되지 않는 것’을 수많은 상징과 희망과 야심과 같은 개념어들로 가려놓았습니다. 일단 상징과 희망과 야심이 표제어로 앞에 등장하면 그 아래의 무엇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강요당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을 감싸고 있는 개념어와 잉여적인 표제어를 과감히 제거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스스로 자신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프카는 자신의 핵심의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나면 이 핵심이 우리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바를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 핵심의 요구에 의해 스스로가 찢어발겨지고 깨어지고 무너져도 어쩔 수 없다는 거죠. 비현실적인 요구가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면 아무리 타인이 미친 짓이라고 모욕하고 비난하고 폄훼해도 개의치 않고 핵심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파괴되지 않는’ 마음의 핵심은 ‘이대로 괜찮은가…’ 따위의 불안함이나 고통에 대한 의심을 무시하도록 종용합니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인간의 의지

‘바보, 낭만주의자, 슬픈 왕을 사랑하는 모방자, 내면의 열정의 연료가 너무도 강력하게 피어올라 현실감각이 안개처럼 아득히 흐려진 사람들…’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조던은 절망 앞에서 자신의 내면의 ‘파괴되지 않는’ 핵심 의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조던이 지진 직후에 쓴 에세이에는 그의 불굴의 태도가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계획을 세우고 창조하기 시작한 이래, 인간이 노력해서 이룬 결과가 이토록 처참하게 파괴된 일은 한번도 없었다. 엄청난 규모의 재앙 앞에서 (…) 푸념하지 않는 인간을 만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평범한 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그토록 희망차고, 그토록 용감하며, 그토록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준 일은 그전엔 결코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인간이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인간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불에 타지 않는다. 이것이 지진과 화재가 준 교훈이다. 인간이 지은 집은 무너지기 쉬운 카드로 지은 집이지만, 그는 집 밖에 서 있고 다시 집을 지을 수 있다. 위대한 도시의 건설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보다 더 경이로운 일은 (인간이) 도시가 되는 것이다. 도시는 인간들로 이루어지며, 인간은 영원히 자신이 창조한 (결과물)보다 높이 올라가야 한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보다 더 위대하다.’     <2-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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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