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체의 피로와 경이를 담는 그릇(2-2)-조현일 에세이

eistungsgesellschaft 최고의 생산성

앞서 면역학적 비유를 통해 피로한 정신의 의미를 정초한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았습니다만, 또다른 철학자들은 21세기의 후기자본주의에서 피로의 근원을 찾습니다. 병원, 정신병동, 감옥, 병영, 공장의 다이어그램을 통해 표현되는 미셸 푸코의 면역학적 ‘규율사회’가 물러간 21세기에 오피스, 은행, 공항, 쇼핑몰의 다이어그램으로 대변되는 후기자본주의의 아이콘이 지배적으로 자리잡은 성과사회eistungsgesellschaft가 들어섰습니다. 푸코가 규율사회에서의 ‘복종적 주체’로 불렀던 개인은 이제 ‘성과주체成果主體leistungssubjekt’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회가 제공하는 충분한 교육을 거치고 충분한 트레이닝을 마친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착취하면서 최고의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생산성을 항상 이루어야만 개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성과사회에서는 부정성은 전체적인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에 성과주체는 언제나 긍정적인 성격을 유지하며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이끌어내기 위해 무리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개인적 능력에 대한 긍정은 당위當爲의 부정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죠. 영화 ‘인셉션’에서 대상의 꿈 속에 침입하여 특정 생각을 심는 범죄자들은 단순하지만 오래 남을 수 있는 강력한 사유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대상의 심층 의식의 깊은 무저갱에 일단 심어두면 개인의 행동과 생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 만한 강력한 아이디어. 다름아닌 긍정 그 자체였습니다. 긍정이 가진 힘은 가히 초월적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초월적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當爲에서 능력能力으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성과사회의 성과주체는 희한하게도 규율사회의 복종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지만 당위를 무시하지 않고 규율에 단련된 상태를 유지하는 자기착취적인 태도를 유지합니다. 오랜 습관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죠. 당위를 지키면서도 능력을 긍정적으로 최대치까지 무리해서 올려야 하는 오늘날의 개인. 이 무리한 상황에서 ‘우울한 피로’가 발생합니다. 사회학자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성과사회에서 성과주체가 겪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합니다.

‘우울증은 귄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주도적이 되도록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 발병이 나타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압력을 이겨낼 수 없는 성과주체는 자신이 ‘자신스러워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피로에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페터 한트케<사진출처: KBS뉴스>

201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터 한트케는 한병철과 보들리야르가 제시하는 신경학적, 자본주의적 피로에서 절망을 찾는 대신 치유와 경이驚異를 발견합니다. 한트케는 성과주체의 피로의 개념에 모든 생존과 공존의 형식을 끌어들이면서 ‘피로’의 근본적인 의미는 소진증후군의 ‘탈진脫盡’이 아닌 영감을 생산하고 정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창조적인 상태라고 재해석합니다.

무위의 피로는 특수한 형식의 태평함이며 감각이 지쳐 마침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특별한 시각을 일깨우는 ‘눈이 밝아지는 피로’로서, 짧고 빠른 과잉주의에서 벗어나는 길고 느린 형식의 맑은 정신으로 회귀하는 상태라고 말입니다. 한트케에게 있어서 깊은 피로는 치유의 형식이며 이로써 세계는 경이감을 되찾습니다. 한트케는 피로의 상태, 즉 지친 정신은 누구를 향해 지쳐있는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것이 아니다. 너를 향해 지쳐있다. (…)

우리는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긴다. (…) 에테르 같은 피로가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고 있다.’ 한트케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탈진은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어 과잉의 순간의 사이에 존재하는 ‘막간의 시간Zwishcenzeit’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목적지향적 행위가 아닌 ‘놀이의 시간’으로서의 피로이며, 길고 느린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탈진한 자는 단호함을 버리고 평화와 태평함을 선택합니다. 폭력과 싸움의 몸짓, 불친절한 행위, 적대감과 위화감을 모두 버리고 탈진한 어깨를 무기력하게 떨어뜨린 ‘나’는 삶의 경이를 피로감으로부터 배웁니다.

인간을 사랑한 신 푸로메테우스<출처:구글검색>

전위적인 문학 작품들로 수많은 작가들에게 특별한 영감을 선사했던 프란츠 카프카는 난해한 단편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재해석을 시도합니다.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그 비밀을 알려준 죄로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의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는 제가 이전 에세이에서 언급한 시지프스를 닮아있습니다. ‘신들은 지쳤고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카프카는 스스로에게 ‘착취’라는 내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성과주체의 심리적 기제를 프로메테우스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신경쇠약과 탈진을 앓고 있는 21세기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성과주체는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쇠사슬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쪼인 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치유되어 다시 복구되죠.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는 독수리는 그에게 극심한 고통을 선사할 수는 있지만 결코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프로메테우스 자신도 자신이 불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과주체에게 자기착취를 강요하는 ‘독수리’와 같은 체제(사회구조적 억압시스템)에 의해 피로와 탈진을 느끼는 오늘날의 자아는 어떠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아이러니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 선택은 육체의 피로를 이용하여 정신적 피로를 억제하거나 쉽게 느끼지 못하도록 감수성을 떨어뜨리는 기획이었습니다.

몸은 절망이 아닌 정신적 치유와 삶의 경이를 담기 위한 그릇

객관화될 수 없는 우리의 ‘몸’은 대부분의 경우 정신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개체라고 인식되고 있지만, 현상학자들은 몸과 정신은 단순한 위계관계를 가진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상관관계 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즉 육체가 정신보다 상위 위계에 올라 서는 경우도 있다는, 19세기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었습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라틴 경구를 굳이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몸의 단련이 정신을 굳건하게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듯합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몸의 피로는 정신의 피로를 경감시키는 효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이를 실행한 바, 어느 정도 가설을 실증할 수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오십줄에 들어선 몸이라 한 시간동안의 계고도 그리 녹록치는 않습니다만, 계고가 종료되어 도우들과 상호간의 예를 하는 순간 한트케가 말한 ‘공동의 피로’가 삶의 경이를 발견하는 문을 열어주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계고를 마치고 귀가하면서도 ‘피곤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만,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 ‘피로’라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항상 육체적으로 피로하여 탈진한 제 몸은 절망이 아닌 정신적 치유와 삶의 경이를 담기 위한 그릇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끝>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