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체의 피로와 경이를 담는 그릇(2-1)-조현일 에세이

<피로 사회>

요즈음 제 주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피곤해…’입니다.

재택근무를 하건 출근근무를 하건 모두들 항상 피곤해 합니다. 일상을 마치고 보금자리로 돌아와 편히 쉬어야 할 시간에도 피곤해 합니다. 서로에게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를 수없이 말해도 부족하지만, 저도 마찬가지이고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도 마찬가지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피곤하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차범근 선수의 아드님이 등장하는 CF에는 ‘이 모든 피로가 간 때문’이라는데, 그럼 간장약을 복용하면 이 끔찍한 피로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걸까요? 도대체 이 피곤/피로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걸까요? 혹시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피로의 상태에 이르도록 몰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피로사회(문학과 지성사, 2012)’에서 오늘날의 사회에 만연한 피로의 원인과 타개 방안을 고찰합니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피로사회’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질환의 역사적 위상을 설명하면서 심리장애가 사회 근저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반적인 패러다임전환의 결과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2022년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피로사회’가 출간된 2012년은 이미 십년이 넘는 과거의 철학자가 이전 이십 년 이상 과거의 사회 양상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논평이니 적시성과 시의성 차원에서 본다면 시대착오적이라고도 치부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들뢰즈의 언어를 빌자면, 모든 사유는 ‘도구화’되어야 비로소 그 소용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특정 텍스트의 시사적 사실과 세부의 나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사유의 구조를 ‘도구화’하여 시대를 초월한 새로운 사유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 철학의 목적과 궁극적인 효용이라고 본다면 한병철의 사유의 틀을 파악하고 도구화하는 기획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출처:금오공과대학교 생활협동조합>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병철의 ‘피로사회’ 논의는 그가 말하는 ‘시대’를 초월한 철학 기획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병철은 21세기 이전의 시대를 ‘박테리아의 시대(면역학적 시대)’로 정의하고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면역학적 설명틀로는 명시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담론들이 등장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어떠한 패러다임이 더이상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없게 되면 패러다임은 반성의 대상이 되며, 이러한 설명불가능한 현상들이 축적되면 기존의 패러다임이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병철은 20세기 말의 상황을 ‘이질성Andersheit’과 ‘타자성Fremdheit’의 소멸로 진단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21세기 이전의 사회상황은 이질성과 타자성이 팽배했던 시대라고 할 수도 있겠죠. 이질성과 타자성은 면역학에서의 근본 범주로서 면역반응의 원인입니다.

한병철은 이질성과 타자성의 면역학적 비유를 통해 20세기의 규율사회의 특질을 정의하면서, 21세기 초의 상황은 ‘이질성’과 ‘타자성’이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차이’의 개념으로 대체/변용되었다고 봅니다. 21세기의 ‘차이’는 격렬한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가시’ 혹은 바이러스의 ‘코로나’가 결여되어 있어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죠. 물론 지난 2년간 바이러스의 창궐로 변해버린 오늘날의 삶을 돌아본다면 지금이 미래의 역사가들에게는 ‘바이러스의 시대’라고 불릴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찌되었건, 코로나 이전의 21세기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치명적인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비교적 소프트한 철학적 폭력으로서의 ‘차이’를 수용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20세기를 주름잡았던 이질성과 타자성은 사라지고 ‘차이’를 폭넓게 수용하는 포스트모던의 21세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질성과 타자성을 대신할 21세기의 키워드는 ‘다양’과 ‘포용’입니다. 하지만 다양과 포용이 주도적 특질이 되자 ‘과잉긍정過剩肯定’이 일으키는 병리적 상태가 등장하는 현실이 반전이죠.

포용

한병철은 이질성과 타자성을 극복할 면역학의 발전과 항생제의 발명으로 20세기는 종언을 맞았지만 이후의 시대는 병리학적인 언어로 비유하자면 이질성과 타자성의 박테리아(바이러스)가 아닌 신경증의 시대로 돌입하였다고 분석합니다.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가 모두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는 키워드입니다. 이러한 질병의 특성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梗塞性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에서 기인한다는 점입니다.

타자의 배척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의 패러다임은 더이상 21세기의 시대상황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기수라고도 할 수 있는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 상태’를 지적합니다. (보들리야르는 ‘가상현실’과 ‘하이퍼리얼리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철학자로도 유명하죠.)

그는 오늘날의 사회 인프라를 지탱하는 정보 시스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생산 시스템 모두 과도 비만 상태라고 비판하며, 비만을 일으키는 지방fat은 어떤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과잉은 인류 전체의 저항력을 무너뜨리는 인자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과잉생산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는 않기에 ‘면역저항’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거죠. 대신 ‘소화불량’과 ‘거부반응’이 나타납니다. ‘과다’에 따른 거부반응으로서 소진증후군과 피로가 수반됩니다. 이에 따라 나타나는 생리학적 반응으로서의 질식…

내재성의 테러’의 결과는 비참한 희생이 아니라 다름아닌 ‘피로’입니다

이는 모두 우리의 신경 시스템에 가해지는 폭력으로서 ‘끝없는 증식과 비대화와 변이’를 거치며 천천히 확산하여 종국에는 우리의 정신을 은밀히 잠식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과잉긍정은 이전의 시대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생산합니다. 보들리야르는 이러한 신종 폭력을 면역학적 타자가 아닌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폭력으로서 면역저항을 우회하여 심리적 경색을 유발하는 ‘내재성의 테러’라고 규정합니다.

‘내재성의 테러’의 결과는 비참한 희생이 아니라 다름아닌 ‘피로’입니다. 아, 이럴 수가… 언제나 피로한 오늘날의 우리는 모든 일을 지나치게 긍정하는 우리 마음 속의 내재성의 테러의 피해자였던 것입니다.

<2-2에서 계속>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