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의 아버지 -조현일 칼럼

헤르만의 아버지

한없이 파랗고 눈이 아프도록 눈부신 1998년 여름의 토요일 아침에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나는 부엌에 서서 파스타를 삶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파스타는 알 덴테로 삶아지기 직전이었고 나는 라디오에서 울려퍼지는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변주곡의 아리아에 맞추어 휘파람을 불고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굴드는 타건 속도가 빨라 휘파람 불기가 쉽지가 않습니다만 나에겐 굴드의 골드베르크가 알 덴테 스파게티를 삶기에는 최적의 음악입니다. 한시라도 집중을 흐트러뜨리면 면수가 끓어 넘쳐 버릴 텐데 굴드의 빠른 손가락이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캐나다가 자랑하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선율은 역시 밴쿠버의 CBS 라디오에서 들어야 제맛이지…라고 생각하며 제 오만함에 스스로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다시 알 덴테를 상기하며 너무 푹 삶아지지 않도록 타이머 숫자의 카운트다운에 눈을 돌렸습니다. 굴드와 파스타라니 이 얼마나 하루키적인 토요일 아침인가…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그대로 못들은 척하고 파스타를 계속 삶으려고 생각했습니다.

면이 거의 삶아졌고 굴드의 아리아는 바흐의 음율적 조화를 극치로 끌어 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화벨 소리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을 조바심나게 하는 마력이 있어서 결국 나는 가스 불을 낮추고 젓가락을 오른손에 낀 채 거실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최근에 제출한 논문을 읽고 계시던 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시간 있어?’라고 헤르만이 인사도 생략한 채 말을 건냈습니다. 나는 귀찮은 일에 얽히기 싫어서 전화상의 목소리를 제대로 못들은 척 하였습니다. 중국계 캐나다 3세인 헤르만의 목소리 저음톤은 광대가 튀어나오고 피부가 검은 남방계의 전형적인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진중하게 깔리는 위압감이 있습니다. ‘미안한데, 지금 마침 파스타를 삶고 있는 중이거든.이제 슬슬 삶아지고 있는 중이어서 말이야. 지금 끊지 않으면 실컷 삶은 파스타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고.’

‘파스타…’ 헤르만이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습니다. ‘근데 지금 10시 반인데 지금 파스타를 삶아? 이상한데?’
‘이상하건 이상하지 않건 너랑은 관계없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아침을 안먹어서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다구. 내가 구입한 파스타를 내가 삶아 먹는데 이상할 리 없잖아. 몇 시에 스파게티를 먹건 그건 내 맘이지.’
‘아, 알았어, 그럼 끊을게.’ 하고 밋밋한 목소리로 수화기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소리의 톤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어, 근데 뭐 땜에 전화했…’ 전화가 끊겼습니다. 전화기를 놓은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수화기를 놓는 조그마한 버튼을 눌러 버린 것이었습니다. 난 망연자실하여 수화기를 잠깐 바라보다가 파스타가 생각나 수화기를 놓고 부엌으로 갔습니다. 면은 알 덴테는 커녕 벤 코토라고도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흐느적 대고 있었습니다.

‘어, 헤르만, 아까 왜 전화했었지?’

면수는 넘쳐 가스 레인지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프라이팬 위의 마늘은 시커멓고 타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가스를 잠그고 파스타 면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천천히 떨구었습니다. 거실로 돌아가 전화기를 들어 침착하게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그래, 품위를 지키자.
‘어, 헤르만, 아까 왜 전화했었지?’ 내가 물었습니다.
‘파스타는 다 먹었어? 그럼 1시까지 캐니디언 타이어.’ 또 인사도 안하고 끊어버렸습니다. 다 먹었을 리가 없잖아. 그래, 품위를 지키자.

‘캐니디언 타이어’는 밴쿠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목재 판매상입니다. 타이어도 팔기는 하지만 주로 건축 자재를 판매하기에 건축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면, 미술학도가 화방 드나들듯, 자주 방문하는 익숙한 장소입니다. 주섬주섬 옷을 껴입고 다운타운의 캐니디언 타이어로 갈 택시를 불렀습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니 이미 헤르만은 2×4와 4×6를 수십 장 구입하고 있었습니다. ‘뭐하게?’ ‘선데크를 만들거야.’ 그래, 여름이니까. 재밌겠네. 하지만 봄에 만들어 여름에 즐겨야지, 한여름에 선데크를 만드는건 중노동인데… 하지만 영어가 서투른 유학생이 전공시험 볼 때마다 족보도 챙겨주고 논문 제출 전에 미리 읽어주기도 하는 무뚝뚝하지만 친절한 헤르만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작업은 2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아마도 불현듯 선데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지 연필로 낙서하듯이 급조한 설계도를 내밀며 톱으로 2×4 나무판을 일정한 길이로 잘라달라고 하길래 약간의 몽니를 부리고 싶어졌습니다. 원래 그룹의 선임 디자이너의 제안에 토를 다는 건 금기지만 흔치 않은 맑은 하늘의 토요일이니 파스타 먹으며 한가롭게 지내려 했던 나를 노동시키는 헤르만에게 약간의 불평이야 허용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난 이 디자인이 맘에 안드는데… 태양의 각도를 충분히 계산하지 않았어.’ 하지만 헤르만은 내 불평은 들은 척도 안하고 4×6를 톱으로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내로 다 만들어야 해. 급하다구.’ 헤르만이 또다시 특유의 무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이제 여름이 시작인데 뭐가 급하다는건지.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어 목재를 톱질하고 단면을 사포질하여 매끈하게 다듬고 접착제로 고정하고 못을 박아 넣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약간씩 비틀리고 직각이 정확히 맞지 않기도 합니다. 설계도가 아무리 정밀하게 작성되었다 하더라도 오차가 발생하는데 스케치에 가까운 제안서이니 당연히 수치와 모양이 어긋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뜨거운 햇살에 피부가 따끔따끔하고 흘러내리는 땀에 셔츠가 축축해지면서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헤르만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몸짓으로 톱질과 못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헤르만의 어머니께서 눈을 뜨기도 힘들게 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얼음을 띄운 레모네이드를 내 오셨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 작업을 격려하셨지만 내가 당시에 떠올릴 수 있었던 생각은 ‘이렇게 고생하는데 겨우 레모네이드인가…’였습니다.

어스름한 땅거미가 깔리자 한여름의 더위도 조금 가라앉을 즈음 데크의 마감작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건축디자인을 배우고 있기는 했지만 캐드 도면을 마우스로 그릴 뿐 실제 작업은 모형작업이 고작이었던 나에게는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노동이 힘에 부쳤습니다. 이마를 훔치고 땀에 쩔어버린 셔츠를 나뭇가지에 걸어 말리고 있는 와중에 헤르만이 아무 말도 없이 잠깐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후 헤르만은 수척한 노인의 휠체어를 천천히 밀며 나왔습니다. 2년 넘게 교류해온 친구였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해 놀라기 보다는 당황스러웠습니다. ‘루게릭이야.’ 헤르만이 중국어로 나를 소개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 어르신께 드릴 광동어 인사말을 몰라 어리숙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뜻한 햇살이 헤르만의 아버지 얼굴에 떨어지고 표정이 약간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헤르만이 대신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고맙다고 하시는 거 같아.’ 이제야 뒷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백장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백장미는 모두 어르신이 심으신 꽃밭이었지만 루게릭이 발병한 이후 휠체어에 앉아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뒷마당에는 나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데크가 있으니 휠체어를 타고서도 뒷뜰에 나와 그렇게 좋아하시던 장미를 마음껏 만끽하실 수 있게 되었죠. 아버지의 행복한 얼굴에 헤르만도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난 미안한 마음에 얼굴을 숙이고 말았습니다.

‘고마워. 내게 기회를 줘서.’

2002년 4월 청명淸明에 맞추어 헤르만은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인천국제공항에 왔습니다. 아마도 제게 어르신의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사진 속의 어르신은 루게릭으로 표정은 조금 일그러져 있지만 한없이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한참 어르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앞이 흐려져 더이상 초점이 맞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숙이자 렌즈에 물이 고이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안경을 벗어들고 닦는 척 하면서 겨우 고개를 들어 헤르만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미 붉어진 헤르만의 두 눈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힘들게 입을 뗄 수 있었습니다. ‘고마워. 내게 기회를 줘서.’ 헤르만도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해주었습니다. ‘나도.’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날아오르고 보이지 않겠지만 열심히 손을 흔들어 배웅해 주었습니다. 며칠 뒤 헤르만은 이메일로 어르신의 제사를 잘 치루고 원하시던 대로 홍콩 북부 심천의 고향에 묻히셨다는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무언가 커다란 매듭이 잘 묶여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997년에 시작한 건축공부는 천신만고 끝에 2001년에 석사학위 취득으로 마감이 되었지만 나는 건축보다는 철학과 물리학에 더 끌리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담당 교수님들과 부모님께서는 오랜 공부가 아깝다며 건축가가 되기를 권유하셨지만 어쩐지 내가 건축에서 하고 싶었던, 그리고 해야 할 일은 충분히 완결되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감정의 배경에는 헤르만과의 하루가 결정적인 의미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날 파스타를 삶으며 헤르만의 전화를 무시해 버렸다면… 한여름에 이따위 데크를 만드는 데 땀흘리고 싶지 않다고 헤르만의 집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면… 그랬다면 제 선택은 저를 전혀 다른 삶으로 끌고 갔을 것이며 그 날의 의미도 상실할 수 밖에 없었겠죠.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던 결과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느낌일 뿐 실제로는 선택의 인과因果와 행방은 우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보람과 의미는 오랜 준비 끝에 수많은 작은 임팩트의 집합으로 산재散在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한 순간에 압축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일본어에서는 행위를 통한 삶의 의미의 추구를 ‘이키가이生き甲斐’라고 칭하며, 영어에서는 같은 개념을 ‘모멘트’라고도 부르죠. 물리학에서는 ‘결정적 순간瞬間’ 혹은 ‘모멘트moment’를 벡터의 크기와 정점定點에서 출발하는 수선垂線의 길이곱으로 나타낸 물리량, 즉 능률로 설명합니다만, 철학에서는 사건의 기회와 계기契機, 그리고 정동情動을 불러일으키는 발화發話의 동기動機라고도 표현합니다.

반복적인 일상의 흐름 속에 결정적인 찰나刹那가 은닉되어 있다면

매일매일의 수련이 일상적인 반복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적인 일상의 흐름 속에 결정적인 찰나刹那가 은닉되어 있다면 흐르는 순간순간의 선택의 기회를 무심코 흘려 보낼 수 있을까요? 저에게는 헤르만이 전화한 토요일 아침의 그 순간이 삶의 결정적 모멘트였습니다. 그 날과 그 이후의 ‘나’라는 개념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모멘트이기도 하죠.

한정된 삶의 시간에서 결정적인 모멘트와 조우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언제든 결정적 모멘트를 만나면 놓치지 않고 부여잡을 수 있는 혜안慧眼과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감정적인 절박함도 필요할 것입니다.

예를 갖추고 계고를 행하는 일상에서 누군가와 손끝이 닿는 찰나가 당신의 삶의 결정적 ‘모멘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키가이’는 길고 지난한 노력의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소소한 일상 속에 잠복해 있는 보물과 같은 존재로 당신 앞에 불현듯 나타날 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모멘트를 갈무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걸어도 좋을 듯 합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