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합기도의 실전성과 윤리성

합기도(合氣道, Aikido)를 지엽적인 무술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어쩌면 무도에 관심이 없는 사람과도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다. 나는 이미 태권도부터 시작해서 가라데, 무에타이까지 그 정점을 경험하였기에 합기도가 어떤 운동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일반인에게 승부를 가린다는 무술에서 평화를 추구한다는 말만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유투브를 보면 격투기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합기도 즉 아이키도는 아무짝에도 쓸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적도 있다. UFC 같은 시합이 지상 목표이거나 즐거움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 세계적으로 합기도의 가치는 평가절하되지 않았고 여전히 수 많은 수련 인구를 유지하며 발전하는 것은 합기도가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라 생각한다. 합기도는 운동 그 자체가 타 무술에서는 볼 수 없는 윤리성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은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아래 도표는 93년에 번역한 『정통합기도』에 나온 것이다.


앞서 여러차례 언급하였듯이, 합기도는 현대무도이지만 검술을 바탕으로한 전통적인 수련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해해야 한다. 현대의 격투기 시합에서 느끼는 긴장은 전장에서 병기를 들고 임했을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공포와는 비견할 수 없다. 이종격투기 시합과 같은 경기들은 일정 정도 안전을 담보로 하는 룰을 기본으로 한 스포츠다. UFC와 같은 경기는 승부욕이 넘치고  혈기왕성한 사람들이 스릴을 경험하기에는 아주 좋은 여건이다.

위 그림은 4가지 종류의 상황으로 인간의 윤리적 수준을 설명하고 있다.

첫번째

첫번째 그림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왼쪽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공격이나  도전이 없는 상황에서 선제공격으로 죽인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두번째 그림은 왼쪽 사람이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를 공격하도록 유도하듯 도전했다. 가령 모욕적인 말이나 경멸하는 행동을 보이거나 그 외의 교묘한 도전일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다른 사람이 공격하도록 유인되고 나서 죽인다.

첫번째처럼 먼저 선제공격하는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공격을 부추긴 책임이 있다. 결과적으로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에는 윤리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세번째

세번째 그림은 왼쪽 사람이 다른 사람을 먼저 공격하지도 않았고 도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상대의 공격을 받았을때 그는 자신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단지 ‘자기이익’ 만을 꾀하며 상대가 죽거나 최소한 심하게 다치게 만들었다. 정당 방위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피해로 부터 자신을 보호한 반면에 다른 사람의 파멸을 초래했다.

위 그림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세번째 모두에서의 결과는 한가지다.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이제 마지막 그림은 합기도가 추구하는 궁극의 윤리적 자기 방어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네번째

공격하지도 않았고, 공격을 유발하지도 았았으며 자신을 방어하면서도 공격자가 죽지 않도록 기술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이 경우 공격자는 심각한 상해를 입지도 않는다.

마지막에서 보여주는 바로 이와같은 최고의 수준이 모든 합기도 기법의 목표가 된다. 이것은 합기도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에 의해 고안된 기술적 방어수단의 훈련 결과이다. 진정한 합기도인이라면 누구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기를 진정으로 기원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타무술과 비교되는 윤리적 의지에서 나오는 합기도인의 행동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태권도를 시작으로 격투기와 무에타이를 거치면서 강한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아무런 의심없이 오랫동안 해왔다. 그때는 젊은 혈기가 있었기에 무엇이 진정으로 강한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키도를 만났다. 이후 나이를 더할 수록 나는 더욱 부드러워지고 강해지고 즐긴다. 이전에 단순히 강함에만 매몰되었던 선후배들은 대부분 이미 무술계를 떠났다.

모든 무술이 그렇겠지만 합기도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나 또한 더욱 알려고 노력하고 누구보다 좋아하고 평생을 즐길 것이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만 못하다.
(『논어(論語)』, 「옹야(雍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