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모비치의 용서와 유혹(2-2)-조현일 에세이

사진 출처: 지브리 공식 트위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근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주인공 마히토는 공습의 화재로 어머니를 잃자마자 처제를 임신시키고 전쟁의 앞잡이가 되어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혐오하면서도 화를 낼 수도, 아버지를 버리고 떠날 수도 없는, 선택이 주어지지 않는 자신의 상황을 견디지 못해 돌멩이로 자신의 옆머리를 찧어 피를 흘립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 식솔들이 모두들 마히토의 병상을 지키며 걱정하지만 자신은 괜찮다면서 애써 공허한 미소를 짓습니다.

마히토는 스스로도 자해를 일으킨 자신의 악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자기파괴적인 행위를 멈출 수 없습니다. 전쟁의 불덩어리 속에서 악의가 이미 삶의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진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소년은 타인을 향한 공격성을 자해를 통해 해소하려 하는 거죠.
자해 행위가 불건전하다는 사실은 마히토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유일한 선택지는 지금 자신이 처한 이 세계가 다른 또다른 삶의 규칙이 지배하는 ‘다른 세계’, 화재로 잿더미가 된 육신을 버리고 순수한 영혼의 형태로 남아있을 어머니가 계신 피안, 즉 이세계異世界였습니다.

이세계에 빨려들어가 다양한 사람들(현실세계의 사람들의 도플갱어들)을 만나며 모험을 이어나가던 마히토는 세계의 설계자로부터 자신의 숙명을 계승하기를 제안받습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참기 힘든 부조리를 경험하기보다 이세계에 남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관념을 구체화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히토는 누구라도 혹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합니다. 자해를 통해 스스로의 악의의 존재를 알아버린 소년은 차마 세계의 설계자라는 고귀한 직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악의에 대한 죄악감의 존재를 배운 마히토는 스스로 원래의 세계, 혼돈과 폭력과 슬픔으로 가득찬 세계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미야자키가 던지는 진중한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마히토의 선택은 용서와 수용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버리고 (마히토가 생각하기에) 슬픔을 충분히 느끼지 않은 채 처제와 재혼한 불충한 아버지를 용서하고 어린 소년이 견디기 힘들도록 험악한 현실세계의 부조리를 수용하기로 말입니다.
부조리를 목도하고도 고귀한 척하거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기파괴적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인간이 될 것인가.
팔십이 넘은 에니메이션 작가의 무거운 질문에 대하여 우리 모두는 전쟁상황이 아니더라도 존재론적인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IMDb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삼아 개념을 구현하는 아브라모비치에게 스스로의 신체는 공포를 투영하는 거울이자 스스로의 두려움과 악의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언어와 관념을 육화하는 ‘신체의 즉각성과 직접성’의 개념은 무도의 개념화에도 유용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아이키도의 카마에는 여타 무도의 방식과는 달리 선제공격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계고에서 언제나 강조하시듯이 검술의 세메와 달리 아이키도의 카마에는 상대의 선제공격을 유도하는 몸짓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라테나 검도에서의 카마에가 선제공격의 기회를 노리고 상대의 공격을 억제하는 몸짓인 바에 비교하면 아이키도의 카마에는 특이함을 넘어 반직관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몸짓이 용서와 유혹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맹목적인 폭력성과 공격성의 악의를 능동적으로 용서하고, 침착하게 억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본능적으로 품을 수 밖에 없을 나 자신의 공격성의 악의를 스스로 용서해야만 합니다.

22년 만에 자신을 배신한 울라이를 퍼포먼스에서 만난 아브라모비치는 그의 배덕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퍼포먼스에 등장한 울라이는 용서를 구하기 위해 그녀 앞에 나섰던 걸까요? 그녀의 눈물로 용서가 이루어졌다고 예단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울라이가 림프암으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도 용서할 수 없었다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어쩌면 용서는 대상이 상실될 때까지 이루어질 수 없는 행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키도의 카마에는 자신감과 교만함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손을 뻗어 우케의 공격성을 수용할 전략적인 유혹의 몸짓입니다. 아브라모비치가 자신의 몸을 대중에게 의도적으로 노출시켜 대중의 공격성을 유도하듯 나게는 스스로의 악의를 은닉하고 우케의 악의를 유도하여 중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정신/육체적 구조를 표현하여야 합니다. 언어적 도발이 아니라,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가 여기 있다’와 마찬가지로 침묵의 응시가 필요합니다.

종이 한 장 차이기는 합니다만, 손을 내미는 몸짓이 도발이 될지 유혹이 될지는 우케의 반응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그녀의 예술적 전략과 마찬가지로 아이키도의 나게는 자신의 신체를 도구삼아 악의의 중화를 전략적으로 개념화합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나게는 엄밀한 도덕적 잣대를 기울여 자신의 전략적 유혹에 죄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상대의 악의를 포용하는 태풍의 눈이 되기를 자처하는 이면에 유혹의 손길로 상대의 악의를 유도하여 종국에는 제압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식은 우케의 원활한 수신을 돕는 행위라는 ‘배려’로 표현될 것입니다만, 결과가 어떻게되든 무도가의 원죄는 여전히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죄의식이 무도의 숙명이라면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선택지가 아닐까요.

<아브라모비치의 용서와 유혹(2-1)- 다시보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