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합기도의 역사-다케다 소카쿠를 만나다.

5. 대동류 유술 입문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홋카이도에서 요시다 고타로라는 인물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은 육군 소위 출신으로 홋카이도 기타미에서 신문사와 시립도서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다케다 소카쿠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1915년 다케다 소카쿠 선생은 문베츠군 엔가루에 있는 히사타 여관에서 강습회를 열고 있었는데 제자였던 요시다 고타로는 수강자를 모집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때마침 엔가루에 물건을 사러 나온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을 만나 강습회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다케다 소가쿠

잠시 배경 설명을 덧붙이자면 당시에 다케다 소카쿠의 후원자 역할을 한 사람은 제자이기도 했던 호리카와 다이소였습니다. 대동류 합기유술 고도회를 설립한 호리카와 고도 선생의 아버지인데요,  호리카와 다이소는 원래 모리오카 출신인데 홋카이도에서 사금채취로 돈을 벌어 금은방을 하다가 여관업으로 사업을 확장한 지역 유지였습니다. 호리카와 다이소가 어느날 기차 안에서 다케다 소카쿠 선생을 만났는데 다케다 선생이 합기는 이런 것이라며 기술을 몇 가지 보여주었습니다.

호리카와 다이소는 주소를 알려주면서 언제 한 번 찾아오라고 말했는데 다케다 소카쿠 선생이 진짜로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을 모아 강습회를 열게 됐는데 이때 이웃이었던 사가와 네노키치도 강습회에 참가하여 대동류의 문인이 됩니다만 이분이 후일 대동류 합기무술 종범이 되는 사가와 유키요시 선생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다케다 선생의 기술에 감복한 사가와 네노키치는 집에 다다미 18장짜리 도장을 지어서 다케다 선생을 불러 들입니다.

다케다 선생은 여기에서 2년간 머물면서 대동류를 가르쳤습니다. 사가와 네노키치는 당시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그 전부터 물건을 사러 사가와 네노키치의 잡화점에 자주 들렀기에 서로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이때도 엔가루에 물건을 사러 나왔다가 요시다 고타로를 만나서 다케다 선생의 강습회에 간 것이지요.

강습회에서 다케다 소카쿠 선생의 대동류에 크게 감동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후 다케다 선생을 모시고 대동류 수련에 몰두하게 됩니다. 기존 합기도 관계 서적에서는 대동류를 배울 때 기술 하나에 300엔에서 500엔을 지불했다고 합니다만 당시에 300엔이면 엄청나게 큰 돈입니다. 실제로는 당시 대동류의 수업료는 한 사람당 10일 수업에 10엔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현존하는 다케다 소카쿠 선생의 영명록에도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약 10일간 강습을 받고 10엔을 지불한 것이 본인의 서명날인과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300엔이라는 수업료는 이야기가 부풀려진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렇긴 해도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다케다 소카쿠 선생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했으며 식사부터 목욕까지 모든 일을 정성껏 모셨습니다. 집까지 새로 지어서 드렸다고 하지요.

이렇게 열심히 무도수련에 힘쓰는 한편 홋카이도 개척에도 열심이었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드디어 아버지를 설득하여 아버지 포함 온가족이 모두 홋카이도로 옮겨서 개척의 길을 나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단 사는 곳을 옮기긴 했지만 오랫동안 마을의 유지였기에 살던 마을과 관계를 끊기가 어려웠고 마을 사람들의 요청도 있어서 1917년에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옮깁니다. 그러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1918년 6월에 가미유베츠 마을의 초대 마을회 의원이 되어 1919년 4월까지 지방행정에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 1916년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대동류 비전목록을 받고 다음해는 다케다 소카쿠 옹의 조수가 되어 오타루 방면 순회지도에 동행합니다.

6. 대본교의 데구치 오니사부로와 만남

그러다가 1919년 늦가을 다나베로 돌아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습니다. 이리하여 모리헤이는 집과 전답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스승인 다케다 소카쿠에게 맡기고 급거 귀향길에 오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차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대본교에 관한 소문을 듣습니다. “세상을 다시 세우고 병도 고치는 대단한 할머니가 교토 아야베에 있다더라”라는 소문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혹시 아버지의 병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일단 아야베로 먼저 가기로 하는데, 이것이 이후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데구치 오니사부로와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데구치 오니사부로와 함께하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당시 대본교는 1918년에 교주인 나오가 승천했지만 모든 면에서 괴물이라 불리며 종교계의 주목을 받던 성사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건재하여 그에게 가르침과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 많이 모여 대성황이었습니다. 모리헤이는 대본교의 본거지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치유 기도를 부탁하고 데구치 오니사부로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다가 완전히 빠져들게 됩니다. “무술 수련만 하면 안 되겠다. 마음수련도 하지 않으면 진정한 무술은 알 수 없다. 이제부터 여기에서 수련을 쌓아야겠다.”고 마음에 정하고 아버지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갑니다.

고향에 돌아가 보니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설장식도 아직 걷지 않은 1월 2일의 일이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도 아버지의 죽음에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데구치 오니사부로의 말을 떠올리며 대본교는 기존 종교와 크게 다르다고 여겼습니다.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의 영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대본교에서 들은 사후세계에 대해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온가족이 맹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야베의 대본교 본부 근처에 있는 산기슭으로 이사를 갑니다. 이렇게 무도단련에 더하여 데구치 오니사부로의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살인기술, 살인도구인 무술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인가?

그토록 좋아하던 육식을 완전히 끊고 아침저녁으로 본부 신전에서 예배를 올리며 내부 건설작업을 도왔습니다. 틈틈이 언령학, 영학, 고서 등도 연구하느라 쉴 틈이 없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이러한 단련과 탐구는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을 풀기 위해서 였습니다. “무도란 정신이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살인기술, 살인도구인 무술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오랫동안의 숙제였습니다.

아야베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매일 칼과 창을 휘두르며 단련하는 한편 자기집 일부를 다다미 18장짜리 도장으로 개조하여 ‘우에시바숙(숙은 사설학교, 학원이라는 뜻입니다)’이라고 이름 짓고 여기에서 주로 대본교 관계자에게 대동류를 지도했습니다. 한편 일가가 아야베로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8월과 9월에 장남과 차남을 연속으로 잃는 슬픔을 겪습니다. 다음해에 제2대 도주가 되는 깃쇼마루가 태어나기도 합니다만 그 다음해에는 어머니도 세상을 뜨게 됩니다. 또한 우에시바 깃쇼마루가 태어난 1921년에 제1차 대본교 탄압 사건이 일어나는데요, 당시 천황중심의 국가 신도로 사상을 통제하여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던 정부에게 신도계 신흥종교의 확산은 위협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결국 데구치 오니사부로를 포함한 대본교의 중심인물 3명은 불경죄와 신문지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고, 대본교의 신전도 해체가 됩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울분을 삼키며 해체된 신전과 가옥 등의 뒷정리를 하고 있을 즈음인 1922년에 홋카이도에 있던 다케다 소카쿠가 아야베에 불쑥 나타나서 눌러앉습니다. 이때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다케다 소카쿠에게 우에시바숙에서 대동류를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는데요, 다케다 선생의 조수 역할을 하면서 대동류의 비전오의를 배워 같은 해 9월에 교수대리를 허락받습니다.

우에시바숙 시절의 우에시바 모리헤이(당시 38세쯤) – 벽에 대동류 합기유술이라는 글자가 걸려 있다
다케다 소카쿠로 부터 교수대리 수여 기록

7. 데구치 오니사부로와 만주 몽고로 가다

이때 모리헤이 옹이 심취했던 데구치 오니사부로는 대본교의 교의인 “세상 재건”에 기반한 대구상을 짜고 있었습니다. 대본교에서 말하는 “세상 재건”이란 교주인 데구치 나오가 1892년 정월에 발표한 “초발의 신유(初発の神諭-신의 첫 가르침)”이라는 문장에 기초합니다. 이것은 “초발의 필선(初発のお筆先-신의 첫 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교주가 신에게서 받은 계시를 정리한 것이라고 하며 대본교에서는 이 문장이 발표된 1892년을 대본교가 시작된 해로 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래 서구 따라하기 정책에 대한 심정적 거부반응이며 철저한 국수적 발상과 타문화에 대한 거부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현세를 철저히 개혁할 것을 주장하며 그에 따라 유형무형의 장벽을 제거한 “미로쿠의 세상(みろくの世)”을 만드는 것이 근본교의입니다. “미로쿠의 세상”은 “미륵 세상”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대본교에서는 한자 미륵(弥勒)이 아니라 가나문자 미로쿠(みろく)로 표기합니다. 이것은 대본교에서 보는 이상적인 지상천국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럼 데구치 오니사부로의 대구상이란 어떤 것인가. 앞에서 말한 “미로쿠의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의 보천교, 중국의 세계홍만회도원 등 종교단체와 연대하고 인도와 티베트까지 포함한 동아시아 동맹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만주와 몽고에 대제국을 건설하고 나아가 예루살렘까지 간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우에시바 모리헤이도 보석출옥중이던 데구치 오니사부로의 경호 역할로 대륙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1924년 데구치 오니사부로를 따라가 만몽 땅에서 축문을 올리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때는 1924년 2월 13일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포함한 데구치 오니사부로 일행은 만주로 떠납니다. 2월 15일 일행은 먼저 다롄(大連)을 거쳐 펑톈(奉天)-현재의 선양(瀋陽)-에 도착하고, 장쭤린(장작림)의 손님으로 있던 루잔쿠이(노점괴) 장군과 회견하고 손을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장쭤린의 승락을 얻어 루잔쿠이가 이끄는 서북자치군에 참가하여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서북자치군에는 만주의 마적 두목과 몽골의 왕족, 라마승 등이 계속 참가하여 부대의 이름도 내외몽고구원군이라고 바꾸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여기에서도 자기단련에 힘쓰는 한편 동지들에게 무술을 지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외몽고 구원군은 울란바토르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그 눈부신 활약에 의해 몽고평정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모리헤이 옹은 이때 여러 번에 걸쳐 칼날이 번득이고 총알이 빗발치는 아수라장에서 겨우 5미터 전방에 있는 적이 쏜 총알을 살짝 목을 기울여 영화 매트릭스처럼 피해버리는 초인적인 경험을 합니다.

퉁랴오에서 붙잡혔을 때의 사진

우에시바 모리헤이 옹이 나중에 말하기를 “하얀 빛이 날아오는 게 보였는데 그걸 피했더니 그 뒤로 총알이 날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북자치군이 6월 12일 펑톈으로 가던 도중 내몽고자치구 파인타라(현재의 퉁랴오(通遼)에서 체포당합니다. 루잔쿠이는 사살당하고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데구치 오니사부를 포함한 일본인 일행 6명도 총살형을 선고받았는데 총살이 집행되기 직전에 일본영사관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구사일생으로 본국으로 강제송환 당합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이때의 경험으로 어떤 경우에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엄격함을 유지하는 풍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귀국 후 일본이 패전하는 1945년까지 우에시바 모리타카(植芝守高)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썼던 “왕수고(王守高)”라는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나 꺼내 보겠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에게 유도를 가르친 것은 스즈키 신고 사범이었다고 했는데요. 도헤이 선생이 다나베에서 들은 스즈키 선생과 우에시바 선생의 대화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우에시바 선생이 스즈키 신고 선생에게 유도 입문했을 때는 약했다고 하는 겁니다. 당시 우에시바 선생이 연습은 열심히 했지만 풀숲에 거름통을 숨겨 놓고 수련하러 오니까 냄새가 심했다는 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우에시바 선생이 대동류를 배운 후에 스스로 강해졌다고 생각하고 스즈키 선생에게 시합을 신청했는데 이때 스즈키 선생은 유도를 그만두고 스모 선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에시바 선생이 시합에서 집니다. 이때 허리를 다쳐서 한 달이나 누워 있었다고 하는데요,

나중에 우에시바 선생이 아야베에 갔다 온 뒤에는 몰라보게 강해져서 오히려 스즈키 선생이 합기도에 입문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도헤이 고이치 선생은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강해진 건 대본교의 수행을 통해 강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기도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이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축문도 종류가 아주 많아서 도헤이 선생이 세어본 적이 있는데 신 이름만 108개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대본교가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합기도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작은 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편에서는 귀국한 뒤의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활약상과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황무관 시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참고문헌>:
개정신판 합기도 교본 – 합기도의 역사와 전개 – 우에시바 깃쇼마루 저
월간 비전 2008년 12월호 외 몇 개의 합기도 관련 특집기사
기의 확립 – 나카무라 텐푸와 우에시바 모리헤이 – 도헤이 고이치 저
합기도 수행 – 시오다 고조 저
투명한 힘 – 기무라 다쓰오 저
인터넷 사이트 R 영계이야기.네트 – 데구치 오니사부로 대도서관
인터넷 사이트 임협대사전 야쿠자위키

<합기도역사 제3부에서 이어보기>
<합기도역사 제1부 다시보기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