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든 어른과 지혜의 확산(2-1) -조현일 에세이

출처:네이버 불로그 ‘봄춘’ 존리치 사진전

우리 할아버지는 아들들이 장성하자 가진 모든 걸 아들들에게 맡기고 둘째아들집의 자그마한 방에 들어가셔서 하루종일 글을 읽고 쓰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으셨지만 허리가 빠지고 비를 걱정하는 농사에 신물이 나셨을 겁니다. 지금도 가끔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실로 저를 찾아오신 할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무슨 이유였는지 알지도 못하겠지만 토라져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도 내팽개치고 등교해 버린 손자를 걱정하신 할아버지께서 한손에 지팡이를 짚으시고 다른 한손에 점심도시락을 들고 교실을 찾아오셨습니다.

하얀 한복에 명치까지 내려오는 수염을 기르신 할아버지께서는 상투에 갓까지 쓰고 계셔서 영락없이 조선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처럼 보이셨더랬습니다. 할아버지의 방에는 언제나 한 장씩 뜯어내는 달력이 벽에 걸려있었는데, 양력과 함께 태음력의 날짜가 크게 씌어져 있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토정비결과 주역에서 사용하는 복잡한 한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방에는 수십 년 전에 사용하시던 등유 램프와 주머니칼과 붓벼루와 제가 가장 즐겨먹던 박하사탕이 가득 차있는 단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하사탕을 하나 입에 넣기 위해선 할아버지의 한자퀴즈에 정답을 제시해야만 했죠.

출처:네이버 블로그 ‘도영이 맘의 행복 다이어리’

할아버지는 출중한 한학자는 아니셨지만 토정과 주역을 항상 공부하신 학구파 선비셨습니다.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모르는 건 할아버지께 여쭈어보면 언제나 알기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월요일 아침조회때 왠지 교가를 부르는 걸 강요받는 상황이 마음에 안든 저는 선생님께 애국가는 1절만 부르면서 교가를 4절까지 불러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반항하였습니다.

‘어이구, 현일이는 언제나 철이 들려나.’ 권위에 대한 불복종에 체벌을 기대하고 있던 저는 선생님의 의외의 너그러운 핀잔에 의아해하며 귀가하여 언제나 그랬듯이 저녁식사전에 박하사탕 하나를 입에 넣기 위해 할아버지를 찾았습니다. ‘할아버지, 철이 들지 않았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할아버지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밝을 철哲을 달력 종이 뒤에 쓰시고는 예의 퀴즈를 내셨습니다. 초2에게 밝을 철은 너무 어려운 한자였습니다. ‘이렇게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열매가 영글 계절을 맞아 여무는 ‘철’의 시기를 아는가…라는 뜻이 아닐까.

철을 아는 사람은 논에 물을 대야 할 시기를 잘 아는 사람이란다.’ 달력을 보면 알 수 있을 텐데요…라고 말하려다 머뭇거리자 할아버지께서는 다시금 ‘사리를 분별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앞으로 올 시간을 걱정하는 나이가 되면 사람은 철이 든단다. 네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건 아직 나이가 되지 않아서지. 조금 기다려라. 시간이 지나면 철이 들고 지혜로운 어른이 될거다.’ 이어진 말씀은 기억은 나지만 너무 어려운 한자어가 섞여 있어서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출처:THE HILL

샌디애고 캘리포니아대학 노화연구소의 정신의학자 딜립 제스트Dilip Jeste는 주류 정신의학계의 근본이론을 뒤흔든 새로운 이론을 제안한 연구자로 유명합니다. 제스트는 긍정심리학을 정신의학의 임상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긍정정신의학positive psychiatry’ 분야의 최선봉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의료인이기 때문에 환자의 정신질환의 치료에 주력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환자의 우울증이나 불안증 등의 질병의 고통이 완화될 수만 있다면 의료인으로서의 의무는 다 한 것이죠. 하지만 제스트는 정신의학은 질병의 완화와 치료 이상의 영역에 기여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스트는 정신의학분야가 환자뿐만 아니라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지 않는 일반인 다수의 일상적인 행복과 정신적 회복력을 증진하며 정신의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을 찾고 문제를 예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하지만 ‘행복의 증진’이라는 테마는 의학 교육 과정의 어떤 교과서에서도 다루지 않습니다. 질환에 대한 대응은 가르치지만 ‘행복’이라는 애매모호한 용어를 교과서에 실을 순 없었죠. 소위 ‘국가별 행복지수’라는 인덱스로 정부의 복지정책의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보건학계와 정치학계의 주장도 있지만 ‘행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합니다.

작가 조너선 라우시는 저서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The Happiness Curve’ (조너선 라우시/ 김고명 역/ 부키/ 2021)에서 제스트가 긍정정신의학의 기반을 다지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학자로서 제스트는 자신의 환자들을 관찰하면서 ‘노인이 되면 몸은 쇠하는데 어째서 인생 만족도는 높아지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앞서 언급하였듯이 ‘만족’이라는 개념이 가히 주관적인 점이 학문적으로 다루기에는 문제가 되지만 환자 본인에게 묻는 설문에서 ‘만족’의 경향성이 우연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나타나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제스트는 ‘노인들에게서 관찰되는 인생의 만족은 육체가 불편해져도 정신은 오히려 지혜로워지기 때문인가’라는 가설을 세웁니다. 당연히 이어지는 질문.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제스트는 지혜를 명확히 정의하기보다 지혜를 과학적으로 정량화하려는 시도를 펼칩니다. 뇌손상을 가지는 노인들의 뇌를 fMRI로 촬영한 결과, 뇌 내의 두 부위(전전두피질, 특히 배외측, 복내측, 전대상회와 변연계 선조체)가 지혜의 영역들에 공통으로 관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해당 부위가 질병이나 사고로 손상되면 지능은 그대로지만 통상적으로 지혜롭지 못하다는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제스트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지혜의 범주와 영역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전통과 과학의 문헌에서 지혜에 대한 맥락을 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스트는 이 연구를 통해 지혜라는 개념이 시대와 지역을 넘어 각 사회와 문화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고 공통적으로 보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제스트의 문헌연구는 여러 텍스트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지혜의 특질을 다음과 같은 키워드로 정의합니다.

공익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친사회적 태도와 연민, 실용적인 인생의 지식, 실용적인 지식을 응용해 개인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처리하고 다양한 관점을 보는 능력, 정서적 안정성과 감정 통제력, 성찰 능력과 공평무사하게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능력. 개인과 사회의 역할에 방점을 찍는 서양의 철학 문헌에 비하면 인도의 성전인 ‘바가바드기타’는 인간의 욕구와 물질적 쾌락을 다스리는 능력을 지혜로 정의합니다. 제스트는 일찌기 인도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한 경험이 있어, 베다, 우파니샤드와 함께 힌두교의 3대 경전 중 하나인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에 익숙하였습니다.

제스트는 심리학자 입싯 바히아Ipsit Vahia와 공저한 2008년 ‘정신의학Psychiatry’에 발표한 논문에서 ‘바가바드기타’에서 논하는 지혜의 개념을 서양의 현대 과학 문헌과 비교하면서 인생에 대한 풍부한 지식, 감정 절제력, 공익에 대한 기여, 연민과 희생, 겸손을 중심에 둔 통찰 등의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이들의 맥락을 따라가면,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관념이 암묵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문화권마다 다양한 변형과 변용이 가해지기는 하지만,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일관성이 존재한다는 말이죠. 따라서 ‘지혜’라는 개념이 인간과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무질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혜는 시대와 문화를 불문하고 어디에서나 쉽게 인지될 수 있는 ‘덕목’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스트는 인간의 문화에 편재하는 지혜의 보편성을 근거로 지혜가 호모 사피엔스로의 진화에 있어서 중요한 속성이며, 부분적으로나마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지혜는 인류라는 종의 생물학적인 기초에 기반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제스트는 뇌과학의 최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 뇌가 나이가 들수록 개개인의 기분을 더 좋게 만드는 방향으로 변화하며, 또한 노년의 어떠한 부정적인 특성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고 봅니다. 뇌의 특정 부분이 지혜가 작용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들이 지혜를 생산하는 중추라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의 작용과 발현이 뇌의 회로망에 탑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놓고 보면 이를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출처:네이버 블로그’흐름을 넘어서’

만일 지혜에 생물학적 기초가 있다는 제스트의 가설이 옳다면 아마도 지혜는 인생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스트의 가설은 이러한 진화적 기제가 가임기를 지난 여성과 신체적인 근력이 현저하게 저하되는 50대 이후의 남성을 포함하는 노년에도 계속적으로 유지되거나 혹은 더욱 원숙해지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생물학에서 논하는, 폐경 이후의 여성이 자녀와 손주의 안녕에 사회적으로 기여함으로써 혈통의 미래 전망을 개선하려고 한다는 ‘할머니 가설’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은 인간 여성이 비교적 일찍 폐경기를 거친 후 생식 능력이 없는 상태로 오랜 기간을 보내는 이유를 설명하는 주장입니다. 인간 외에 할머니 가설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종은 들쇠고래와 범고래 뿐이라고 하는데, 해양생물학자들은 연구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범고래의 생태 연구를 통해 무리 내에 폐경이 지난 어미 고래와 할머니 고래가 함께 생활하는 경우 젊은 고래들의 생존률이 크게 향상되며, 심지어 젊은 고래들이 다 자라 새끼를 낳아 기를 때에도 이러한 향상 효과가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범고래의 생태 연구 결과가 직접적으로 적용되기에는 인간 사회가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한 인자가 작용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인간에게도 유사한 작용이 존재할지 모르죠. 진화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젊은 개체들은 생식이 가능하기도 하거니와, 혹은 오히려 치기넘치고 과감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건방과 용기를 가지고 있기에 지혜롭지 않아도 군집의 생존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년에는 지혜가 사회적으로 더욱 중요한 기능으로 작용합니다. 50살을 넘긴 노인(장년)은 젊은 개체가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종의 생존에 기여할 방법을 찾아야 하며, 그 유일한 방법이 다름아닌 ‘지혜’의 발동이라는 거죠.

(철든 어른과 지혜의 확산(2-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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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