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고래와 맹목적 폭력(2-2) -조현일 에세이

모비딕 (출처;네이버 블로그)

‘모비딕’은 ‘모카딕’이라 불렸던 실존했던 알비노(백색증) 고래였습니다. 19세기 초 향유고래의 경뇌유에서 추출되는 등화와 윤활유로 사용되는 고래기름, 그리고 대왕오징어를 잡아먹고 내장에 남은 찌꺼기인 용연향龍延香(향수의 원료)을 확보하기 위한 포경捕鯨은 엄청난 부를 단시간에 안겨주기도 하지만 포경업계의 종사자의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하는 무시무시한 자본주의 기계입니다.
또한 일반적인 길이가 약 20미터에 달하고 무게는 40톤, 수중에서 시속 40km가 넘는 속도로 헤엄치며 해저 2km까지 잠수하고 20기압에 견디는 내구력을 가지는 바다의 황제인 향유고래를 나무로 만든 범선으로 사냥하는 인간은 그야말로 삶을 요행으로 얻을 수 있는 금화로 담보하는 돈의 노예입니다.

1799년 진수식을 올리고 마스트에 돛을 올린 애식스호는 전장 24m의 238톤급 포경선이었습니다. 대형 고래를 포경하기에 적합한 클래스였죠. 1819년 8월 조지 폴라드 선장의 휘하에 20명의 선원들이 모여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남태평양으로 선수를 향합니다. 기세좋게 출항했지만 당시 다양한 국적의 수많은 포경선들이 무차별적으로 고래를 사냥하여 향유고래의 씨가 말라 애식스호는 단 한 마리의 고래와도 마주칠 수 없었습니다.
1820년 여름 에쿠아도르의 아타카미스에 정박하여 물자를 공급받던 폴라드 선장은 원주민들로부터 무절제한 포경선들을 피해 칠레 남부의 모카섬 근처에 고래들이 자리잡은 새로운 서식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하지만 이 귀중한 서식지를 지키는 수문장 거대 향유고래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모카딕’. 이 놈은 먼 발치에서 포경선을 보면 줄행랑을 치는 다른 고래들과는 달리 오히려 포경선을 공격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분노에 찬 알비노 고래였습니다.

하얀 피부의 거대한 몸집의 모카딕은 앞머리의 경뇌유를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혀 포경선의 측면을 들이받거나 수면 위로 솟아올라 분수공으로 물을 뿜어 마스트를 꺾어버리는 기발한 전법을 사용하고 있었죠. 애식스호는 모카딕의 공격에 산산조각이 났고 선원 중 오직 8명만이 살아남아 인근 섬에 난파합니다. 구조를 기다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버텨야 했던 선원들은 서로를 잡아 먹는 식인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1938년 생을 다한 모카딕은 통산 22척의 포경선을 침몰시킨 전적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제레미아 레이놀즈가 마침내 모카딕 사냥에 성공한 포경선 ‘리바이어던’의 일등항해사를 인터뷰한 기사가 ‘니커보커 매거진’에 실려 모카딕의 육중한 공포를 세간에 전했습니다.

‘추격자들과 100번이 넘는 싸움에서 승리한 이 괴물은 엄청난 크기와 힘을 가진 늙은 황소와 같은 녀석이었다. 양털처럼 새하얀 몸통을 가지고 있어 멀리서보면 마치 거대한 구름이 수평선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화가 나면 물 속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와 그 거대하고 육중한 몸을 공중에 띄우기도 했는데, 그건 자연재해와 다름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리바이어던이 모카딕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은 무너져 내렸고 바다는 진홍색으로 물들었느니. 그 녀석의 머리에서 무려 158리터에 달하는 향유를 추출할 수 있었다.’

‘모비딕’의 이야기는 ‘모카딕’의 실화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은 멜빌의 상상력의 소산이었으며, 모카딕이 그러했듯이, 모비딕도 다른 고래무리와 어울리지 못하는 알비노로서 집단사회에 소속되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반발로 무자비하고 맹목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자기모순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장 에이해브’ (출처:네이버 블로그)

멜빌의 ‘모비딕’의 포경선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는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모비딕을 향해 맹목적인 혐오를 표현합니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나를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공격하겠다.’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고 고래뼈로 만든 의족을 차고는 자신을 가엾은 신세로 전락시킨 가증스러운 흰고래에게 복수를 다짐한 에이해브는 업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운명에 거슬러 자연에 대한 응징을 맹신하는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이슈메일 혹은 이스마엘이라는 ‘모비딕’의 화자의 이름이 비록 본명은 아니더라도 성경의 인물의 전형을 차용하고 있듯이 ‘에이해브’ 선장의 이름도 성경에서 차용되었습니다. ‘아합’이 바로 그 주인공이죠.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은 이교도 아내 이세벨에게 종교권한을 위임하여 바알 우상숭배를 추진한 인물로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열왕기상 16:31)’한 악의 축軸이었습니다.

송아지 형상을 한 바알을 섬기는 아합을 비난하다가 핍박받은 예언자 엘리야는 ‘너와 아내 이세벨은 개에게 먹힐 것이고 네 집안은 망할 것이다’라며 저주를 퍼붓기도 했습니다. 고아한 인격의 예언자가 이토록 험한 말을 쓸 정도로 아합은 악의 전형이었습니다.
에이해브는 삶의 어느 순간 불가피하게 시련을 맞닥뜨렸다면 그 시련을 보내주는 성숙함을 보여야 할 원숙한 연배이며 망망대해의 비유로 나타나는 삶에서 주도적인 위상을 잃지 않고 모든 방해물을 헤쳐나가는 태도를 가진 인물로 긍정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평론가도 있다고 합니다.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에이해브의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 시련의 극복보다는 삶의 목적과 의미에 집중하려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입니다. (멜빌의 ‘모비딕’을 읽고 감동받으신 사장님께서는 새로운 커피 사업에 ‘스타벅스’라는 이름을 붙여 일등항해사의 이름을 기립니다. 꼬리가 둘 달린 사이렌보다는 고래가 낫지 않았을까요?)

분노

스타벅은 시련에 매달려 원망과 분노의 헛된 감정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태도는 자신을 바다에 침몰시키려는 자기파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 각자의 (종교적/ 세속적) 신념 속에서 매몰되는 고독한 인간을 슬퍼합니다.
‘모비딕’은 에이해브와 스타벅의 대립과 타협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스마엘은 객관적 시점에서 이들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나를 파괴하여 영원히 의족에 의지하는 가엾은 신세로 만든 건 바로 그 가증스러운 흰고래였다. 대륙의 양쪽에서, 지구 곳곳에서 그놈의 흰고래를 추적하는 것, 그놈이 검은 피를 내뿜고 지느러미를 맥없이 늘어뜨릴 때까지 추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항해하는 목적이다. 어떠냐, 나를 도와주겠는가?’

광기로 인해 카리스마 넘치는 선장에 대한 존경심 비슷한 동정심과 고래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적개심에 불타는 선원들은 에이해브의 선동에 감정적으로 동조합니다. 하지만 포경선의 일상의 무게는 감정만으로 견디어 내기엔 너무도 신랄하고 비참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우리는 오랜 고생 끝에 이 세상에서 가장 덩치큰 동물에게서 비록 적지만 귀중한 경뇌유를 빼낸 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참을성 있게 몸에 묻은 오물을 씻어낸다. 하지만, ‘고래가 물을 뿜는다’라는 외침소리에 우리는 또다른 세계와 싸우러 달려가 젊은 인생의 판에 박힌 일로 처음부터 다시 되돌아간다.’

영화 한장면

일상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시련과의 조우도 지긋지긋하게 반복될 것이며, 고통과 회한, 그리고 시련에 대항하는 폭력성도 반복될 것이라는 존재론적 부조리의 각성. 갖은 고초를 겪으며 3일간 모비딕을 추적한 에이해브와 스타벅 등의 선원들은 결국 압도적인 폭력을 자랑하는 백경의 눈알에 꽂힌 작살의 밧줄에 휘감겨 수중의 심연으로 빨려들어가 버렸습니다.

시련과 운명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와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유린하기에 우린 신과 자연에 대해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분개합니다. 하지만 운명의 결과를 진정 부당하게 만드는 주체는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모비딕도 에이해브도 신과 운명의 알레고리로서의 망망대해도 모두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두고 보면 이들이 서로에게 뿜어내는 맹목적인 폭력성은 아무리 고찰해보아도 부조리합니다. 창시자께서는 일찌기 맹목적인 폭력의 부조리를 간파하시고 ‘화和’의 개념을 통한 폭력의 중화를 설파하셨습니다.

평화의 무술 ‘합기도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기념하는 기념관 내부

추방자이자 부적응자로서의 이슈메일이 방관자로서 모비딕과 에이해브의 대립을 서술하였듯이 반전反戰을 외치는 사상가로서 광기어린 세계 식민전쟁의 와중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주변인이었던 창시자는 전쟁을 통한 승리와 패배가 아닌 화의 정신을 서술함으로써 폭력으로 표현되는 전쟁야욕에 취해있는 당시의 일본인들을 비판하였습니다.

에이해브의 맹목적인 혐오와 폭력의 희생양인 말못하는 짐승으로서의 모비딕이 결코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듯 (하얀 고래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인간의 맹목적인 폭력에 부득이하게 동일한 맹목적인 폭력으로 답하고 말죠. 의식과 의지를 가지지 못하는 자연이기 때문에.) 창시자는 인간 서로가 정복과 극복을 쟁취하기 위한 폭력의 대상이 아니라 화합의 대상임을 역설하였습니다.

멜빌은 무자비한 자연으로서의 모비딕과의 극한의 대립의 결과가 에이해브의 파국이라는 교훈을 장황한 서술을 통한 ‘소설’이라는 문학 매체로 전달하려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시자는 일본이라는 제국이 국민(신민)을 무자비한 폭력의 아수라장으로 내미는 템페스트의 와중에서 국가 권력에 기반한 폭력의 방향을 전회하여 외견상으로 폭력으로 보이는 ‘무도’를 통해 역설적으로 ‘화和’를 추구하는 철학을 설파하였습니다.

평화의 무술 합기도

당시의 일본인들이 창시자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억압적이고 맹목적인 제도적 폭력으로서의 제국주의 사회체제를 동원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만약’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엄중한 교훈만이 남을 뿐이겠죠.
오호통재라,
내일이라도 찰랑한 생머리의 영문과 누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위스키 잔을 마주치며 알비노 향유고래의 슬픔과 인간의 무자비함, 그리고 맹목적 폭력에 대처하는 창시자의 철학을 함께 논할 수 있으련만…
‘누나, 저도 이제 읽었어요, ‘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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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