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고래와 맹목적 폭력(2-1)-조현일 에세이

오 세상에서 보기 드문 늙은 고래여/ 그대의 집은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 힘센 거인이여/ 그대는 끝없는 바다의 왕이로다.

-고래의 노래 (인도설화)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은 소개팅따위엔 전혀 관심도 없겠거니…하는 선입견은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에게는 너무도 괴로운 ‘선입견’입니다. ‘군대를 다녀와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세간의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제대했다고 인성의 핵심이 변화할 리도 없거니와 군생활의 고초의 기억은 제대후 2개월이 지나면 깡그리 망각되며, 이 선입견의 기대를 맞추기 위해 복학생은 괜히 검게 물들인 야상을 입고 세상 근심을 모두 자신의 어깨죽지에 올려 놓은 듯 도서관 앞 벤치에 싸구려 담배를 꼬나물고 인상을 찡그리고 앉아있어야만 하죠.

당시 잘난척하던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이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정도를 품에 끼고 있다면 거의 완벽한 ‘그림’이 될 것입니다. 이 정도 책은 직접 구입할 것이지 도서관에서 빌려서는 안될 것이기에 대출 스탬프가 보이지 않도록 방향을 잘 잡고 겨드랑이에 꼭 끼워 넣어야 할 것이죠. 하지만 이런 모양새가 오랜 기간 계속 이어지면 후배들도 저를 불편해하고 대학생활의 꽃인 소개팅도 물건너 갑니다.

저도 제대하고 얼마되지 않아서는 사회에서 기대하는 복학생의 이미지에 배신하지 않기 위해 동대문 야시장에서 구입한 검은 야상과 청테이프가 감긴 군화를 신고 한달 가량을 버텼지만 무겁고 불편하고 거칠고 퀘퀘한 향냄새가 나서 어머니의 돈낭비했다는 힐난을 받으며 폐기해버렸습니다. 읽은 적도 없고 읽고 싶지도 않은 ‘존재와 시간’은 라면 냄비를 올리기에 적당한 크기와 두께였습니다.

표지 사진 속의 하이데거의 콧수염에 냄비바닥의 커다란 갈색 원이 그려졌습니다. 도서관 사서는 배상하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재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왔습니다. 또다른 트렌드를 따르기 위해 어머니께 또다시 손을 벌려 게스Guess ‘비슷’한 청바지와 폴로Polo ‘비슷’한 셔츠를 구비하고 나이키 ‘비슷’한 ‘르카프’를 장비한 저는 과후배들에게 학생회관에서의 점심을 미끼로 아름다운 만남과 잠재적인 장밋빛 미래를 위한 사회(사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학생회관 식당의 점심식사는 당시 5백원(1995년) 정도라 과외 아르바이트 몇 건만 열심히 뛴다면 일주일에 3건 정도의 식사대접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와 선입견과의 싸움을 거쳐 드디어 94학번 후배의 언니의 동네 언니의 아는 언니의 지인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영문학과 3학년이라는 사전정보를 어렵사리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 그럼 누나네?’
‘연상은 싫어요?’
‘아니, 그럴리가 있나! 일만 성사된다면 코코스에서 돈가츠 정식을 제공하겠느니라.’
미역국과 함께 제공되는 바삭한 돈가츠에 눈이 먼 후배는 곧바로 삐삐 호출기 번호를 적어주었고 영문학과 누나와의 만남 약속은 급물살을 탈 수 있었습니다.

‘모비딕’ 영화 한장면

핑크빛 상상으로 가득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는 디자인 전공인지라 영문학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만나야 하는데 뭘 준비해야 할까? 급한 마음에 소개팅 업계에서 다양한 학과와 꽤나 경험이 있는 경영학과의 고교동창에게 자문을 구하니, ‘영문과 3학년이라면 ‘백경’ 정도는 읽고 만나야 하는거 아닌가?’ 하길래, 급한 마음에 도서관에서 주제의 요약본을 대강 읽고 약속장소로 향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전지현 생머리에 명품 브랜드 로고가 자그마하게 씌어진 하얀 티셔츠에 ‘진짜’ 게스 진을 받쳐 입은 눈부신 누나가 시크하게 나타나시어 배고픈 중생은 시각적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두꺼운 뿔테안경의 레이스 블라우스에 롱스커트를 상상했던 저에게는 누나와의 만남이 큰 선물이었습니다만, 학교 앞 다방에서의 대화가 그럭저럭 잘 진행되다가 아니나다를까 동창의 조언대로 대화 와중에 갑자기 등장한 ‘백경’에서 저는 그만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읽어봤어?’
‘아, 그럼요, 그 정도는 미대美大도 교양으로 읽어요. 너무 띄엄띄엄 보시는거 아닌가요?’
이내 아까 읽었던 요약본 내용을 읊어 보았습니다.
‘영어 제목은 ‘모비딕’이거든. 근데 왜 우리나라 번역 제목은 ‘백경白鯨’일까?’
허를 찔려 순간 당황하고 말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에이, 안읽었구나?
‘헛된 자존심을 세우느라 우겨보았지만 읽은 사람에게는 빤히 보이는 만용이었습니다. 근데 왜 백경이지? 하얀 고래?’

고래가 원래 하얀 색이었던가? 어라, 생물도감에서 본 고래는 회색이었던 거 같은데… 당황한 저를 배려하여 누나는 다른 화제로 넘어갔습니다. 한 시간 가량의 만남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다음을 기약하며 누나와 헤어졌습니다. 당시에는 대학생에게는 휴대폰(시티폰)은 사치품이었기에 소개팅 주선자를 통해 다시 만날 약속을 잡아야 했죠.
소개의 댓가인 돈가츠 정식을 먹고 배부른 후배는
‘언니가 그러는데요, ‘백경’ 읽고 나서 만나던가 말던가 하자던데요.’
칫, ‘백경’ 따위가 뭐 그리 중하다고… 사람의 마음이 중하지… 게스 진의 눈부신 누나와의 아픈 기억은 또다른 아름다운 기억으로 덮어버리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픈 기억은 덮을 수는 있어도 지울 수는 없더군요.

얼마전 영화 ‘더 웨일The Whale(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 브렌든 프레이저 주연, 사무엘 헌터의 연극 ‘더 웨일’ 원작, 2023년 아카데미남우주연상, 2022)’을 관람하고 나오면서 아내가 눈가가 촉촉해진 저를 보며 측은해 했었습니다만, 사실 영화의 감동과 더불어 30년 전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고 솔직히 말할 순 없었습니다.

까맣게 잊었던 기억과 함께 ‘백경’의 고래는 왜 하양이었을까…라는 예전의 의문에 대해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금 스스로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상식과 교양으로 취급되는 텍스트를 고작 소개팅에서의 트라우마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제 스스로에게 실망이 섞인 화가 났습니다.

영화 ‘더 웨일’은 허먼 멜빌의 소설과는 시간적으로나 맥락으로 보나 연결고리는 가지고 있되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영화는 신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건 아니건 상관없이 신의 존재여부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증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전 계몽시대의 수학자와 과학자들이 시도하기는 했지만,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태도 자체가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이 무엇을 이루려 한다는 의도를 인간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도 하거니와 신의 존재는 전지전능한 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기도가 신에게 도달하여 응답이 있을지도 보장이 없으며 기적이라는 현상도 신의 의지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신에 대한 믿음을 선택할 뿐이죠.

어떤 인간은 타인의 기도를 엿듣고 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천주天誅를 하거나 도움을 주거나 혹은 기적을 기다립니다. 인간에게 허락되는 구원은 기도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간은 신이 듣고 계시는지 아닌지 모른채로 구원을 희구합니다. 영화 ‘더 웨일’은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하는 인간에게 허락된 구원은 스스로 혹은 인간끼리 서로 베푸는 기적적인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영화에서 칭하는 ‘고래the Whale’의 의미는 고도비만을 가리키고 있으며 주인공의 딸이 쓴 멜빌 소설의 독후감을 죽기 직전에 귀에 울리는 천사의 목소리로 간주하는 대목에서는 소설의 텍스트가 인용되고는 있지만 직접적인 맥락이라고 보기엔 힘들 것 같습니다.

영화는 더우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체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종교적인 구원을 비관적으로 다루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어 ‘백경’의 주제와는 직접적인 접점이 없어 보였습니다. 멜빌의 ‘백경’과의 맥락 연결을 기대한 저에게는 살짝 실망스러웠지만, 슬픈 기억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백경’에 다시 도전해보는 방아쇠로서는 손색이 없었습니다. 오기가 발동한 저는 일단 최신 번역의 멜빌의 ‘백경’을 입수하여 텍스트에 돌입해 보는 걸로 모든 걸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어째서 ‘하얀 고래’인지 의문을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난독서로 세간에 알려진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먼저 헤겔의 ‘정신현상학’. 대학시절에 한 번, 얼마 전에 다시 한 번 손에 들어보았습니다만,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바로 서가에 되돌리고 독일 철학은 다시는 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훌륭한 문장인 건 알겠지만 지루해서 도저히 감정이입이 안됩니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읽는 데에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것 같고 상당한 문학적 소양이 요구될 것 같아 환갑을 넘기고 다시 찾기로 했습니다.

‘더블린 사람들’은 회문 구조를 가진 단편이라 하나씩 분석하면 이해가 그리 어렵진 않았는데, ‘율리시스’는 독해에 엄청난 무리가 있었습니다. 학창시절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난해한 서적으로 대표적이었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여 금서로 지정되어 있었기에 특정 부류의 학생들만이 원서를 복사하거나 일어번역본을 몰래몰래 읽고 토론하곤 했었습니다. 당시엔 금서를 읽다가 발각이라도 된다면 청춘을 남산에서 보내야 할 것 같았기에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난해한 서적이라서가 아니라 구할 수 없으니 ‘어렵지만 읽어야만 하는 책’ 리스트에서 쉽게 제외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백경’은 이런 핑계가 통하지 않는 ‘난해한 필독서’였고 나이 오십이 넘어 더이상 미룰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출판계에서는 ‘백경’이라는 제목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 같습니다. 작가정신에서 간행된 김석희 번역의 ‘모비딕’은 첫 구절부터가 산뜻했습니다.

영화 한장면 ‘이스마엘의 탄생’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구약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이 이름과 함께 ‘쫓겨난 자’라는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떠올리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이집트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이스마엘’의 영어식 발음이 ‘이슈메일’이죠.

레아와 라헬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노예를 대리모로 삼는 경우가 흔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실에게서 이삭이 태어나자 한때는 유일한 상속자였지만 서자로 태어났던 이스마엘은 사라의 미움을 받아 광야로 쫓겨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하고 세상을 떠나자 이스마엘은 집으로 돌아와 이삭과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었다고 합니다.

어떤 문장이건 첫 문장이 가지는 ‘첫인상’이 중요할 것인데, ‘Call me Ishmael’로 시작하는 첫 문장을 ‘내 이름은 이슈마엘이다’가 아니라 ‘이슈마엘로 해두자’라고 번역한 역자의 텍스트에 대한 감각과 이해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이슈메일은 아마도 기존 사회에서 자발적이건 아니건 소외되거나 추방된 이가 아닐까요.

주변인으로서의 화자가 자기만의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과 함께 포경선이라는 주변공간으로 밀려나 벌어지는 사건이니 이야기 자체가 19세기 미국사회를 외부에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함의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께서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규칙을 지켜주지 않는 멜빌의 태도에 분노하게 됩니다.
책의 3분의 2 가량이 ‘고래학cetology’에 할애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사건의 서술이라는 소설의 기본 패턴이 완전히 무시되고 포경의 역사와 과정, 잡힌 고래의 해체과정과 포경선의 구조와 종류, 작살 도구와 작살잡이들과 선원들의 선상 생활의 설명 등 사건의 발생과 인물의 성격 묘사보다 세계관의 디테일이 중요하게 전달됩니다.

사진출처:네이버 블로그

소파에 앉아 이 책을 손에 든 독자에게 포경업이라는 배경의 상세묘사가 3백 페이지가 넘게 이어진다면 어느 누가 이 책을 흥미진진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독자들의 이런 아우성을 미리 예측이나 한 듯 멜빌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아무리 고래를 해부해보아도 피상적인 것 밖에는 알 수 없다. 나는 고래를 모른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 같다. 고래의 꼬리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머리를 알 수 있겠는가. 게다가 고래는 얼굴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고래의 얼굴을 알겠는가?’

고래는 너무 거대해서 얼굴이 한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해부학과 포경 잡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비딕은 무엇이든 물질로 환원시키려는 인간의 태도에 대한 신의 알레고리입니다. 지구환경과 같은 자연을 물질화하여 신을 이해하려는 인간은 이 방식으로는 어떻게 해도 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방식을 버릴 수 없습니다.

멜빌은 삶을 움직이는 운명의 신비와 신의 섭리를 우리가 결코 완벽히 헤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역설합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에서도 행성 탐사의 내러티브와 함께 행성의 운동과 중력 강도와 질량과 표면의 성분을 자세하는 묘사하는 ‘솔라리스학’이라는 백과사전적인 학문체계의 설명이 수십 페이지에 걸쳐 등장합니다만, 배경지식을 내러티브에 담지 않고 마치 고래학 도감을 펼치듯 건조하게 제시하는 서술방식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작가의 태도입니다.

‘모비딕’이 난독서로 악명 높은 데에도 이러한 서술방식이 한몫 하지 않았을까요? 책을 반이나 읽었지만 어째서 ‘모비딕’이 ‘백경’으로 불리는지, 혹은 어째서 이 고래는 하얀 색을 띠는지가 불분명했습니다. 소개팅의 누나도 저에게 그 질문을 했었고 30년이 지나도 전 그 해답을 알 수 없어 답답했습니다. 하릴 없이 구글에 질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너무도 허망하게 금새 답을 알 수 있었습니다.

(2-2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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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