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틀비의 선택과 칼을 놓음(2-1) -조현일 에세이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오래전처럼 느껴지지만 너무도 기억이 생생하여 감히 그리 오래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 순간들을 누구나 하나씩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실 겁니다. 누구에게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첫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구에게는 원하는 패가 나오지 않아 큰돈을 잃은 슬픔의 순간일 수도 있겠고, 누구에게는 갓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은 감동적인 기억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아직도 가끔씩 꿈속에 등장하는 논산훈련소의 셋째날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1992년 봄이니 벌써 어언 3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아침의 사열에서 제 옆에 서 있던 어느 훈련병의 촛점없는 눈은 아직도 생생한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훈련소 입소후 3일째가 되니 이제 자신의 분신이자 애인이자 동료가 될 소총을 배급해 주더군요. 사열해 있는 우리들 옆에 조교들이 소총을 한 정씩 세워주고 저희들이 이를 손에 쥐는 ‘소총수여식’이었습니다. 군대에 와 이제야 처음으로 무기를 손에 쥐는구나…하며 긴장감과 함께 드디어 군인으로서의 구색을 갖출 수 있겠다는 안도감도 있었습니다.

사열대 위의 사령이 각자에게 배급된 소총을 손에 쥐고 어깨에 메라는 명령이 스피커로 쩌렁쩌렁 울렸고, 모두들 명령을 따라 소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제 오른쪽에 서있던 훈련병은 소총을 들어올리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조교들이 뛰어와 그 훈련병에게 조용히 명령했습니다.

‘훈련병, 당장 소총을 들고 자세를 취하십시오.’ 그러자 그는 ‘총을 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습니다.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출처:브런지>

저도 깜짝 놀라 살짝 시선을 오른쪽으로 향하여 그 사람의 얼굴을 흘낏 보았습니다. 약간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눈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는 듯 했습니다만, 어쩐지 눈동자의 검은자가 흐릿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조교가 다시금 ‘거총!’이라고 힘주어 명령하자 훈련병은 이제 큰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소총수여식은 훈련소의 중요한 행사이기에 더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는 노릇. 훈련병은 열외되고 조교를 따라 막사로 이동했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훈련병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총을 들지 않는 불복종을 선택하였다고 하지만, 제게는 그저 깡마르지만 허리가 꼿꼿했던 흐린 눈동자의 청년으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오래 잊고 있었던 그날의 기억은 전역하고 복학하고도 한참 후 교양 과목의 고전영어 강독 수업에서 다룬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이 단편은 ‘모비딕’의 작가인 멜빌의 숨겨진 보석이었지만, 오랫동안 묻혀져 있다가 재발견/재해석되어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 실존주의 부조리 문학의 대표작입니다. 영미문학의 수업에서 멜빌의 ‘모비딕'(그 당시에는 ‘백경’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을 다루기에는 텍스트의 양이 너무 방대해서 단편을 통해 멜빌의 문학관을 들여다보는 기회였습니다만, 앞서 다른 에세이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수업의 내용보다는 가끔 캠퍼스에 출몰한다는 김태희 혹은 그녀를 닮은 여학생을 쫓거나 출석만 마치고 낮술을 마시러 나가는 풍조가 만연했던 90년대 중반의 대학 분위기였기에, 1853년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따위는 우리네 젊음의 이야기와는 너무도 거리가 있어,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김태희 닮은꼴은 ‘영미문학 고전강독’의 창가 자리에 앉아계셨고 저도 어차피 창문으로 몰래 나갈 수 없다면 교수님 말씀이나 들어보자는 느슨하고 오만한 태도로 교과서를 펼쳤고, 거기서 훈련소에서 만났던 그 청년과 재회하였습니다

이야기는 화자인 변호사의 자기소개로 시작합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줄곧, 평탄하게 사는 게 최고라는 깊은 확신을 갖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활기차고 흥분하기 쉬우며 더 나아가 소란에 휘말리기까지 한다고 흔히들 말하는 직종에 몸담고 있지만 그런 일로 마음의 평안이 깨지는 일이 없’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형이죠. 그는 ‘부동산 양도 취급인, 소유권 증서 검증인 등 온갖 종류의 난해한 서류 작성’을 본업으로 하며 스캐너와 복사기가 없던 1850년 경의 월스트리트에서 법률 서류의 내용을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필경筆耕’ 혹은 필사하는 직원이 필요했습니다.

필경사 바틀비<출처:책과 함께 소소한 행복>

유명해지자 일이 많아진 그는 추가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필경사 모집 광고를 냈고 전단을 보고 찾아온 한 젊은이가 ‘어느 날 아침 사무실 문턱에 미동도 없이 서 있’습니다. 드디어 이야기의 주인공 바틀비가 등장합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그 모습이! 그가 바틀비였다.’

바틀비는 처음 며칠동안 놀라운 분량을 필사합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리기라도 한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습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지만,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더라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여기까지는 일 잘하는 알바를 뽑은 사장님의 느긋한 마음이었겠지만, 바틀비가 일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맙니다. ‘나’는 바틀비를 불러 필사가 끝난 적은 양의 문서의 내용을 검증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바틀비는 큐비클 뒤의 자신의 은둔처에서 나오지 않은 채, 매우 상냥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충격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곧 뭔가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왔’습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는 편을 택하다니.’ 나는 크게 흥분하여 일어나 성큼성큼 방을 가로지르며 그의 대답을 되풀이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됐나?
여기 이 서류의 검증을 도와주게. 자, 여기 있네.’ 나는 그에게 서류를 들이밀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아무 생각 없는 듯 태연했고, 회색 눈은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요해서 생기는 주름살도 한 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태도에 최소한의 불안, 분노, 성급함, 무례함이 있었다면, 다시 말해 정상적으로 인간다운 데가 있었다면, 나는 필시 그를 난폭하게 사무실 밖으로 내쫓았을 것이다. (…)

나는 잠시 그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그는 쓰던 것을 계속 써나갔다. 나는 곧 내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을까? (…)
‘우리가 필사본을 검증할 참이네. 자, 여기 있네.’ 나는 그에게 네번째 필사본을 내밀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난 그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행동에 대한 이유를 요구했다. ‘왜 거부하는 거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그가 플루트 소리 같은 음색으로 대답했다. 내가 말하는 동안 그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신중히 숙고하는 듯했다.
말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저항할 수 없이 당연한 그 결론을 부정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보다 우위에 있는 중요한 사정 때문에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자네는 내 요구에,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에 응하지 않기로 했다는 건가?’
그는 간결하게 그 점에서는 내 판단이 옳다고 인정했다. 그렇다. 그의 결정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화자인 변호사는 애가 탑니다.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택한다’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물론 좋지는 않지만…) 왜 ‘안 하는 편을 택하는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먼 멜빌 1919~1991)

‘바틀비.’ 나는 칸막이 뒤에 있는 그를 부드럽게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바틀비.’ (…) ‘이리 좀 오게. 자네가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일을 시키려는 게 아니야. 그냥 자네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네.’ 이 말에 그가 어느새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틀비, 자네의 출생지가 어딘지 말해주겠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자네에 대해 무엇이든 아무거나 말해주겠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아니, 어떤 합리적인 이유에서 내게 말하기를 거부하지? 나는 자네에게 우호적인 기분인데.’ (…)

‘지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은둔처로 물러갔다. (…) ‘지금은 좀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것이 주검같이 맥없고 침울한 그의 대답이었다.

일을 시작한지 3일은 그나마 필경사로서의 업무, 즉 문서의 필사의 일은 이어나갔지만, 이제 바틀비는 모든 업무에 대해 ‘안 하는 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도리없는 변호사는 바틀비를 해고하지만 이마저 안 하는 편을 택한 바틀비.
결국 공권력에 의해 감옥에 갇힌 그를 면회간 변호사는 차갑게 식어있는 주검을 발견합니다.

<바틀비의 선택과 칼을 놓음(2-2)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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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윤준환 편집장
대한합기도회 사무국장 및 대한합기도회 중앙도장 도장장 2013년 러시아 월드컴벳게임즈 한국대표로 참가 세계본부도장에서 내제자 생활을 했음 ※ 중앙도장 위치 ※ - 서울시 동작구 사당로 28길 6 (3층) - 4.7호선 총신대입구(이수)역 9번출구 도보 3분거리 - 수련문의 : 02 - 3444 -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