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틀비의 선택과 칼을 놓음(2-2) – 조현일 에세이

몸은 이상하게 벽 밑에 웅크리고 무릎은 끌어안고 모로 누워 차가운 돌에 머리를 대고 있는 쇠약한 바틀비가 보였다. 그러나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나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몸을 굽혀보니 그는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깊이 잠들어 있는 듯 했다. (…)

나는 그의 손을 만졌다. 그 순간 찌릿한 전율이 내 팔을 타고 척추까지 올라왔다 발로 내려갔다. (…)
그리고 나는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바틀비의 상투어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번역된 문장은 영어로는 ‘I would prefer not to.’로서 일상에서 많이 쓰이거나 이야기 속에서 상황상 적절하거나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표현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틀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을 반복합니다.

바틀비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즉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기정사실화된 현실 자체를 부정하며, 또한 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하지 않음을 자주적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바틀비는 ‘하지 않음’의 가능성과 이에 대한 선택 모두를 긍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에는 ‘부정’의 선택 그리고 ‘선택’할 권리의 주장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조르조 아감벤 (1942, 4,22~) <출처:나눔문화>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안 하는 편을 택하는 바틀비의 주장이 ‘존재하거나 행동할 잠재성’과 ‘존재하지 않거나 행동하지 않을 잠재성’ 사이에 있는 일종의 비무장지대를 개방한다고 해석합니다.
‘주검같이 맥없고 침울한 그의 대답’은 죽음의 잠재성과 생명의 잠재성에 동시에 접해 있다고 보는 것이죠.
바틀비의 이야기를 계급투쟁의 측면에서 본다면, 변호사가 이기적 자본주의, 억압적 법률과 강요되는 질서, 합리주의와 계몽이 지배하는 영역을 상징하는 반면 바틀비는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권력에 복종하지 않으며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아방가르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방가르드 패션 <사진출처:Pinterest)
서로 사랑하라

이를 종교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면 기존의 경직된 계율을 파괴하고 새 계명을 주며 서로 사랑하라 가르치는 구세주의 도래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노동철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바틀비의 행위를 일종의 태업怠業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틀비는 작중에서 업무수당을 수령하지 않고 모든 노동을 거부하는 태도를 선택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는바, 태업이라기보다는 사보타쥬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감옥에서 단식을 하여 아사餓死하는 대목에서는 교정시설에서 주는 음식이 자본주의 체제의 부산물이라고 이해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틀비는 소극적이고 불투명하며 위축된 감정을 가지고 거대자본이 군림하는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주체가 경험하는 감정의 실상에 근접합니다. 수동적인 저항passive resistance은 우울과 혐오가 결합된 복합감정에서 기인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저항의 주체로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뚜렷한 자의식이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도망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선)택’하는 행위는 적극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도주의 종착점이 어디인지 인지하면서도 그 도주를 멈추지 않는 필연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감각으로는 선택이 아니라 도주이니 이는 멜빌의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문학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가끔 읽는 철학자 들뢰즈는 바틀비의 ‘선택’이 사실 ‘도주fuite’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도주의 길은 기존에 존재하는 길이 아니기에 자주적으로 길을 뚫거나 생산해야 합니다. 들뢰즈는 이를 ‘존재의 도주선ligne de fuite’이라 부르고 이는 탈주와 저항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라 설명합니다.

바틀비의 노동 거부는 노동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지배주체인 거대자본이 강요하는 리듬과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함으로써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저항의 행위입니다. 이 도주선은 실패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진출처:구글검색

들뢰즈의 해석에 의하면 바틀비는 또한 비문법적 표현과 상궤를 벗어나는 상투어를 사용하여 언어를 ‘탈영토화’하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은 바틀비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이내 변호사 사무실의 다른 필경사들에게까지 전염되어, 모두들 ‘prefer not to’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변호사는 위험을 직감합니다.
이대로라면 희한한 상투어를 통한 언어의 탈영토화가 체제 전체를 잠식하고 끝내 무너뜨릴 지도 모른다는 위험. 자신의 안락한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

바틀비에게 약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가지던 변호사는 이 상투어가 다른 필경사들에게 번지자 곧바로 바틀비를 해고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제거대상이 된 것입니다.
멜빌의 대표작 ‘모비딕’에 등장하는 선장 이슈마엘은 드넓은 바다를 응시하며 자아를 되돌아보는 거울을 발견합니다. 사실 바다 그 자체가 아니라 이슈마엘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행위가 자아성찰의 도구입니다. 이러한 자아성찰을 일깨우는 문학작품들이 의당 그러하듯이 독자는 텍스트로부터 무엇을 원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그 무엇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필경사 바틀비’가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잠재성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이슈마엘의 ‘거울’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입력하는가에 따라 무엇이 출력되는가가 결정되는 함수입니다.
들뢰즈, 아감벤, 지젝 등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텍스트로부터 고립, 소외,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산업화된 직업의 본질, 계급투쟁, 노동운동의 방식, 형제애, 정신질환, 허무주의, 구세주론 등 다양한 논의를 추출해 왔습니다만, 바틀비의 ‘이야기’ 자체가 주는 문학적 감동을 온전히 수용하려는 독자의 적극적인 태도도 요구되는 바입니다.

광기의 사무라이

이제 이전 에세이 ‘광기와 사무라이’에서 제가 살짝 언급한 아이키도에서의 ‘칼을 놓음’의 의미를 ‘필경사 바틀비’의 문맥과 연계시켜 볼까요.

앞서 언급하였듯이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선택’하는 행위는 일견 운명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로 오해될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심층적인 고찰을 시도해 보면 이 행위가 지극히 능동적이고 의미심장한 급진적 행위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사도의 상징이자 핵심 개념의 기반이 되는 ‘칼’의 특유의 사용 방식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 아이키도는 칼의 움직임의 형식만 남긴 채 ‘칼을 사용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였습니다.

칼을 놓은 이유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 선택 행위의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듯 합니다. 이는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의 행위는 서술하되 그 행위의 이유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 태도와 닮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키도는 칼의 움직임의 형식만 남긴 채 ‘칼을 사용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였습니다.

에세이 ‘광기와 사무라이’에서 저는 칼을 든 사용자가 자신이 손에 든 날카로운 도구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광기에 휩싸이게 된다는 내러티브를 언급하였지만, 이 내러티브는 아이키도 수련자가 칼을 마음에 간직하고 ‘사용하지 않는 편을 택’한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아니,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정적으로 단정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구로오비黑帶’에 등장하는 가라테 수련인들이 군도를 휘두르며 강제징용하려는 일본군에 맞서서 공격을 하지 않는 태도로 저항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일격필살의 술기를 익히고 있지만 상대에 선제공격을 하지않고 오로지 방어만으로 상황을 해결하려 합니다.
징용이라는 이름의 압제적 권력에 무도인으로서 취할 수 있는 수동적 저항의 형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한, 단순한 저항을 넘어선 초극超克의 태도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키도는 창시 초기부터 날이 선 무기를 내려놓은 형을 수련하여 공격 의사를 가진 상대의 공격/폭력적인 태도를 중화/무력화neutralisation시키는 계고稽古의 수련 방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타무도를 장기간 수련하다 아이키도의 계고에 입문하여 수련 상대에 대한 배려의 개념을 체득하지 못하신 도우들께서 가끔 칼을 든 상대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공격성을 표현해야 하는가를 물어보기도 합니다.

칼을 놓음의 선택

칼을 교재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칼의 사용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아이키도 특유의 계고 방식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습니다. 이분들도 계고 수련을 반복하면서 이런 할 일 없는 질문을 접으시게 됩니다. 거합도 수련에서 이따금 ‘칼집 안의 칼날’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만, 아이키도는 칼을 사용하지 않는 편을 택함으로써 거합의 사상을 초월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칼을 놓음의 선택은 시대와 장소의 맥락에 따라 반복적으로 해석을 요구하는 사상이 아닐까요.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 태도에 아이키도 특유의 깊은 추상성이 자리잡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사의 시대가 요원히 지난 오늘날 이 사상은 계고에 임하는 모든 수련인이 자기나름의 반복 해석을 가해야하는, 칼을 놓는 이유를 스스로 찾는 화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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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