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사무라이 – 조현일 에세이

진검승부 (사진:영화 한 장면)

일본연호 칸에이 6년(1630년 경) 9월 24일 슌부駿府의 번주인 도쿠가와 타다나가徳川忠長의 어전에서 11조의 어전시합 진검승부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시합에는 (결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합이니까) 관례에 따라 목검을 사용하는 불살의 규칙이 적용되어야 했지만, 번주의 특별한 지시에 의해 진검 사용이 결정되어 참여한 검사들은 진검승부가 허락되었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결정에 의해 역사에 길이 남을 처절한 참극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11조의 검사들 중 8조에서 일방적인 살상이 일어났고, 3조는 서로 베어 죽어버렸습니다. 악취미가 있었던 번주 도쿠가와 타다나가는 검사들의 선혈을 보다 확실히 보기 위해 일부러 시합장에 하얀 모래를 깔았으며 수증기처럼 뿌려진 피와 시체의 냄새를 들이마신 관객들은 연신 구토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처참한 사태가 벌어지자 시합이 종료되고 주최측은 보고 들은 바를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지만, 평소 타다나가의 악행에 앙심을 품고 있던 이들이 ‘칸에이 어전시합’에 관한 글을 다수 발표하고 이를 취합하여 시즈오카현 유력가문의 족보에 ‘준하대납언비기駿河大納言秘記’라는 제목으로 포함시켜 이후 세대에 공개해 버렸습니다.

준하대납언비기駿河大納言秘記

이 이야기를 소설로 옮긴 여러 작가들 중 1956년 2월에 시작하여 1962년까지 잡지에 12회에 걸쳐 연재한 난조 노리오南條範夫의 연작단편 시대소설 ‘준하성어전시합駿河城御前試合’ 덕분에 오늘날에도 이 참극의 진상이 전해지게 되었죠. 아마도 작품 ‘시구루이’를 이미 접한 분들께서는 만화와 에니메이션의 형식으로 아시겠습니다만, 사료를 기반으로 한 소설 원작이 있습니다.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나 모큐멘터리인 이상 약간의 윤색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첫번째 승부는 외팔 검사 후지키 켄노스케藤木源之助와 맹인 검사 이라코 세이겐伊良子清玄의 시합이었습니다. 후견인인 20대 여성 미에三重의 부축을 받으며 서쪽 막사에서 등장한 후지키는 왼쪽 팔꿈치 아래가 칼에 잘려나가 있었고 동쪽 막사에서 등장한 이라코는 오른쪽 다리를 절며 가로로 칼에 베인 눈동자를 가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있었습니다.

칼집에서의 발도가 불가능한 후지키는 카마에를 잡기도 전에 이미 서슬 퍼런 칼을 어깨에 매고 있었고 맹인 이라코는 발가락 사이에 칼끝을 걸고 세로로 칼을 잡는 이전엔 듣도보도 못한, 도대체 유파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두 검사 모두 잔인하기로 유명한 코간虎眼 문하의 수제자였으며 후지키는 나가레보시流星, 이라코는 무명역류無明逆流라는 비검을 구사한다는 소문이 있었기에 두 검사의 생명을 건 시합은 일찌기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이토록 이상한 형국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무영역류 검술을 전설로 소개하고 있는 일본의 만화

이 결투 시합이 벌어지기도 한참 전에 두 사람은 피바람 몰아치는 처절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도장깨기로 코간 문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제자가 되었지만, 내제자로 내정된 후지키를 시기하고 스승의 첩을 범한 이라코 세이겐. 그를 벌하기 위해 비검을 전수하겠다고 속여 나가레보시로 두 눈동자를 그어 눈을 멀게 만든 문파의 수장인 코간은 딸 미에를 남기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스승의 문파의 제자들을 모두 죽여버리기 위해 복수의 칼을 갈아 온 이라코는 결투 와중에 스승의 내제자인 후지키 켄노스케의 팔을 잘라버렸습니다.

팔 하나를 잃고 고통스러운 수술을 통해 지혈에 성공한 후지키는 또다시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라코에게 도전장을 내밀게 됩니다. 쓰러진 문파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번주인 토쿠가와 어전에서 공개적으로 복수를 진행하려는 계획이었죠. 비록 스승의 원수이기는 하나 같은 문파에서 수 년동안 검술을 함께 연마한 동료이기도 한 이라코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증오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후지키는 스승의 딸인 미에의 복수를 대신 갚는다는 대의에 충실하기 위해 검사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일 수도 있는 외팔이임에도 남은 한 팔이 인간의 한계를 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오랜동안 연마하였습니다.

이라코도 자신을 죽이고 스승의 원수를 갚으려는 후지키에게 동문 동료로 깊은 사랑을 느끼지만 문파를 부순다는 대의를 위해 후지키의 ‘나가레보시’ 검법의 약점을 연구하여 ‘무명역류’라는 기법을 창안하여 복수전을 기다리죠. 하지만 정작 공식적으로는 아버지의 복수를 기획한 딸 미에는 맹인 검사 이라코에게 첫눈에 반해 있었으니…

<그림: 일본만화 한 장면>

시합 당일 긴장된 분위기를 뚫고 등장한 두 검사는 수 년 동안 서로를 죽이기 위해 연마한 기술을 초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시전하고, 결국 무명역류를 나가레보시가 부수며 후지키는 사랑하는 문파동료의 심장에 칼끝을 꽂아 넣습니다. 기진맥진한 후지키가 스승의 복수를 완성하고 번주 도쿠가와 앞에 무릎꿇고 앉아 승리를 보고하자 번주는 후지키에게 패자의 시체의 목을 베어오라고 명합니다. 다치가 쇄골과 흉골을 완전히 잘라내어 엄청난 양의 피를 뿜어내며 백사장을 피떡으로 채운 시체의 목을 다시 잘라 오라니…

아무리 스승의 원수이자 자신의 약혼녀의 내연자이기는 하지만 수년을 도장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피땀 흘려 수련한 친우의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 바치라는 명령은 도를 넘는 무례이자 배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무라이는 주군의 명령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토를 달 수 없는 법. 힘겨운 걸음을 떼어 친우의 시체를 무릎 위에 올리고 와키자시脇差로 목뼈를 자릅니다.

후지키는 시신 훼손과 친우의 우정에 대한 배신으로 인한 역겨움에 몇 차례나 구토를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결국 죽음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의 이라코의 머리를 잘라 도쿠가와에게 바치고, 이 비정상적이고 광기어린 상황에 흥분한 번주는 흰자를 희번덕거리며 크게 웃습니다. 자신의 연인이자 아버지의 원수인 이라코의 죽음을 확인한 미에는 자신의 목에 단도를 찔러넣어 자결해 버리고, 미에의 막사에서 흘러나오는 새빨간 피를 발견한 후지키는 자괴감에 고개를 떨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영화 한장면

작품의 제목인 ‘시구루이シグルイ’는 무사도의 진수를 담고 있다는 평을 받는 ‘엽은葉隱’의 한 구절에서 차용하였다고 합니다. ‘엽은’은 일반 무사를 대상으로 쓰여진 글이라기보다는 사가현의 번주를 모시는 사무라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서인데, 특히 무사(검사)들에게 죽음을 요구하기에 앞서 죽음의 각오를 부단히 상기시킴으로써 생사를 초월한 ‘자유’의 경지에 도달하여 자신의 직분을 충분히 수행하기 위한 정신상태를 갖추도록 교육하는 경구를 모은 서적입니다.

사무라이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수치를 당하기 전에 삶을 내려 놓고 죽음을 각오하는 자세가 불가결하다는 주장이 테마가 되어 무사의 교훈과 마음가짐을 설파하는 책으로 당시에는 대부분의 번주들의 필독서였다고 합니다. 해당 문장을 들여다보면, ‘무사도武士道는 죽음을 쫓는 광기이다武士道は死に狂いである’라는 글에서 ‘시구루이’의 제목이 유래하였다고 하죠. 하지만 ‘시구루이’가 한자가 아닌 가타카나로 표기된 바, ‘시구루이’의 ‘시’를 사무라이를 의미하는 시侍로도 바꾸어 쓸 수 있으니, ‘모든 무사들은 미쳤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크레이지 사무라이 영화 한장면>

이러한 ‘시구루이’의 문맥을 ‘기관투사와 관계맺음’이라는 제목의 이전 에세이의 테마, 즉 카프의 기술철학에 기반하여 도구를 신체의 확장으로 간주하고 도구와 의식의 관계맺음과 연관하여 고찰해 봅시다. ‘기관투사와 관계맺음’에서 저는 인간의 의식이 무의식적으로 기관의 형태가 투사되어 제작된 도구와 또다른 영향을 수용하여 ‘재인식’ 혹은 ‘공진화’ 관계를 이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다른 무도와는 달리 아이키도를 예리한 날을 구사하는 ‘검(칼)’을 사용하는 몸의 움직임을 체술로 구현한 형形의 무도로 이해한다면, 아이키도야말로 카프의 무의식의 기관투사와 신체기관의 확장형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키도야말로 수많은 유파의 검술이나 현대 검도와는 달리 기관투사와 기관확장형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추상화한 진보된 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키도는 더이상 ‘칼’을 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과 지도자들께서 계고 중 시범을 보이실 때 가끔 목검을 통해 형을 설명하는 광경을 보신 도우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검은 형의 설명을 위한 교보재로 사용되고 있으며 검술 계고와 구분되는 일상적인 계고에서는 검을 쥐기보다는 순수한 체술을 연마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체술을 검술로 설명하는 아이키도

이 대목에서 어떤 분은 ‘가라테나 유도도 계고 중 검을 사용하지 않으니 무엇이 다른가’라고 의문하실 것 같습니다. 다른 점은 ‘칼을 놓는 행위’가 다분히 의식적/의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저는 아이키도의 형의 수련에서 적극적으로 ‘칼을 놓은 행위’가 신중하고도 심오한 철학적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카프의 주장과 같이 칼이 특수한 형태의 기관 투사이자 기관 확장으로 그치지 않고 의식으로의 재인식 혹은 재투사되어 초래한 결과가 ‘시구루이’에 등장하는 사무라이의 ‘광기’이기 때문입니다. 바이킹 족의 베르세르크(광전사狂戰士)도 일본의 사무라이의 ‘죽음을 쫓는 광기’가 날이 서있는 도끼와 검과 칼을 휘두르며 전사들이 얻은 살인 도구로부터의 피드백이기 때문이죠.

아이키도의 계고가 예로 시작하여 예로 종료되는 형식을 갖추게 된 배경에도 격한 수련에 수반될 수 있는 엔돌핀과 아드레날린 분비에 의한 심적인 흥분과 과도한 힘겨루기, 상대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갈수 있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배려심의 결여 등의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상기시키기 위한 제도적인 통제의 의미가 숨어 있다고 간주한다면, 아이키도의 형 그 자체가 ‘칼을 놓음’이라는 상징적이자 철학적 제스츄어를 취함으로써 보다 근원본질적인 수준에서의 ‘광기’의 통제가 내재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키도의 계고가 예로 시작하여 예로 종료되는 형식을 갖추게 된 배경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