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의 반복과 진정성이 만드는 차이 (2-2) -조현일 에세이

‘반복’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일상적인 단어이기에 얼핏 느끼기에는 진지하게 다룰 필요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자 푸코의 말을 빌자면, 20세기를 온전히 자신의 철학으로 수놓은, 그리고 제가 가장 즐겨 읽는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1968년 저서 ‘차이와 반복Difference et Repetition’에서 스피노자, 베르그송, 니체의 철학적 계보를 이어 ‘반복反復’라는 클리셰적 주제를 다시금 현대적으로 해석합니다.

들뢰즈를 선행한 철학자들의 주장의 공통점은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이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선험적이자 절대적인 원리를 부정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분명한 신의 관점에서 벗어나면 세계는 순환하고 생성하는 체계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들은 철학을 종교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부정否定’을 위한 부정의 시점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순환과 생성을 반복하는 체계로서의 자연이라는 개념을 취하고 나니 ‘동일성’, 혹은 ‘반복’이라는 주제는 필연적으로 거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체계가 영원히 순환과 생성을 이루고 있으니, 우리가 경험하는 무엇이든 모두 새롭게 생성된 것이라고 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철학적 딜레마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일상적인 경험으로는 ‘반복’이 ‘반복’되고 있는데, 형이상학적 혹은 관념적으로는 ‘반복’을 ‘반복’이라고 부를 수 없는 딜레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적 모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복’이 반복이 아니라면, 혹은 아니라고 주장하려면 도대체 어떤 개념 구조를 도입해야 하는가. 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세상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들뢰즈는 (물론 이후의 가타리와의 협업을 통해 개념적인 수정이 이루어지기는 합니다만) 자신만의 존재론을 통해 이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눈앞에 사과가 두 개 있다고 가정합시다. 철학자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예를 들고자 할 때 언제나 ‘사과’로 시작합니다. 칸트는 사과의 빨간색을 시각적 감각기가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세상에 빨간 사과만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뉴튼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만유인력을 상상하고, 스피노자는 사과나무의 사과를 보며 변화와 동일성과 인간 본성을 고찰했으며, 잡스는 자신의 상품에 커다란 사과를 그려넣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들뢰즈는 눈앞의 사과 두 개의 ‘존재’에 선행하여 이 사과들에게 사과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동일성을 제공하는 ‘사과’의 식물학/종분류학種分類學적 범주範疇에 주목합니다. 우리가 눈앞의 사과 둘을 ‘사과’라고 부르기 위해선 이러한 범주적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거죠. 사과 모양을 한 플라스틱 모형이라면 사과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입으로 베어물어 과즙을 즐길 수는 없으니 시뮬라크르일 뿐 ‘사과’라고는 부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눈앞의 사과 둘을 과실果實로서의 ‘사과’라고 정의할 때 그 자체의 존재에 선행하여 범주적 개념이 관찰자의 의식에서 다의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게 됩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전제조건이 존재의 의미와는 별개, 혹은 외부적인 맥락에 불과하며 근본적인 사물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합니다. 존재의 의미는 외부적 맥락과 규칙이 아니라 내부에서 솟아나야 한다고 말이죠. 들뢰즈 철학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 사람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되기being’의 이야기가 여기에서도 일원론적 존재의 변주라는 테마로 반복되고 있군…하고 알아채실 것입니다. 눈앞의 사과 둘은 외부적인 맥락없이 그 자체로 사과이어야 합니다. 즉 사과의 색깔이 빨강이 아니어도 썩어 문드러져도 사과이어야 한다는 거죠. 네, 눈앞의 사과는 그 자체로 사과이며 빨강이건 초록이건 상관없이 사과입니다.

백조의 깃털이 까맣다고 해도 백조는 백조인 것이죠. 블랙스완이라고 부르면 되니까요.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문제가 19세기 철학자들에게는 아주아주 골치아픈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눈앞의 두 개의 사과는 ‘같은’ 혹은 동일한 사과일까요? 사과라는 존재의 ‘반복’일까요? 존재의 반복의 문제는 개체의 정체성의 문제와는 또다른 궤에 걸려있습니다만, 들뢰즈의 말을 빌어 간단히 말하자면, 독립체로 인식되는 개체들은 사실상 무한히 확장된 복잡계에서 무한히 운동하고 재배치되는 과정의 일부라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특정 존재가 개체로 이해될 때 존재 의미는 외부에서 제공되는 범주적 관념이 아닌 개체의 ‘배치 상태’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모든 동일성과 반복은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으로 간주될 때 ‘동일하지 않지만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고 봐야하는 역설적인 태도가 불가피해집니다. 이리하여 동일성에 근거한 ‘차이’라는 개념 역시 성립 불가능이 됩니다. 다르지만 같으니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의 존재론적인 배치가 다른 것이다… 아이고, 이게 무슨 궤변이냐…라고 비난하실 독자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지금까지 고생하셨습니다. 컬럼 연재는 여기까지군요. 궤변이 낭자하여 독자의 반응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라는 이메일을 수신하는 악몽이 떠올랐습니다.)

‘4년전 사방던지기가 오늘 사방던지기와 같은 것일까?’

이 이야기를 그대로 아이키도의 수련으로 투사해 보는 시도가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4년 전 도장 입문 후 세째날에 배웠던 ‘사방던지기’가 불현듯 뇌리에 떠오릅니다만, 이 사방던지기의 행위가 어제 제가 도장에서 도우道友 김아무개님께 했던 행위와 동일한가의 문제로 환원시켜 보고 싶습니다. 엇서한손잡기에서 저의 왼손을 잡기 위해 접근하는 김아무개님의 오른손을 단단히 쥐고 시연한 사방던지기가 4년 전의 사방던지기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도장장님을 사사하면서 형식이 조금씩 바뀌어가기는 했지만 범주상으로 구분하자면 4년 전의 사방던지기와 어제의 사방던지기는 형식상의 ‘동일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4년의 시간이 흐른 이후에 발생한 행위인만큼 ‘다른’ 행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이론을 바탕으로 본다면 내재성의 평면 상의 배치가 다를 뿐 두 행위는 내재적으로 동일한 행위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들뢰즈의 존재론에 경도되어 철학을 전공하였기에 들뢰즈의 말씀을 궤변이라 치부할 수 없는 저는 이 문제를 인간의 인식틀로는 추적할 수 없는 창발적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저는 두 발로 설 수 있는 동안에는 엇서한손 사방던지기를 ‘반복’할 것이며 이 행위들은 모두 동일한 존재의미의 일원론적인 재배치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원한 반복을 생산적인 ‘차이’로 전환시키는 근원이 있습니다. 과거의 행위의 정체성과 동일성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을 겸허하게 이해하며 자신과 주변세계mitwelt가 이루어내는 관계성을 탐구하려는 ‘진정성’이야말로 모든 동일한 행위를 ‘서로 다른 행위’로 변환시키는 근원입니다.

수많은 장소에서 수많은 수련인들이 오늘도, 아니 앞으로도 수많은 시간을 들여 엇서한손 사방던지기를 시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통이 단순한 과거의 복제의 반복이라면 생명력을 잃어버린 박제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도장과 수련장의 주변 공기와 날씨, 창문 밖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 샛노랗게 떨어져 스산한 소리를 내는 은행나무 낙엽,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바닥을 까맣게 적시는 땀방울을 떨어뜨리는 도복… 이 모든 맥락과 배경과 공간이 개인적 의지와 결합한 초월적인 총체가 다름아닌 진정성일 것입니다.

칸나미가 전투기에서 내려다보는 해변의 풍경은 칸나미가 스스로를 향해 가지는 자아를 향한 의지와 진정성에 의해 무한히 변화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들뢰즈가 말하듯 동일성에 기반하는 차이가 환상이라면 내재적인 존재의미를 추출해 낼 수 있는 건 나 자신이 가지는 진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완결>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