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의 반복과 진정성이 만드는 차이 (2-1) -조현일 에세이

일본 작가 모리 히로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에니메이션 감독 오시이 마모루의 2008년작 ‘스카이크롤러The SkyCrawlers’에는 기묘한 세계관 설정과 왜곡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연대를 알 수 없는 미래의 세계는 전쟁의 불안으로부터 대중을 분리하여 민심을 안심시키고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법인이라 불리는 전쟁수행회사들이 전투를 대행하고, 이를 실황중계하여 여기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환상을 제공하는 비뚤어진 시공간입니다.

주로 전투기의 공중전과 융단폭격으로 진행되는 이 대규모 전쟁에 동원되는 전투원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키르도레Kill_dren/Kill_Doll’라 불리는 아이들입니다. 어딘가 비뚤어진 성격에 흐릿한 기억만을 담고있는 껍데기만 남은 듯한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훈련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상당한 전투기 조종 실력을 갖추고 있고 군인으로서 편리하게도 기관총을 발사하여 상대편 회사의 파일럿의 콕피트를 산산조각내는 학살행위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주박呪縛에 걸려 영원히 어린 아이의 몸으로 남은 에반게리온의 파일럿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흘러도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 자신의 신체에 실존적인 회의와 불안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같은 감독의 작품 ‘공각기동대’와 ‘패트레이버’ 등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실존과 자아의 철학적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며 작품활동을 해 온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기에 이 작품에도 실존에의 철학적 질문은 빠지지 않습니다.

‘신인류’ 공각기공대 한 장면 -(출처 구글검색)

이 이야기에서 감독이 던지는 실존의 질문은, 키르도레라는 존재가 소모품처럼 취급되는 복제인간, 그것도 이전에 사망한 파일럿을 다시 복제하여 동일한 전장에 배치하는 잔인한 부조리적 현실에 목도한 인형과 같은 아이들이 단편적인 기억의 편린片鱗을 바탕으로 잔인한 현실에서 취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서로간의 사랑의 감정, 자신의 과거에 대한 향수,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체제에 대한 환멸과 자아의 가치에 대한 심중深重한 회의의 무게에 못이겨 무너지며 자기파괴적으로 변질되는 인물도 등장하지만, 부조리를 저항적으로 수용하고 전투기의 스로틀을 잡아 당기고 기관총의 방아쇠를 누르며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외견상으로는 안주적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치열하게 투쟁하는 인물도 화면에 비추어집니다.

지난 밤의 술주정으로 쓰레기와 토사물이 산처럼 쌓여 있는 동경 신주쿠 가부키초 뒷골목의 자그마한 극장 앞에서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을 선 오타쿠들과 함께 벌벌 떨며 입장권을 받아 든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해안을 저공비행하는 주인공 칸나미가 중얼거리는 독백이었습니다.

‘언제나 바라보는 해변이지만, 언제나 똑같은 풍경이지만, 바라보는 나의 시간은 다르지 않은가. 외견으로는 똑같은 풍경이지만 다르다고 느낀다. 그것이 잘못인가.’

칸나미는 이미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자신의 삶이 이전 죽은 누군가의 삶의 반복이라는 슬프고 잔인한 현실도 받아들였습니다. 연약한 자아를 공격하는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자기파괴적인 파국의 길을 걷는 대신 칸나미는 반복되는 삶의 굴레에 대해 자신의 ‘반복’ 행동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라고 선언합니다.

체제의 억압으로 반복을 강요받고 있지만 내 자아는 ‘차이’를 생산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나’는 ‘원본과는 다른’ 나라고…

기술을 펼치는 중에도 반듯함이 좋다.

누구나 처음은 있으며, 처음에는 아주 쉽고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행위로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도장에 처음 오신 분께 가장 먼저 드리는 가르침이 다름아닌 허리를 펴고 두 발로 서는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기도 한 가난한 여주인공의 출생의 비밀과 순정, 그리고 신분상승과 복수 등의 테마는 ‘식상하고 진부’하여 곧바로 채널을 돌리게 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수십 년을 아침마다 텔레비젼 앞에 앉게 만드는 마력이기도 합니다.

전문적인 지식과 전제되는 특정 교육을 요구하지 않는,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테마이기에 이야기 속에 담긴 미묘한 감정선을 더 강조하는 장점도 있습니다. 소설과 영화에서 수없이 반복된 소재나 표현을 프랑스어로 ‘클리셰cliche’라고 합니다만, 원래는 인쇄소에서 사용하는 연판鉛板을 의미합니다. 자주 쓰는 단어를 미리 조판하여 따로 드는 수고를 덜고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한 노하우입니다. 이 의미에서 파생되어 진부한 표현이나 대체적으로 일관되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직업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내러티브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로 손꼽기도 하죠. 언제나 잘 통용되고 대중이 쉽게 소화할 수 있으며 실패할 확률이 낮은 방식이라 선호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는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이해되어 파격破格해야 하는 대상으로도 비추어집니다. 하지만 판에 박힌 듯한 진부한 모습의 이면에는 특정 장점을 공유하여 ‘본’받는 계승과 전승의 알고리즘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을 완전히 익혀야 한다’

초심자가 동일한 형을 반복 수행하는 도장의 일상적인 모습과도 닮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피카소는 ‘규칙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먼저 규칙을 완전히 익혀야 한다’며 예술작품 생산에서의 클리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습니다. 진부하고 평이한 주제에는 수많은 세월과 선조의 귀중한 노하우가 함축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죠.

반복되는 클리셰 그 자체에 대해서 한없이 긍정적인 시선을 던지기는 무리가 없지 않겠습니다만, 이러한 클리셰를, 혹은 반복적인 과정을 어떻게 하면 생산적인 ‘차이’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요?

<2부에서 계속>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윤준환 편집장
대한합기도회 사무국장 및 대한합기도회 중앙도장 도장장 2013년 러시아 월드컴벳게임즈 한국대표로 참가 세계본부도장에서 내제자 생활을 했음 ※ 중앙도장 위치 ※ - 서울시 동작구 사당로 28길 6 (3층) - 4.7호선 총신대입구(이수)역 9번출구 도보 3분거리 - 수련문의 : 02 - 3444 -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