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일회(一期一會) -조현일 에세이

사진:빅토리아 투데이 에어캐나다

다들 2년 만에 마치는 건축공부를 거의 5년 동안 우여곡절을 거치며 마감하게 된 2002년의 저는 이제 공부는 그만하고 귀국하여 무언가 사회에 기여하고 직업적으로 의미있는 과업을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아버지의 권유에 7년이 넘는 캐나다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에어캐나다에 몸을 실어야 하는가…라는 가히 존재론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서른의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고 물질적으로는 안정적일 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자의건 타의건 자국을 떠나 유목하는 디아스포라 상태를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비껴나가기 위해 혹은 당장의 차가운 의무와 당면 과제의 시한을 유예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60리터 트렁크에 짐을 싸다가 어린 시절부터 제가 어디 가든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책 ‘어린이를 위한 아인슈타인’이 손에 잡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구입한 특수상대성이론을 알기쉽게 설명하는 만화책입니다만, 삽화가 그로테스크하여 가끔 피곤을 씻기 위해 펼치곤 했었습니다.

‘거울을 들고 빛의 속도로 달리는 나를 상상해 봅시다. 난 내 얼굴을 거울 속에서 볼 수 있을까요?’ 키득거리며 ‘당연히 보이지, 이런 바보같은 이야기가 있나’라고 웃어 넘기며 책을 덮어 옷가지 속으로 던져 넣었지만, 갑자기 머릿속에서 질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습니다. 광속으로 달린다면 내가 빛의 속도를 따라잡는거 아닌가?

https://josephmuciraexclusives.com/albert-einstein/의 이미지

그날 오후 밴쿠버시립도서관의 볕이 잘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특수/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책들을 쌓아놓고 읽기 시작했죠. 학부 전공은 산업디자인, 석사 전공은 건축디자인이었기에 이론물리학과는 목성에서 천왕성만큼이나 거리가 멀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물리학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한 달 뒤엔 대학 학부의 철학과에 편입하고 물리학과에서 강의를 듣기 시작했고, 삼 년 뒤엔 양자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가 구축한 코펜하겐해석의 발상지인 코펜하겐대학에서 양자역학을 공부하기 위해 스칸디나비아행 비행기티켓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펼친 만화책 한 권이 제 삶에서 엄청나게 먼 길을 돌아가는 전회轉回의 계기를 만들어 준 셈이 되었습니다.

양자역학은 세기의 마지막 해인 1900년 12월 14일 독일 이론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의 에너지가 플랑크상수라는 특정 상수와 진동수의 곱의 정수배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에너지의 준위가 불연속적이라는 단순한 발견이지만 기존의 물리학적 상식을 전복시키는 무시무시한 시발점이었습니다.

코펜하겐 대학

이 발견을 바탕으로 다양한 방향으로 이론이 진화하여 만물은 파동이자 입자로 동시에 존재하며 다양한 확률통계적 상태에서 관찰자가 개입하는 순간 파동이 붕괴하고 하나의 확정적 상태로 고정된다는 코펜하겐해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비록 만화책의 주인공인 아인슈타인은 죽는 순간까지 보어의 코펜하겐해석을 믿지 못했지만, 초기 양자역학의 태동기와 구축기를 거치며 지배적인 해석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보어의 후계자들이었던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는 이 해석을 정밀한 수학으로 정식화하여 드디어 예측도구로서의 양자역학이 상대성이론과 더불어 물리학계의 양대산맥으로 우뚝 솟아오르게 되었습니다. 관측자가 대상을 관측하는 순간 파동함수 붕괴로 불확정적이던 대상이 단일 상태로 고정된다는 코펜하겐해석을 확장하면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입자가 붕괴되면 스위치가 작동하여 독을 주입하는 기계와 연결된 불투명한 상자 속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확률적으로 절반은 살아있고 절반은 죽어버린, 즉 죽어있으면서도 살아있는 고양이가 됩니다. 말도 안되는, 아니 그 전에 잔인무도한 이 역설은 양자역학의 원칙을 적용하면 역설이 아닌 사실입니다. 이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물리학자 에버릿 3세는 박사학위논문에서 다중우주론(평행우주)을 제안합니다.

BBC SCIENCE

양자계에서 행위의 결과 혹은 사건의 발생에 따라 우주는 선택지가 서로 다른 우주로 갈라진다는 가설입니다. 상자를 여는 순간 고양이가 살아있는 우주와 죽어있는 우주로 가지치기를 한다는 거죠. 이렇게 발생된 다수의 우주는 서로 공존하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가지치기는 연쇄반응처럼 계속적으로 발생하여 세상에는 무한은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많은 우주들로 끓어오릅니다.

이 우주들은 서로간의 파동함수가 달라 ‘결이 어긋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결이 어긋난 우주들과 공존하고 있는걸까요?

우리의 시공간은, 에버릿의 말을 믿는다면, 존재가능한, 존재가능했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우주와 수많은 ‘나’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지만 결이 다른 ‘우리’는 서로 존재를 확인하거나 커뮤니케이션을 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현실성도 없고 직관과도 어긋나 있는 헛된 공상이라구요?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의 현대물리학이 양자역학의 역설에 내놓은 가장 그럴듯한 답입니다.

일기일회

이전에 다니던 일본어학원의 첫 수업에 선생님께서 흑판에 적어주신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중국 진晉의 원언백의 ‘만년에 단 한번, 천년에 단 한차례뿐인 귀한 만남’이라는 의미의 ‘만세일기 천재일회萬歲一期 千載一會’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기회이며, 모든 만남도 생애 단 한 번의 만남과 인연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차도에서는 차를 대접하는 주인과 손님 모두가 정성을 다해 그 자리에 임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어나갑니다. 우려낸 차가 오직 그 당시의 단 한 번의 맛과 향과 색을 가진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여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무상의 바다에 부유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덧없음 속에 찰나의 현상과 존재의 광휘는 엄연히 존재하며, 무상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역설적인 가르침으로 이어지죠. 법정의 말씀을 옮기자면, ‘앞으로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다면, 범속해지기 쉽지만, 이것이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렇게나 스치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양자역학의 다중/평행우주도 한 사건의 발생과 선택으로 일단 가지치기(분지分枝)가 일어나면 파동함수가 상이하여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존재하는 우주의 가치는 덧없기도 하지만 무한히 소중한 가치를 가지며, 내가 선택과 결정을 통해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우주도 아무 가치가 없기도 하지만 더없이 중요한 세계이기도 할 것입니다.

조우遭遇

매주 정해진 시간에 만나 일상적으로 수련을 하는 그 상대도, 엇서 한손을 잡아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그 상대도,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나를 던져주시는 선생님의 얼굴도, 양자역학의 파동함수붕괴와 일기일회의 원칙에 의해 지금 이 곳에는 존재하지만, 곧바로 붕괴하여 다시는 보지도 느끼지도 만나지도 못할 조우遭遇이자 기회였습니다.

지금 이 곳에서 선택을 하거나 선택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거나 상관없이 시공간은 양자분지를 일으키고 있으며, 시간의 화살은 우리 우주의 물리법칙이 완전히 역전되지 않는 한 미래를 향해서만 날아갈 것입니다. 그 무한한 가치를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리는 모래처럼 헛되이 버리기엔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아름다움과 가여움과 즐거움과 슬픔이 공존하고 있지 않은가요.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