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沒入과 안티프래질antifragile

아이키도 여성연무

우리는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자신의 잠재성을 최대한 발휘하고 결과를 성취하고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요?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였듯이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에 정말로 원하지 않는 상황에 놓인다면 일 분이 한 시간처럼 시간이 물리적 규칙을 거슬러 천천히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손을 맞잡고 달빛이 그윽한 서로의 눈동자와 술잔에 매혹되어 버린다면 현실 감각을 잊고 영원의 미로에 갇히게 되죠.

오늘같이 섭씨 35도로 육박하는 온도계의 수은주를 바라보고 있자면 시계 초침이 한 눈금 건너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인간의 수명이야 하늘이 부여한 시간만큼이니 이 길고도 짧은 삶의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최고의 퍼포먼스를 도출하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긍정심리학

계고에 임하는 도우들도 주어진 수련 시간 동안 최대한 집중하여 지도자로부터 최대한의 가르침을 흡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지 않은 분이 계시겠습니까. 어렴풋이 생각해본다면 가능한한 지도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아 반복을 통해 몸에 각인하는 과정에 충실하는 접근방식 외에 무엇이 있을까 예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특정 조건에서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결과를 성취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분과를 ‘긍정심리학’이라 부릅니다.

행복과 창조성, 즐거움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임상통계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이며, 헝가리 출신의 미국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zszentmihalyi가 이 분야의 선구적인 권위자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도 ‘미하이’라는 이가 있는데, 아마도 헝가리에는 ‘미하이’라는 이름이 흔한가 봅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예술가, 음악가, 외과의, 사업가, 운동선수 등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인터뷰하여 그들의 성공사례에서 특정조건에서의 잠재능력 발굴과 최고의 결과성취의 노하우를 채집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잠재능력발굴과 결과성취에 임하였지만, 흥미롭게도 공통적인 단어로 그들만의 방법론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흐름flow’이라 불리는 개인 특유의 태도나 의식ritual을 통해 최대 집중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었죠. 칙센트미하이는 이들 전문가들의 용어를 도입하여 이후에 ‘몰입 이론’으로 알려진 가설을 정립합니다.

몰입

칙센트미하이는 개인이 절대적 몰입 상태로 돌입하면 몇 가지 특징적인 징후를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몰입에 빠진 이들은 과정의 모든 단계에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몰입 상태의 주체는 언제나 과제에 대한 목표의식이 뚜렷합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피드백이 즉각적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과제를 어느 정도 높은 수준으로 성취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를 자기 스스로 내릴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 수준에 맞는 과제에 대한 적정 수준의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자각합니다.

과제가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아 지루하거나 고통스러워 도망치고 싶지도 않지만 도전 과제로서 충분히 부하가 걸리고 있는 절묘한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의식은 행위에 집중되어 몸과 마음이 융합되어 있는 통일감을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들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사건이나 고민과 같이 자신의 눈 앞에 놓인 도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위에 대한 집중을 무너뜨리는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단 몰입 상태에 들어가면 집중과 능력이 조화를 이루어 실패에 대한 불안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막연한 불안angst이 엄습하면 몰입은 즉각적으로 중단되고 조절감각은 상실됩니다. 몰입에 빠진 이들은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빠져 타인의 평가를 무시하며 오직 행위 자체에만 몰두하며, 시간 감각이 심하게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도의 집중으로 상대의 움직임이 슬로모션으로 보인다거나 방금 시작한 듯한 계고가 순식간에 종료되어 버리는 경험이 다름아닌 몰입에 의한 시간 왜곡 감각일 것입니다. 또한 몰입 자체가 활동의 목적이 되어 몰입 체험에서 오는 충족감을 자체적인 만족으로 즐기게 됩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몰입의 황홀을 체험할 수 있으려면 과제의 난이도와 능력의 수준과 개인 기량이 고도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인적 기량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수준의 과제에 도전하게 되는 조건에서 외부의 방해에 초연하며 몰입 상태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처음부터 뛰어난 기량을 몸에 지니고 태어나는 건 아니니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불안’ 영역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불안과 경제적 격차에서 기인하는 불안,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계고(稽古)

계고에 임하면서도 자신의 기량에 대한 불안과 도우로부터의 압박감peer pressure, 그리고 지도자로부터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시시각각 엄습해오며 스스로를 불안감의 악순환에 가두는 개미지옥을 경험하시는 도우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형체를 가지지 않는 불안은 경험이 축적되면서 개인적 기량이 향상되어 ‘각성覺醒’의 단계로 전이됩니다.

각성의 단계에서 자의식의 상실과 기술의 습득이 이루어지면 드디어 ‘몰입’에 의한 자신감과 만족감의 성취 영역으로 옮아갑니다. 그러나 칙센트미하이는 일단 만족과 성취가 이루어지면 주체는 ‘안정’ 영역에서 안주하려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안정 영역에서는 더이상의 몰입은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개인의 성장도 멈추어 버립니다.

자신의 능력과 과제의 난이도는 역동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다시 몰입에 빠지기 위해서는 능력과 과제의 관계성을 능동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 스스로를 의도적으로 ‘불안’ 영역에 빠뜨리지 않으면 불안-각성-몰입-성취에 이르는 사이클을 다시 경험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몰입은 행복과 만족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스스로 불안 상태에 빠뜨리는 용기있는 노력이 없다면 안정 상태에서 ‘무기력의 영역’에 빠지고 맙니다. 검술 수련에서 ‘수파리’의 순환과정이 필요하듯 아이키도에서의 수련에도 스스로의 기량에 대한 불안과 각성, 몰입에 의한 안정에 이어 무기력에 빠지기 전에 다시 불안의 영역으로 회귀하는 순환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일단 안정 영역에서 스스로를 불안의 영역으로 회귀시켜 스스로를 ‘취약’에 노출시키는 상황이 과연 건전한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까요?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행위가 발전을 위한 과정이라고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사진출처:밑미meet me 토크 페이지, 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

레바논 출신의 인식론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이 행위가 오히려 기량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탈레브는 스스로를 취약한 상태에 떨어뜨리고 혼란과 압력에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행위가 오히려 성과를 상승하는 첩경이라고 주장하며 이 특성을 신조어 ‘안티프래질antifragile’로 명명하였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반-취약성’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어떠한 시스템이 외부의 혼란과 압력에 의해 곧바로 붕괴되는 성질을 ‘취약脆弱’이라 부릅니다만, 탈레브는 이러한 혼란과 압력이 오히려 시스템의 내구력이나 강건성을 초월하여 충격을 견디고 현상現狀을 유지하고 항상성恒常性을 향상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직관에서 어긋나 있는 듯한 탈레브의 주장은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역사와 경제 체제에 대한 오랜 연구의 결과입니다.

진화, 문화, 사상, 혁명, 정치, 기술 혁신, 경제 번영, 기업 생존, 도시의 발달과 융성, 사회와 법 체제, 적도의 열대 우림, 세균에 대한 신체의 내성 등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해온 다양한 체제의 안티프래질 사례를 연구한 탈레브는 지구상의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존재도 역시 안티프래질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탈레브는 이 주장을 사실 인간 뿐만아니라 유기적인 존재 전반, 심지어 복잡한 상호작용을 가지는 모든 체제가 안티프래질을 갖추고 있다는 일반론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인간의 신체는 절식絶食이나 적당한 부하負荷의 운동을 통해 오히려 건강해지기도 하죠. 탈레브는 ‘안티프래질’에 선행하는 연구에서 ‘블랙스완’ 문제를 심도있게 다룬 바 있습니다.

‘블랙스완’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서식하는 검은 백조로서, 중대하고 희소한 리스크를 계산하고 예측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경제이론입니다. 수많은 경제학자와 사회학자들이 특정 시스템의 리스크를 측정하는 알고리즘을 고안하고 심지어 노벨상을 거머쥐기도 했습니다만, 탈레브는 대담하게도 이들이 측정하고 예측하는 데이터는 모두 ‘취약성’일 뿐 리스크 그 자체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미육군의 교범에 등장하는 국제 정세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한 ‘VUCA’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n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의 이니셜을 모아 단순하지 않고 명확하지 않은 시스템을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환기시키는 개념입니다. 탈레브는 변동적이고 불확실하며 복잡하고 모호한 체제에 대한 예측은 불가능하지만 취약성과 안티프래질은 정량화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도장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

이 개념을 확장해 보면 얼핏보면 취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티프래질한 시스템을 구별하는 혜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전거와 자동차를 비교해 볼까요? 체인이 빠지지만 않는다면 (사실 빈번히 고장나는 부품이기는 하지만 쉽게 고칠 수 있는 부품이기도 하죠) 연료를 공급해야 하고 배터리를 충전해야 하고 복잡한 운용기술을 익혀야 하는 첨단기술의 보고인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안티프래질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때는 두 시스템의 취약성을 비교하기 어렵지만 유가파동이나 배터리 방전과 같은 파국이 일어나면 자전거가 압도적으로 우월한 시스템이라는 거죠. 탈레브는 시스템의 안티프래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실패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트레스가 적어 파국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일수록 체제는 취약해지기에 언제나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부하를 일정하게 걸어 놓아야 합니다.

너무 높은 빈도가 아니라면 실패가 학습을 독려하며 창조성과 잠재성을 끌어내는 순기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도장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신체에 적당한 수준의 부하를 걸어 스스로의 잠재성을 찾아내려는 목적을 가진 이도 계시겠죠. 신체 활동을 통한 몰입으로 과제 목표의 성취를 통한 만족을 얻기 위해서 수련이 임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나아가 사회 생활에서 경험하기 힘든 실패를 계고를 통해 시뮬레이션하고 자신의 안티프래질을 향상시키려는 건전한 목표를 가지신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유래없는 폭염이 예고되어 있는 올해, 더우기 코로나 시국이 겹쳐 있는 힘든 여름날, 도장 매트위에 발을 얻는 우리는 계고를 통한 마음과 정신의 안티프래질을 약속받았다고 믿습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