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골反骨

영화 ‘남쪽으로 튀어’

‘아버지는 멀리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무슨 남쪽 섬이랍니다. 바닷가 언덕바지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수확의 계절이 될 때쯤에 가족을 데리러 온다고 하셨습니다.’ 국민연금을 수금하기 위해 찾아온 구청 공무원을 상대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의 주인공 화자 ‘지로’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집에 없으니 국민연금 수금을 포기하고 돌아가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을 마친 공무원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습니다.

아들을 시켜 귀찮은 일을 회피하려는, 국민의 의무를 유기하려는 국민은 공무원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의 인간입니다. 국민연금 납부는 국민의 의무라며 맞서는 구청 직원에 대해 아버지는 ‘국민의 의무’가 무엇인지 ‘전개展開’하라고 맞받아칩니다. 논리적 증거를 펼쳐내어 설득해 보라는 도전입니다. 국민연금은 법률로 정해진 연금제도라고 반박하는 공무원. 아버지는 ‘법률은 누가 정했는가’라는 궤변詭辯으로 맞받아칩니다. 자신이 만든 법률이 아니니 인정할 수 없을 뿐아니라 준수할 의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연금이 언젠가 무너질 거라는 지적을 당한 공무원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시대에 맞추어 그때그때 궤도를 수정하면서 틀림없이 이어나갈 제도입니다. (…) 경제기반이 분명히 확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운영되는 이상 연금제도가 무너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건, 말하자면 한 나라의 체면이 걸린, 가장 밑바탕이 되는 부분입니다. (…) 연금제도가 파기된다면 그거야말로 최대의 배신행위지요. 우선 첫째로, 정부가 그런 일은 용납하지 않습니다.’라며 맞섭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은퇴자의 생활을 도와주는 선진사회의 기본적인 상호보장제도인데 이를 거부하다니. 공무원은 아버지의 머릿속에 오래전 자리잡은 비뚤어진 사상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겠다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구청 공무원을 향해 던지는 일갈. ‘나는 국민을 관두겠어. 일본국민이기를 관두겠다고. 애초에 원하던 일도 아니었으니까. (…) 일본 사람이 반드시 일본 국민이어야 할 이유는 없어.’

지로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본 정부에 반대하는 운동권 학생이었고 불혹이 넘은 지금도 활동가입니다. 활동 무대가 방구석이어서 아쉽습니다만…  아버지는 일본사람이지만 국가라는 공동체에는 참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특정 공동체에 대한 참가는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선택의 여지도 없이 국민으로서 의무와 권리가 발생하는 상황이 맘에 안듭니다. 무언가를 억지로 해야 하는 상태 자체가 지배를 받는 상태라고 간주합니다.

사람은 지배당하기 위해 태어나는가…라는 근원본질적인 철학적 의문을 던지는데, 소설 속에서는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국민연금 고지서를 던지고 돌아서는 구청 직원의 뒷모습으로 마무리가 되며 코믹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이지만, 19세기의 프랑스의 사회사상가들과 미국의 사회혁명가들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질문이었습니다.

지로의 아버지와 같이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며 모든 권력을 부정하는 태도를 무정부주의, 혹은 아나키즘이라 부릅니다. 왕정이 막을 내리고 강력한 정부와 그에 따른 국가의 권력이 구체화되던 유럽과 느슨한 연방자치제에서 중앙정부 중심의 합중국으로 다시 태어나는 미국이 권력체제를 정비하던 그 당시의 사회철학자들에게는 체제의 권력에 시민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초미焦眉의 관심사였습니다.

절대왕정의 절대권력이 사라진 지점에 왕정을 대신하여 사회계약에 의한 정부 체제가 억압적인 권력행사를 하는 상황은 권력자와 피지배자 양측에게 지극히 생소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정을 반대하던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무너진 지배권력의 자리를 다른 체제가 대치하는 형국이라 이해하여 목숨을 걸고 저항하였으며, 연방자치를 꿈꾸던 미국의 혁명가들은 중앙권력의 비대한 성장에 ‘사회계약’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왕정 이후 중앙정부에의 권력 집중이라는 세계 정치의 커다란 흐름에 거스르는 이들은 모든 권력을 무조건 거부하는 아나키즘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우리말로는 ‘반골’이죠.

(출처 나무위키)위연석소상

삼국연의에 등장하는 위연은 뒤통수가 현저히 튀어나온 특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민중 봉기를 일으켜 촉의 관리 한현을 살해하고 유비에게 투항합니다. 포박된 위연을 두고 제갈량은 ‘촉의 녹을 먹으면서 주인을 베었으니 불충합니다. 또한 골상을 보아하니 뒤통수에 반골反骨이 있어, 나중에 배반을 할 것이 분명하니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처형을 해야 합니다’라며 즉결처분을 건의합니다. 하지만 위연의 능력을 높이 산 유비는 위연의 죄를 사해 줍니다.

독선적이고 고집이 세며 권력과 명령에 반하는 사람을 ‘반골’이라고 부르는 유래입니다. 예전에는 역적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했지만 오늘날에는 권위에 저항하는 이성적인 논거를 가지고 불복종하는 중립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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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젊은 시절 공부했던 (건축)철학과 중년에 접어들며 공부한 물리학을 주제로 몇 권의 책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만, 책을 만들어 서점에 보낼 때마다 지인들에게 흔히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돈은 되겠어?’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자기만족이 아니라면, 금전적 대가를 수령하는 일은 프로페셔널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직간접)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유하여 그 결과물을 문자언어로 정리하는 노동은 단순히 금전적인 가치를 따지기에는 해당 차원을 초월하는 고귀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만드는 작업이 돈이 되는가를 묻는 질문자의 머릿속에는 고도의 자본 중심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실정’이 그 기저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서양의 이데올로기의 침습에 취약하였던 우리나라 사상계의 치부가 드러나는 수용적인 역사적 특성도 간과할 수 없죠.

한국 사회에 팽배한, 우리가 만들어내지는 않았지만, 우리 혹은 이전 세대가 선택해버린 고도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사실은 사회 체제가 아니라 단순히 경제 구성 방식이지만) 이미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고도자본중심사회의 시민이라는 위상을 굴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반자본주의적인 가치가 우리의 행복을 담당하고 있다는 희망의 가느다란 줄기를 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언어적인 추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도장에서의 수련

베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르른 소나무의 담대한 가지에 앉아 아침마다 지저귀는 까치의 노랫소리, 거실 구석의 참나무 울림통 위에 놓여 가끔 태엽을 감아주면 라 캄파넬라를 처음에는 빠른 템포로, 약 5분이 지나면 느린 속도로 연주하는 오르골의 음악소리, 서재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화분 속의 블루베리나무와 연한 초록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이파리를 가진 레몬나무의 푸르른 잎맥, 자정 넘어 구름이 걷히고 초신성폭발처럼 밝게 빛나는 금성의 아른거리는 광점, 터너의 수채화처럼 강건한 경계를 뽐내며 힘차게 솟아 오르는 비온 후의 구름, 보름달에 선명히 새겨진 크레이터의 웅장함 등 돈이 안되는 추상적 가치가 우리의 행복을 결정하는 비급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장은 이러한 지배적인 권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고도자본주의가 이미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유와 언어를 다루는 정신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저는 비언어적인 추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도장에서의 수련이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지만 일상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푸코적 지배권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량입니다. 조금 슬프긴 하지만 이 작은 저항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통제 사회에서 유일하게 만끽할 수 있는 반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반골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