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승총과 선택적 역행(3-2)-조현일 에세이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한 장면

일본은 대략 서기 8세기부터 문명 발전을 시작하여 이후 850년 간 유럽의 영향력 밖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음에도 사회 발전의 노선은 비슷하여, 무장한 기사, 즉 사무라이가 권력을 누리는 봉건사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유럽의 성당기사단이나 봉건기사제와 비슷하게도 유교와 불교, 전통 종교가 혼합된 복잡다단한 신권체계와 호전적인 전통을 따라 무도를 숭상하는 계급이 미묘한 권력균형을 유지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일본을 ‘지팡그’라 불렀는데, 이는 길에 황금이 굴러다니는 신천지를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이 말이 오늘날의 ‘재팬’의 어원이 되었죠.

1543년 9월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아쿼버스를 수입한 다네가시마 토키다카, 이후 대장장이에게 맡겨 제작하게 했다.

일본은 무역업과 중간재 생산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전쟁이 오랜기간 지속된 전국시대에도 상업은 융성했었습니다. 하지만 15세기에도 아직 화약 기반의 개인화기를 전투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지는 않았더랬습니다. 일본에 총이 도착한 것은 1543년으로 항구에 닻을 내린 유럽 상선에서 선물로 받은 아쿼버스가 처음이었죠. 호기심이 많은 일본인들은 아쿼버스를 즉각적으로 도입했고 이후 100년 동안 전국의 수많은 다이묘들이 군 편제에 아쿼버스를 배치하게 됩니다.

유럽인들이 일본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일본은 수백 개의 반독립적인 번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의 행정편제를 이해하지 못한 유럽 상인들은 번의 통치자인 다이묘를 ‘왕’으로 묘사하였습니다만, 법적인 편제상으로는 다이묘들은 모두 교토에 거주하는 천황의 정치 편제에 종속되어 있는 계급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기 이전의 천황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일 뿐 실제적인 통치를 하지는 않았기에, 인민을 다스리고 군에 동원하는 역할은 다이묘가 맡고 있었죠. 이렇게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정치군사적으로는 혼전의 상황에서 몇몇 실력자들이 일본을 점진적으로 통일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먼저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의 기틀을 만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단 통일을 이루었으며 1600년에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867년까지의 긴 세월을 통일이 유지된 안정적인 상황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에 아쿼버스가 도입된 1543년 이후 1600년까지의 일본은 매일매일 전투가 이어지는 전쟁상황이었고 권력투쟁의 도가니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명의 다이묘들이 나라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쇼군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지역의 군사/경제적 통치자가 되기 위해 결사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오랜 전쟁 경험으로 신무기를 먼저 손에 넣는 쪽이 정권찬탈에 유리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통일사업을 시작한 오다 노부나가가 화승총의 도입을 통해 대승을 이룬 나가시노 전투에서 1만60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이후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화약무기는 일본에서 전성기를 구가하였습니다. 사무라이로서 칼을 다루는 훈련이야 평생의 과제이니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나가시노 전투 이후 대부분의 병사들은 화약무기에 대한 숙련을 요구받았습니다. 하지만 개인화기의 유용성과는 관계 없이 일반 사무라이들의 화약무기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던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반감은 대량살상이 가능한 효율적인 화약무기가 정작 개인화기를 사용하는 사무라이 자신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 이전에 일본에서 치러졌던 일반적인 전투는 다수의 일대일 결투와 소규모 혼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무라이들은 총병이 아닌 한 대열에서 앞서 나와 서로에게 자신을 소개한 뒤 짝을 지어 죽을 때까지 칼을 맞대는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전투는 참전한 사람이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었고 또다시 맞닥뜨리게 된다면 보다 향상된 기술로 싸움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자아낼 수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살아남는다면 혹은 상대를 베었다면 그 상대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도 있었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영웅담이 만들어지고 죽인 상대에 대한 존경심도 싹트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무라이의 도덕률로 자리를 잡습니다. 각 개인의 생사의 운명은 개인이 전투에 임하기 전에 얼마나 순수하게 능력을 갈고 닦는 훈련과 단련을 하였는가 혹은 얼마나 정신적인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좌우되었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에 따라 개인의 도덕의 수준을 평가하거나 나아가 칭송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죠.

여기에 전투의 도구, 즉 칼과 방호구의 실용적 가치와 영웅적인 삶과 죽음을 위한 미적 가치가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1560년 예수회 신부가 시가현의 이시야마의 불교사원에서 일본도를 경험한 일을 글로 남겼는데, ‘예리한 나이프로 연한 소고기를 써는 것만큼이나 쉽게 스페인 병사의 철제 갑옷을 날카롭게 잘랐다’고 말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에 일본은 세계 최고의 무기수출국이었습니다.

태도(太刀)

1483년 중국에만 6만 7천 자루의 칼이 수출되었으며, 일본을 방문한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Francesco Carletti는 1597년 일본은 ‘공격용이든 방어용이든 (유럽을 능가하는) 온갖 종류의 무기를 갖추고 있으며,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풍부한 양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피력할 정도였으니까요.무기수출로 축적된 부는 인구증가에도 반영되어, 당시 프랑스는 1600만, 에스파니아는 700만, 영국은 450만, 미국은 100만 정도의 인구였던 데 반해 일본의 인구는 2500만을 넘고 있었죠. 하지만 이런 무기생산은 주로 칼과 호구에 집중되어 있었을 뿐 어느 문헌에도 화승총의 생산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화승총병이 투입되는 집단전투에서는 앞서 언급한 장수들이 일선에 나와 서로 소속과 성명을 교환하고 명예롭게 싸울 것을 맹세하는 과정은 생략되었습니다. 전진하는 파이커들을 매복한 아쿼버스병들이 초토화시켰듯이, 숲속에 매복해 있다가 진군하는 병사들을 향해 이루어지는 기습적인 일제 사격은 사무라이와 일반 병사들의 계급과 신분 고위를 막론하고 무차별하게 살육합니다. 화승총이 예상되는 전투에서 칼만 차고 달려나가는 건 누가 보아도 자살행위였습니다. 용기있는 행위이긴 하지만 무의미하게 개죽음을 할 뿐이라는 상식이 팽배해 있었죠. 하지만 개죽음을 피하겠다고 화승총병이 된다면 그 사무라이는 자신의 기술적 탁월함을 자랑할 기회를 상실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한 장면

물론 화승총을 다루기 위해서는 약간의 훈련이 필요했겠지만, 평생 칼을 휘둘러 연마해야 하는 기술과는 차원이 다른 간단한 기술이었습니다. 테크놀로지가 명예와 역량발휘의 기회를 박탈한 셈입니다. 기술의 연마의 책임은 사무라이가 아니라 무기제작자에게로 이전되었고, 현장에서 혈투를 벌이는 사무라이로부터 일제사격을 준비하는 전략가 한 사람에게로 이전되었습니다. 정식으로 고용되지 못하고 산적질을 하던 천민도 화승총을 들면 수십 년을 연마한 사무라이의 갑옷을 관통시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었죠. 평상시에 농업을 겸직하다가 전쟁시 고용되는 향사鄕侍나 산적질을 하다가 가끔 용병으로 고용되는 지시地侍와 같은 계층도 고위 사무라이들과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16세기를 통틀어 일본의 어느 귀족도 총병부대를 갖추지 않은 다이묘가 없었지만 무사 계급은 절대 총을 잡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화승총을 전군에 보편적으로 도입하였다는 역사적 증거는 조선정벌, 우리에게는 가슴아픈 임진왜란의 기록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과 중국, 그리고 필리핀을 정복하려는 야망을 가졌던 히데요시는 지정학적인 조건으로 볼 때 조선정벌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필리핀은 이미 에스파니아 군대가 주둔해 있었지만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아 쉽게 침략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모든 전략자산을 조선 출병에 쏟아 붓습니다.

조선으로 떠난 사무라이들은 전통에 따라 두 자루의 칼을 차고 활과 창을 어깨와 말에 매달고 있었지만 화승총은 기본 무장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농민 출신의 대부분의 일반 보병들을 화승총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16만의 침략군 중 4만이 화승총병이었는데, 병참과 다른 잡다한 기능의 병사들의 수를 감안할 때 4만은 전투병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습니다. 침략에 대한 방비가 충분치 않았던 조선군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는데 부산에 상륙한 선두군이 수도 한양을 점령하기까지 18일이 걸렸다니 진군속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죽지세에는 전적으로 화승총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입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의 화승총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조선은 화승총의 전투방식이 맘에 들지도 않았고 전통적인 활의 운용이 훨씬 실용적이고 빠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는 우리 선조의 기술 도입이 게을렀다며 비난하기도 하지만 저는 화승총의 무자비함과 무차별적인 살육이 당시의 조선 지배층이 가지고 있던 유교적인 가치관과는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해 봅니다. 저의 의심은 조선과의 강화로 평화를 회복한 일본이 유럽과는 달리 총기에서 손을 떼고 과거로 회귀한 역사적 사실에서 확신이 되었습니다.

역사학자 노엘 페린Noel Perrin은 저서 ‘총을 버리다'(김영진 역/ 서해문집/ 2022)에서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화승총을 버리는 과정을 기술합니다. 화승총 덕분에 조선정벌을 쉽게 이룰 수 있었던 선두부대는 곧이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하고 개량한 화승총을 들고 전장에 나타난 조선군의 치열한 저항에 부딪칩니다. 수월한 전쟁을 하고 있던 사무라이의 자부심이 화승총을 들고 나타난 저항군에게 무너지자 자신들의 전투 역량이 칼과 방호구가 아닌 화승총에 의한 승리였음을 자각하고 자괴감에 빠져버린 것이죠. 조선출병에서 돌아온 사무라이들은 그때부터 화승총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사무라이의 모든 무장은 칼과 호구로 집중되고 화승총의 개발은 뒷전으로 빠집니다. 어째서 사무라이 계급은 국내외의 수많은 전투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던 화승총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페린은 일본의 사무라이가 화약무기를 버리게 된 다섯 가지 이유를 텍스트에서 나열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 중 몇 가지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먼저 화약무기는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사무라이들을 위시한 지배층의 자각이었습니다.

전국시대와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의 무사 계급은 전체 인구의 10%를 넘어 당시의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도 비대했습니다. 사실은 인구 센서스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전국시대의 인구 대비 직업군의 정밀한 비율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1590년부터의 인구조사에도 무사 계급의 인구비율을 알 수는 없습니다.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의무를 가지지 않던 사무라이들이 통계에 포함되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통계 조사를 비껴나갔기에 조사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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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세기 후반 봉건 시대 말기에 와서는 드디어 강제적인 인구조사로 무사계급의 비율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128만 2천 명의 상위 사무라이와 49만 2천 명의 하위 사무라이가 통계에 잡혔으며, 첫번째 인구 조사부터 1870년경까지 내내 사무라이 이외 계급의 인구가 상당히 안정적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사무라이 인구 비율도 크게 변하지 않았으리라는 전제로 1597년 겨울 당시 무사 계급 인구는 거의 2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는 전체 인구의 8%인데, 유럽 어느 국가에서도 전사 계급이 전체 인구의 1%를 넘은 적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일본의 무사는 특권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특권계급이 화약무기에 대한 반감을 가지자 화승총 사용금지에 대한 컨센서스를 정책에 반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페린이 지적하는 또다른 이유는 일본 무사들이 칼이라는 대상에 상당히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회적 위계의 상징인 칼을 버리고 총병으로 신분을 바꾼다는 것은 자부심 강한 무사에게 크나큰 상실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칼은 단순히 무기를 넘어서 명예를 드러내는 가시적 형상이었던 바, 무사 개개인의 혼이 담겨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유럽에서도 기사 임명식에서 기사가 젊은 검사의 어깨를 자신의 검으로 때려 기사로 임명하였죠. 사무라이에게 칼은 명예의 현신現身이자 복식服飾과 성장盛裝의 구성품이었으니, 신사가 모자를 쓰지 않고는 외출을 할 수 없듯이 사무라이는 칼을 차지 않고서는 자신의 신분을 표현할 길이 없었던 거죠. 유럽의 귀족들이 문장이 새겨진 값비싼 보석 반지와 목걸이를 착용하였듯이 사무라이의 칼의 손잡이와 코등이에는 가문의 상징이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아미 코에츠: 혼아미 코지의 아들로 미술 공예 부문에 금자탑을 쌓은 예술가다. 오사카 전투에서의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의 죽음, 전후() 오사카 잔당 색출과 히데요리의 아들 쿠니마츠의 처형 등에 분노하여 목숨을 걸고 이에야스를 찾아가 자신의 불만을 토로한다. 아녀자를 죽임으로써 얻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고 이에야스를 힐문하지만 정작 이 생각은 이에야스의 그것과 같았다. 이에야스는 코에츠에게 타카가미네의 광대한 토지를 하사하고, 그곳에 예술가 마을을 세우도록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수천 년 동안 소작 농민과 상인들은 칼을 구입할 돈이 있어도 칼의 패용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연구하는 보학연구자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데요시가 국가 공인 도검 감정인으로 혼아미 코에츠를 임명한 이후로 이 가문에서는 전투용 칼을 통해 가계를 구별하고 그 소유권을 통해 여러 가문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1970년대까지도 일본 문부성은 사무라이의 칼을 국보 예술품과 문화유산으로 구분하는 일을 코에츠 가문에 위임한 바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미학적인 동기에 있습니다. 이는 칼 자체가 아니라 칼을 사용하는 주체의 몸의 움직임의 아름다움에 대한 탐미적 태도에서 기인합니다. 칼을 가진 자의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 어떻게 앉아야 하는지, 어떻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규칙들은 사무라이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의 일부였으며, 다도와 마찬가지로 신체의 의지와 우아한 몸놀림과 힘의 집중을 칼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화승총과 선택적 역행(3-3)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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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