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투사와 관계맺음(2-1) – 조현일 에세이

무도여행

수 년 전 코로나 팬데믹이 세상을 이토록 어지럽히기 이전에는 비자도 필요없이, 그냥 마음이 내키면 홀연히 떠날 수 있는 이웃나라가 있었습니다. 저녁에 배를 타면 2시간이면 완전히 다른 언어가 사용되는 이문화異文化의 별천지에 도달할 수 있는, 말그대로 이웃나라인 일본으로의 당일 혹은 주말여행이 가능한 때가 있었죠. 저도 시류에 편승하여 맛있는 라면 한 그릇 먹기 위해 마음이 내키면 급하게 계획을 수립하여 배에 오르곤 했었습니다.

길고양이 촬영에 관심도 있어 후쿠오카의 교외로 버스를 타고 나가 골목을 배회하는 혼자만의 로망을 즐기던 시절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 어느 날 호랑이처럼 줄무늬를 자랑하는 귀여운 고양이를 따라 카메라를 겨누며 골목을 걸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골목 어디선가에서 희미하지만 상쾌한 울림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건축현장에서 일했었기에 콘크리트에 금속봉을 박는 음향은 익숙했지만, 이 울림은 생소했습니다. 나비를 쫓아가버린 고양이를 포기하고 의문의 소리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타다미에 도복이 떨어지는 소리였습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조그만 도장의 기분좋은 울림 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저희 중앙도장은 3층에 위치하고 있어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공용 입구를 걸어 올라가는 동안 콘크리트 복도에 기분좋은 울림이 퍼집니다. 어떤 의성어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잔잔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향響. 도장을 찾을 때마다 기분좋은 연상작용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후쿠오카의 골목에서 발견했던 나비를 쫓는 고양이와 고즈넉한 분위기의 아이키도 도장의 이미지가, 그리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오크통에서 수십 년을 숙성시킨 위스키의 향을 떠올리는 건 저뿐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아이키도 도장

예를 표하고 들어서는 도장에는 어디에나 합기도의 족자와 칼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어느 아이키도의 유파의 어느 도장이나 조금씩 다른 특유의 형과 계고 방식이 있겠지만 공통적으로 무도의 명칭의 족자와 칼이 상좌에 자리를 잡습니다. 계고에 임하는 모든 수련인들은 항상 칼을 접하는 셈입니다. 초심자 수련에서는 목검을 드는 경우가 많지 않아 어째서 도장의 상좌에 타치刀가 좌대에 올라가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3개월 이상만 수련하신 분이라면 우리가 왜 상좌에 타치를 놓는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타치의 유래와 역사에 관한 테마는 다양한 학자들이 다양한 설과 역사적 고증을 이루어 놓았기에 궁금하신 분은 누구나 쉽게 정보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타치에 대한 깊은 의미는 이제 갓 하카마를 입은 제가 주제넘게 언급하기보다 연배가 있으신 선배께서 설명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제가 어느날 문득 떠오른 의문은 ‘어째서 날을 세운 칼일까’라는 보다 원시적인 궁금증이었습니다. 인류는 어떻게 날카로운 날을 가진 도구를 만들 생각을 하였을까… 왜 우리는 칼이 필요했는가…

기술철학자 에른스트 카프Ernst Kapp는 날붙이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질문, 즉 ‘우리는 왜 도구를 손에 잡게 되었는가’라는 심오하지만 누구도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문제에 천착한 흔치 않은 학자입니다. 카프는 저서 ‘기술철학개요; 새로운 관점에서 본 문화생성사Grundlinien einer Philosophie der Technik(조창오 역/ 그린비/ 2021)’에서 ‘기술철학’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기술(테크네techne/ 테크놀로지technology)은 소크라테스 철학이 주류를 이루던 그리스 시대부터 학문적인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무엇을 연구해야 할지 혹은 어떻게 연구해야 할 지 몰라 아무도 심각하게 연구하려 하지 않았던 분야였습니다. 이러한 테크네가 철학적 고려 대상으로 승격된 데에는 카프의 공적이 크다고 합니다. 카프는 저서에서 자신이 창시한 ‘무의식적인 기관투사機關投射’ 이론을 기반으로 기술에 대한 일관적이고 체계적인 철학담론을 제시합니다. 카프에 따르면, 기술이란 표면적으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정 아이디어를 재료 가공을 통해 제작하는 행위 일반을 지칭합니다.

초기의 카프의 기술에 대한 기본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도구로서의 기술 개념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카프는 이 일반개념을 이후에 보다 세련된 형태로 고찰하게 되죠. 아리스토텔레스의 도구 제작의 개념은 네 가지 원인의 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먼저 목적인目的因, 특정한 목적이 있어야 하며, 형상인形狀因, 아이디어가 필요하며, 질료인質料因, 사유를 구현하는 구체적인 재료가 필요하며, 작용인作用因, 재료를 가공하는 제작활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카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작 개념이 기술의 표면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기술의 심층 개념은 오직 무의식적 기관투사의 개념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카프는 인간이 의식 차원에서는 자연 지배를 목적으로 시행착오 끝에 기술적 대상을 제작하게 되는 과정을 따르지만, 제작한 기술적 대상은 사실 인간의 신체 기관 중 하나를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카프는 이 주장을 피아노의 발명의 역사로 설명합니다.

피아노는 발명 당시 아직 생물학계에서 발견되지 못했던 신체 기관인 코르티 기관의 복제입니다. 동물의 귀 속 달팽이관에 있는 코르티기관은 미세한 신경섬유 다발로서 섬유막대의 다양한 길이와 두께의 다발이 소리를 수용할 때 소리의 높이나 길이에 맞는 신경섬유막대가 진동하여 소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각각의 섬유다발은 고유 공명 진동수를 가지며 해당 진동수의 섬유가 울릴 때 발생하는 신경신호를 뇌가 소리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현악기의 조상인 모노코드가 발명되었을 당시 인간은 코르티 기관의 얼개를 알지도 못했는데, 인간은 어떻게 코르티 기관과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노코드를 발명할 수 있었을까요?

카프는 인간의 심층 무의식이 도구의 제작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의 무의식이 신체 기관의 프로토타입의 이데아idea(형상形狀)를 의식에 제시하였고, 인간은 이를 모방하여 제작과정을 거쳐 피아노와 같은 현악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얼핏 들으면 논리의 비약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카프는 이처럼 무의식이 도구의 제작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주로 인간의 신체 기관이 신체 외부로 투사되어 도구가 발명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무의식적 기관투사 과정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표면적인 차원만을 제작 활동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을 기술의 ‘도구적 개념’이라 부릅니다.

검술

인간은 언제나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아가 인간에게 적대적인 자연환경을 통솔하기 위해 도구를 제작한다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카프가 주장하듯, 도구의 제작이 무의식의 기관투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전제한다면 기술적 대상은 인간의 신체 기관의 복제, 표현, 그리고 확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됩니다. 기술 대상이 무의식의 기관투사라면 대상은 단순히 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적극적인 자기 표현이 되죠. 기술철학자 라살Ferdinand Lassalle은 카프의 기관투사의 개념을 ‘절대적 자기생산’이라 부릅니다.

이러한 사유 과정을 거친 카프에게있어서 테크놀로지는 결여缺如의 보충補充이 아니라 인간의 확장擴張입니다.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테크놀로지가 개입한다는 철학자 아놀드 겔렌Arnold Gehlen의 대척점에 서는 이론입니다. 주관적인 목적을 위해 제작된 도구로서의 테크놀로지는 인간 존재의 확장적 표현형extended phenotype입니다. 여기에는 또다른 중대한 의미, 즉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외부에 자신을 객관화하는 활동 혹은 자아의 이중화로서도 작용한다는 함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술 대상이 자신의 복제이며, 이 대상을 인식하면서 자아는 자신을 다시금 인식하는 피드백이 작용합니다. 여기에 테크놀로지와 기술 대상의 철학적 의미가 자리잡고 있죠. 인간은 도구를 만들며 자아를 인식한다는…

자아인식

카프는 이 개념을 더욱 밀고나가 문화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이론을 완성합니다. 기존의 문화철학적 개념, 즉 문화가 고차원적 정신의 자기객관화이며 테크놀로지가 이러한 객관화를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하다는 기존의 개념에 반기를 든 카프는 인간의 문화 전체가 테크놀로지 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자아의 객관화이기에 표현의 도구로 볼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가 다름아닌 문화의 본질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로써 테크놀로지의 도구적 관점이 폐기되고 기술철학이 문화철학을 부분집합으로 흡수해버립니다.

물론 모든 철학자들이 카프의 시각에 동조하는 건 아니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으시겠죠? 어쨋건 카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논의를 진행시킵니다. 테크놀로지는 곧 문화이고 인간의 혹은 개인의 자아 표현이며, 예술이 특정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표현인 것과 마찬가지로, 테크놀로지는 자아인식을 위한 유일한 통로입니다. 앞서 테크놀로지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도구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기존 통념을 언급하였습니다만, 카프는 이 통념에도 맞섭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테크놀로지 또한 자연의 결과물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입니다. 인간의 신체의 반영, 즉 무의식적 기관투사가 도구를 만드는 원동력이라면 인간의 신체가 곧 자연이기에 테크놀로지도 자연의 적극적 활동에 의해 태어났다는 것이죠. 기존의 철학에서 테크놀로지가 인간중심적인 관점을 고수하였다면 카프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신의 투사를 통해 자기인식에 이른 결과물로서의 테크놀로지도 자연의 일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본다면 인간은 자연의 표현 매체이자 강화의 표현형이기도 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가집니다. 이제 인식의 주체가 인간 개인이 아니라 자연으로 옮아가게 되고, 자연이 인간을 통해 자기인식에 도달하고 있다는 가히 경이로운, 그러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철학적 사유가 가능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기인식에 의해 자연이 비로소 개안開眼을 한다는 놀라운 주장. 적대적인 자연에 맞서 싸우는 개인의 가치와 이상을 최고 덕목으로 삼았던 낭만주의와 계몽주의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기관투사와 관계맺음(2-2) 로 이어집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