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와 흄의 정체성(2-2)-조현일 에세이

기억의 연속성/동일성

앞서 로크가 오직 기억만이 지각들의 계기가 일어나는 범위와 지속정도를 우리 자아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기억이 인격 동일성의 주된 원천으로 간주된다고 소개했었습니다. 개인의 기억이 사라지면 인과성 혹은 자아를 구성하는 인과관계의 사슬은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되며, 오로지 기억을 통해서만 기억 너머에 있는 인격 동일성, 즉 일관적인 자아인 ‘나’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억은 인격 동일성을 만들어내기보다는 다른 지각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관계만을 보여줄 뿐이고 동일성의 발견은 별도의 주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지의 대상이 점진적으로 혹은 급격하게 변화한다면 어떨까요? 변화의 규모와 속도가 인지의 관념 과정의 프로세스 속도를 넘어서게 되면 마찬가지로 동일성은 무너지게 됩니다.

동일성관념의 붕괴가 인지부조화라든지 신경증과 같이 개인의 인지기능을 현저히 저하시키는 ‘비효율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 머릿속의 뇌도 지난 수만 년 동안의 진화의 경험의 축적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대상의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조금 강제로 연관시켜 맺는 테크닉을 발휘하는데, 개체 간의 공동 목표와 공동 목적으로 부분을 하나의 총체로 묶는 방식을 취합니다.

부분들이 각자의 기능과 특질을 가진다 하더라도 서로 협력하여 이루려는 공동 목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동일하게 유지될 수 있으며, 대상의 상태 변화에 대한 상상(동일성관념과 계기성관념)의 발동을 용이하게 해줄 수 있죠. 여기에 더해 각 부분이 활동과 작용을 할 때마다 다른 부분과 인과관계를 맺는다고 가정할 때 이 관념은 훨씬 더 강력해집니다. 이리하여 사유의 연속성이 깨지지 않고 동일성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생성된 동일성이 ‘집단 정체성’입니다.

동일성 유지를 위한 관념적 과정은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인식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허구’일 뿐

그러나 이러한 동일성 유지를 위한 관념적 과정은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인식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허구’일 뿐입니다. 앞서 언급한 작가 우나무노의 ‘안개’에 등장하는 아우구스토가 자신의 실존을 허구라고 자각하는 각성과도 비슷합니다만, 우리는 허구의 인식을 애써 억압하여 인식 안정성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군요.

우리가 인간 정신의 속성으로 여기는 집단적인 동일성은 이렇듯 ‘관념적 허구’에 불과하며, 인류가 정신의 속성으로 여기는 동일성의 관념을 완전체로 상상한다 하더라도, 동일성이 서로 다른 지각들을 하나로 묶어서 각각의 본성과 차이점을 없애지는 못한다는 건 자명합니다. 우리의 지각적 인식이 동일성에 의해 통합될 수 있다는 가정을 한다면, 과연 동일성은 정말로 개별 지각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저 상상 속에서 관념들을 연합할 뿐일까요?

개인의 정체성의 논의로 돌아가, 특정 개인의 동일성을 언급할 때 우리는 그의 지각들이 실제로 묶여 있는 모습을 관찰한 것일까요 아니면 관념들 사이에서 결속을 느꼈을 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즉각적으로 답변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당장이라도 한림원에 연락하여 노벨철학상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노벨상에는 철학부문이 들어가 있지 않네요…)

오늘날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인격 동일성에 관한 모든 난해하고 훌륭한 질문들은 결코 해결될 수 없으며, 이 문제는 철학적 난제라기보다 ‘문법’적 난제로 간주해야 한다고 입모아 이야기합니다. 동일성은 관념들의 관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데, 이 관계의 네트워크가 개인의 상상의 전이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동일성을 생산하게 된다는 과정은 분명하지만, 이 관계들과 전이의 용이성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질 수 있을 정도로 취약하여, 우리는 동일성을 부여할 때 시간과 관련해서는 어떤 타당한 기준도 세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존 로크(출처 구글검색)

‘나’라는 정체성을 성립시키는 시간적인 조건이 한 시간인지 하루인지 혹은 일년인지 개개인이 서로 다른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죠. 여기에서 로크의 동일성의 철학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립니다. 최근까지 정체성의 논의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주장은 앞서 언급한 존 로크의, 과거의 나와 오늘 혹은 내일의 나를 동일한identical 존재로 만드는 조건은 연속적인 기억의 존재라는 ‘기억’의 연속성의 논의였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앞서 들여다 보았듯이, 오늘날의 철학무대에서는 신랄한 반박의 대상입니다.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를 동일한 존재로 만드는 조건이라는 화두는 종국에는 둘의 개체가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로크는 일관된 어조로 ‘자아는 현재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의식으로 결정되고, 그 자아는 동일한 의식이 과거와 미래의 행동에까지 가닿는 한 동일한 자아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이 논설을 확장하면 거짓된 기억까지 모두 포함한 기억의 총체가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주체라는 허무한 극단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주장을 추종하는 오늘날의 로크 학파는 사소한 오류가 있을 뿐 로크의 주장 자체는 타당하다고 변호하면서 존재의 존속이 심리적 연속성을 지닌다는 로크의 주장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나’가 지녔던 신념과 취향, 유머, 호불호 등의 정신적 특성은 지금의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나’가 향유한 정신적 삶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 지금 이 순간 나의 정신적 삶을 이루며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로 존속성을 이어나갑니다.

나는 무엇인가?

하지만 로크를 비판하는 이들은 우리 존재의 존속에 심리적 연속성은 필요없다고 주장합니다. 동물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아’의 존속은 심리적 연속성과 무관하며 필수 조건도 아니라는 거죠. 로크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중증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은 사람은 더는 인간의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존재의 존속은 실재하며, 의식과 생명이 엄연히 남아있는데도 중증 치매 환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관점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인간 개체는 생물학적 유기체 혹은 동물로서 개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제의 유기체와 오늘의 유기체가 동일해야만 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기억’의 존속은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나’가 어제의 ‘나’를 기억해서 오늘의 ‘나’의 존재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단순히 신체의 대사와 면역계가 지난 24시간동안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물적인 육체의 연속성이 개인의 정체성의 조건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무언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육체적 연속성/정체성을 존속시키려는 개개인의 의지 발동의 가치는 어째서 배제되어 있을까요? 계고에 참여하려는 개개인의 의지가 있기에 도장이라는 장소에 육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특정 시공간에 육체적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의지와 육체의 물리적 조건이 부합되어야만 정체성이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테세우스의 배(사진출처:구글검색)

다시 문두에 제시했던 테세우스의 배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테세우스의 배의 정체성/동일성이 복구 재료를 달리 하여 바뀌었다면, 그 기념물을 바라보는 아테네인의 정체성도 바뀌었을까요? 아테네인들은 테세우스의 기념물을 올려보며 아테네의 전쟁에서의 승리의 영광을 자랑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테네인 개개인들도 전쟁영웅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함으로써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근거는?

일개 전투함의 영웅담이 모든 아테네인들의 승리를 의미하는 건 아니잖아요? 오늘날의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은 먼 과거에 승리한 전투함의 이야기에 오늘날의 그리스의 영광을 중첩시킬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오늘날의 시민정체성/국가정체성 논의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시간은 흘렀어도 역사적 사실은 엄연히 존재하며 시간이 지났다고 지워서는 안되는 순간들도, 오늘날 부정되어서는 안되는 사실들이 역사정체성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이 편협한 집단 이기주의의 씨앗이 될 가능성을 배제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국가정체성이 개인의 가치발전의 기회를 박탈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일본 합기도(Aikido) 세계본부 수련모습

일제강점기를 거친 우리나라의 특성상 일본의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배제하려는 의식적/무의식적 프레임이 팽배한 현실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일본무도의 가치를 국가정체성의 프레임으로 폄훼한다면 국가정체성이 개인의 가치발전의 기회를 박탈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적 정체성의 논의가 개인의 정체성을 넘어 집단정체성으로 확대된다면 논의의 실익을 모두 상실하게 된다는 신념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장의 일원으로서 집단정체성을 버리고 계고에 참여하여 국적과 상관없이 무도의 보다 넓고 밝은 가치를 전수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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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윤준환 편집장
대한합기도회 사무국장 및 대한합기도회 중앙도장 도장장 2013년 러시아 월드컴벳게임즈 한국대표로 참가 세계본부도장에서 내제자 생활을 했음 ※ 중앙도장 위치 ※ - 서울시 동작구 사당로 28길 6 (3층) - 4.7호선 총신대입구(이수)역 9번출구 도보 3분거리 - 수련문의 : 02 - 3444 -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