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와 흄의 정체성(2-1)-조현일 에세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는 무엇인가.’

90년대 초 당시의 젊은이들이 누구나 그러했듯이, 민주항쟁의 와중에 슬며시 캠퍼스에 스며들어갔다가 조용히 입대를 하고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는 미꾸라지 통발 빠져나가듯 전역을 하고 얼렁뚱땅 졸업전을 하고나자 이제 뭘 하지…라는 (다시금 누구나 그러했듯이) 실존적 의문에 빠지게 된 저는 비교적 간편하게도 전공과 느슨한 연관을 가지는 건축전공으로 캐나다 유학을 결정하였습니다.

미적분수학을 다시 공부하게 되면서 신세를 한탄하고 마우스의 좌우버튼과 가운데 스크롤 릴을 열심히 굴리며 밤새도록 CAD 도면을 치면서도, 아직은 생활전선에 뛰어들기가 겁나는 애송이 대학원생은 또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싫어서 별 생각없이 철학과 학부에 편입하기로 마음먹고 유예의 시간을 가집니다.
물론 유예기간만큼의 추가 학비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는 전혀 생각해 본 바 없었기에 부모님으로부터 신랄한 비난과 질타를 받았지만, 뭐, 어쨌건 전화기 너머의 노성怒聲이었기에 수화기만 조금 멀리하면 아침마다 작은 자취방에 딸린 테라스에 빵부스러기를 먹으러 오던 산새의 지저귐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편입한 3학년 학부의 철학수업은 대학 초년 이후 처음 듣는 철학이었기에 약간 긴장한 탓이기도 했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기반을 두는 철학용어가 가득한 교과서와 교우들이 토론하자며 던지는 현학적인 말의 회오리에 신경쇠약의 나락에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자초한 유예이기도 했고 남자에게 눈물은 일생 세 번으로 한정되어 있기에 난관을 타계하려고 교수님을 찾아가 학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저의 어려운 상황을 호소해 보려 했으나, 면담을 하려면 최소 한 달 전에 신청했어야지…라는 힐난만 받고 과사무실을 나서며 눈물을 훔치는 동양인을 동정한 조교가 저를 불러 세워 커피라도 한 잔 하자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양눈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odd eyes를 처음 봐 신기하기도 했고 조교의 조언이 필요하기도 하였기에 흔쾌히 응하여, 이런저런 학업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마음이 누그러지게 되었습니다. 홍채이색증은 바르덴부르크 증후군이라던데… 라며 쓸데 없는 간섭을 하는 저의 오지랖을 무시하고 다 마신 커피컵을 쓰레기통에 농구처럼 던져 넣으며 그가 던진 한 마디가 제 머리를 맑게 해주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중해 바다의 청록색과 클림트 회화의 금색에 가까운 호박색의 아름다운 오드아이에 홀려 전혀 다른 문장을 전혀 다르게 기억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나는 누구인가?’

‘철학의 제문제는 언제나 두 질문으로 회귀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네가 당면한 복잡한 주제와 문제를 모두 이 두 질문으로 환원해 봐.’ 따뜻한 조언을 받아들여 저는 이후의 모든 문제를 이 두 범주에서 사유하고 논의하고 있답니다.

첫번째 질문은 간단하지만 사유하기 어렵고 두번째 질문은 복잡하지만 해결을 위한 간단한 방법론이 있는 듯 했습니다. 복잡한 방법보다는 간단한 방법을 선호하는 성향의 소유자인 저는 당연히 두번째 질문에 먼저 끌렸고, 우주/양자물리를 공부하여 아주 간단하며 제 나름대로는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었습니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138억 년 전 무無에서 시작되어 인플레이션과 빅뱅을 거쳐 생성되었으며, 장場의 성질을 가지는 점點 형식의 기본입자(장)의 양자 네트워크의 거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간단한 답. 이 문장은 언어적 애매모호함을 초월하여 수학 언어로 명징하게 표현할 수 있고 심지어 앞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변화할 지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국 ‘나를 둘러싼 세계’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양자물리학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온전히 철학의 문제로 다룰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형성과 해법이 모두 철학적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테세우스의 배 (사진출처:구글검색)

자그마치 2천 년 전 그리스의 플루타르코스Lucius Mestrius Plutarchus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에 관해 ‘테세우스의 배’라 불리는 사고실험을 제안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미적으로 모호한 문장을 철학과에서는 개체정체個體正體personal identity, 즉 ‘자아가 본래 지니고 있는 형상의 문제’로 바꾸어 논의합니다.

‘나’라는 말이 간단하기는 하지만 의미상으로는 여러가지로 해석의 여지가 있죠. 하지만 철학에서는 이를 다시 보다 애매모호한 ‘자아自我’라는 용어로 대체하고 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전형적인 철학적 방법론을 취합니다. 이렇게 말을 바꾸면 더 애매모호해지는데도 철학자들은 이상하게도 이렇게 하는게 의미파악을 하는데 용이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철학자들끼리는 친하지만 캠퍼스만 벗어나면 친구가 없다는 거겠죠.

어쨌든 ‘테세우스의 배’는 수많은 기념비적인 전투에서 아테네의 승리를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전투함입니다.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는 이 유명한 배의 이야기를 역설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배의 나무판들이 썩어가자 아테네인들은 테세우스 호의 부품들을 교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썩은 갑판 나무와 돛대를 옛모습 그대로이지만 새로운 나무로 갈아 끼웠습니다.
테세우스 호는 아테네의 상징이었기에 문화재청의 재정지원을 받아 꾸준히 수리가 이어져 100년이 지났을 때는 배 전체가 새로운 부품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플루타르코스는 이상한 질문을 던집니다. 복원된 배는 원래 배와 같은 배인가?

누군가는 이름이 여전히 테세우스니까 변함없이 그대로라고 주장했고, 어떤 이는 전혀 다른 재료니까 더이상 테세우스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7세기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이 어려운 질문을 다시 꼬아 새로운 질문을 만들었습니다.

출처: 나무위키

만약 교체된 낡은 부품들로 다른 배를 만든다면, 이 배는 새로운 배인가 아님 테세우스인가. 이후 세월이 흘러 테세우스의 배에 관한 두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철학적 변용인 ‘정체성은 변하는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호사가들의 농담이었던 플루타르코스의 질문은 이제 진지한 형이상학적 주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말의 ‘정체성’은 영어로는 ‘아이덴티티’로 번역되는데, 의미상으로는 어제의 ‘나’와 오늘 혹은 내일의 ‘나’ 사이에 동일성과 연속성이 유지되는 상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시간이 흘러도 무언가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라는 좀 더 구체적인 것 같지만 보다 애매모호한 질문으로 변용되었죠.


‘어디로 가야 할까’

철학잡지 ‘뉴필로소퍼’ 한국판 편집장 장동석은 ‘정체성이라는 넓고 깊은 세계’라는 글에서 스페인 작가 미구엘 데 우나무노의 소설 ‘안개’의 주인공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대안적으로 접근합니다. 사색적인 주인공 아우구스토 페레스는 자칭 ‘삶을 산책하는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 ‘어디로 가야 할까’를 고민하는 아우구스토는 어느날 갈래길에서 어디로 갈까 고민합니다. 약간 황당하지만 마침 지나가는 개가 있다면 개를 따라가리라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아름다운 아가씨’가 지나가고 있었고, 아우구스토는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를 따라갑니다. 아가씨의 이름은 에우헤니아 도밍고 델 아르코. 계속된 구애 끝에 아우구스토는 에우헤니아와 결혼을 약속하였지만, 에우헤니아는 소문난 꽃뱀이었습니다. 아우구스토의 재산을 모두 갈취하고 숨겨둔 애인과 야반도주해 버렸습니다.

절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한 아우구스토는 마지막으로 어째서 자신이 이런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는지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기로 합니다. 자신의 창조주에게 말이죠. 그런데 우습게도 아우구스토는 스스로 자신이 ‘소설 속의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창조주는 다름아닌 소설가 미구엘 데 우나무노라는 사실도 알고 있죠.

 ‘나’는 무엇일까요?

눈물을 훔치며 자신이 자살해야 하는 이유를 미구엘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묻습니다. 그러자 작가 우나무노는 ‘너는 네 마음대로 자살할 수 없다’고 단언하죠. ‘넌 허구이기 때문이란다. 내가 만든 환상의 산물일 뿐이며, 내가 지어낸 행운과 불행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독자들의 환상의 산물이기도 하지. 넌 내 소설 속의 인물일 뿐이야. 이것이 네 존재의 비밀이다.’

통상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사유하는 소설의 주인공과는 달리 우나무노의 아우구스토는 ‘허구의 실존’이었습니다. 자신이 허구이기에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우구스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자신의 정체성이 허구라는 ‘실존적 사실’을 알게 된 아우구스토는 역설적으로 기쁘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하지 않는 철학적 좀비들의 혐오의 발언들이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병인病因입니다.

‘나’는 무엇일까요? 육체일까요? 정신일까요? 철학자 존 로크의 주장대로 기억일까요? 내 기억은 분명한 사실일까요?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지는 않았을까요? 기억이 분명치 않다면 내 정체성은 연속성을 상실하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스스로를 개별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 존재는 마치 입자-장의 거품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총체의 네트워크의 일부가 아닐까요?

플루타르코스가 테세우스의 배를 개인의 정체성과 자아의 동일성 문제의 화두로 제안하고 이후 2천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사상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만, 회의주의의 거장 흄의 목소리는 새겨 들어볼만 합니다.

데이비드 흄(사진출처:구글검색)

흄은 정체성을 인격동일성의 문제로 환원하여 감각적인 인지認知를 정체성/동일성 문제의 핵심으로 다룹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매 순간 ‘자아’를 깊이 의식하고 자아의 존재와 지속성을 ‘느끼며’, 자아의 완전한 동일성을 무조건 확신합니다. 강렬한 감각과 정념이 자아의 지속의 원동력이라고 간주하고 여기에 집착하여 보다 강한 자극을 추구하게 되죠.

자아의 정체성을 사유하는 이들은 감각과 정념이 불러일으키는 고통과 쾌락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여 자아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계고의 와중에서도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근육들을 격렬하게 움직임으로써 느끼는 고통과 피곤, 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아드레날린 분비와 엔돌핀에 의한 엑스터시(마라톤 선수들의 환경자극에 의한 운동 스트레스의 ‘러너스하이’와 같은 도취감)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도우들의 소감을 들은 바 있습니다.

계고(稽古)

익숙한 직장이나 가정 환경에서 느끼지 못하는 환경자극을 도장에서 경험하며 사회체계 내에서의 소모적인 부속품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개인입니다. 흄은 이러한 감각과 정념에 의한 자아의 발견을 긍정하면서도 자아의 인지와 영속, 혹은 지속은 이보다 시간의 흐름에 깊은 관련이 있다고 조언합니다.

흄 철학에서는 어떤 대상에 관한 우리의 관념이 시간이 지나도 영속적이고 불변한 경우 이를 동일성identity 관념 혹은 일치성sameness 관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수많은 대상들은 개념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채꽃밭의 꽃대 하나하나는 서로 다른 개체들이고 폭염의 콘크리트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들도 모두 서로 다른 개체들이죠. 개체들을 향한 관념은 서로 완벽히 무관하고 다양합니다. 하지만 동일성관념과 일치성관념이 동원되면 어떠한 개체군을 연관지어 하나의 관념으로 묶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 흄은 계기성succession관념이라 부릅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계기契機’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바뀌는 원인이나 기회가 되는 성질을 의미하며, 특히 철학에서는 사물의 생성과 발전 과정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소를 의미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인간이 대상에 대해 가지는 동일성관념과 일치성관념이 계기성관념으로 전이하면 실제로는 완전히 별개이거나 심지어 상반되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지적으로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념 기능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저 감각적인 혼동, 혹은 ‘착각’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겠지만, 반대로 이 기능은 우리 인간이 관념을 발전시키며 뇌를 진화시켜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죠. 따라서 눈앞의 다수의 대상을 개별적이 아니라 총체적이자 효율적으로, 즉 생존을 결정하는 대상에 대한 빠른 이해(수렵인이 오늘 사냥하여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자식들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어떤 사냥감을 골라야 하는가의 결정, 혹은 채집인이 나무둥치에 자라는 버섯이 독을 품었는지 식용이 가능한지를 시간낭비 없이 판단하기 위한 이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계기성관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계기성관념은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상상을 전이transition하는 과정, 즉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이 파생되는 현상을 손쉽게 수행하며, 두 대상이 부드럽게 관념적으로 연결되도록 도와줍니다.
두 대상은 계기성관념에 의해 처음에는 유사하게 느껴지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동일한 대상으로 인지되면서, 계기성관념은 다시 동일성관념으로 대치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뇌 안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특정 군의 개체를 바라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집단의 성질을 일반화하거나 개념화할 수 있습니다.

흄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 최근에 재건한 교회 건물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오래전 벽돌로 지은 교회가 허물어져서 교구에서 근대 건축 양식에 따라 석조 건물로 교회를 재건했다고 말해도 이는 어법에 틀린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 재료와 양식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과 교구 신도들과 두 교회 건물의 관계를 제외하면, (이전과 오늘날의) 두 건물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만으로도 두 대상을 ‘교회’라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첫번째 대상은 두번째 대상이 나타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소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어느 한 시점에서 우리는 차이나 다수성이라는 관념을 전혀 떠올리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주저 없이 그 두 대상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테세우스의 배와 흄의 정체성(2-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