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박탈과 전복적 결단(2-2) -조현일 에세이

생존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앞서 언급한 르페브르는 ‘현대세계의 일상성'(282쪽)에서 청년의 삶에 대해 “오랜 일상적 희생 뒤에 ‘삶’에 접하려 하지만 오로지 삶을 꿈꾸기만 할 뿐’이며, 아무리 무리하여 노력을 투여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살아남는 일만 가능’할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 일상을 박탈당하고 부채의 늪에 빠져 미래를 저당잡힌 청년은 생산활동을 사회적 기여로 여기기는커녕 생존을 위해 강제적으로 수행하는 착취적인 활동으로 여기게 되어 노동시간 이후에 재충전을 위한 시간이었던 여가도 신자유주의적 노동논리에 종속되고 말았음을 재확인합니다.

철학자 리쾨르Paul Ricoeur의 저서 ‘텍스트에서 행동으로'(박병수, 남기영 역, 아카넷, 2002)의 분석을 따르면 오늘날의 노동은 최소한의 일상적 여가를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한경쟁의 일상적인 현대세계에서는 가장 사적인 영역조차도 전면적으로 투사하여 자기계발에 투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로맨틱한 일상은 오늘날 ‘환상’에 불과한 병리적 비일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제 감히 말하건데, 우리에게서 ‘일상’은 ‘박탈’되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일상은 ‘날마다’, ‘보통의 날平常, ‘반복되는 나날’을 의미하며 ‘일상성’이란 머물고 있는 ‘존재양식’ 혹은 실존의 양식, 어떻게 사는가의 방식입니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글방, 1997) 하이데거의 ‘일상성’의 개념을 받아들여 반대로 ‘일상의 불가능성’을 재정의하면, 살아가는 방식이 ‘확정불가능’한 삶의 방식과 실존의 양식이 오히려 실존 그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의 동상 [출처] 에포크타임스 – kr.theepochtimes.com
이러한 일상의 박탈과 붕괴에 대해 심각한 사유를 기획했던 르페브르는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이 실패한 이유가 다름아닌 ‘일상의 중요성의 간과’에 있다고 일갈一喝을 올립니다.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을 단순히 외재화하여 사유했을 뿐 정작 혁명의 바탕이 될 일상을 철저히 무시했기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거죠.

르페브르는 ‘일상은 보잘것없으면서도 견고하며, (…) 삶의 단편들이 하나의 일과표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 과감하고 덧없지만 용감하게 자신을 주장하여 갈채 받는 모험'(‘현대세계의 일상성’, 78-79쪽)이라고 말합니다.

일상이란 어찌보면 무료하고 보잘것없고 비참한 반복의 지루한 연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르페브르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일상의 반복을 통해 들뢰즈적인 차이가 생산되고, 이 차이의 생산이 혁명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기 때문에, 일상은 무의미하기는커녕 가슴떨리는 모험입니다.

철학자 건켈David Gunkel은 저서 ‘리믹솔로지에 대하여'(문순표 외 역, 포스트카드, 2018)에서 들뢰즈적 차이와 반복을 설명하며, 반복은 단순히 이전의 과정의 똑같은 되풀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반복’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반복의 첫번째 종류는 동일성의 반복입니다. 그야말로 앞서 일어난 사건을 똑같이 한번 더 해보는 거죠. 하지만 두번째 종류의 반복은 차이를 포괄하는 형식입니다.

가슴떨리는 모험/아이키도 수련

건켈은 반복의 두번째 종류에 주목하며 이를 ‘반복 2.0’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반복적인 반복의 과정에서만 차이가 발생하고, (…) 반복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만 새로운 (…) 차이의 발생이 가능하다.’ (‘리믹솔로지에 대하여’, 207쪽) 건켈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일상의 함의를 재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상은 ‘반복 2.0 속에서 유의미한 차이와 변화를 발생시키는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과정’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일상과 비일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두 흐름 혹은 서로를 배타적으로 배제하는 운동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회사원이 더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모든 회사원들이 꿈꾸는 판타지이겠습니다만…) 일상과 비일상은 서로 전복됩니다. 따라서 비일상은 일상과 단절된 예외적 모멘트가 아닙니다. 비일상은 일상과 함께 삶을 이루는 근본적 요소이며, 반복의 과정 속에서 전체적인 리듬을 깨지 않는 상보적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일한 박자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예측가능한 알고리즘에 불과하여 긴장과 감동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겠죠. 하지만 바흐의 푸가나 대위법의 돌림노래는 단순반복이지만 서로 얽혀 황홀하고 풍부한 다성음악으로 들리게 됩니다. 비일상은 불협화음이지만 이 긴장과 불확실성이 일상에 자극을 줌으로써 일상 그 자체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일상과 비일상

농경시대의 일상과 같이 반복적이고 동일한 일상만이 반복될 때 삶은 굴레와 타성에 빠진 개미지옥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비일상만이 반복되면 삶은 흐름과 리듬을 상실한 의미없는 파편들로 분절되고 산발적인 작은 분출만이 존재할 뿐 퇴행적인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비일상, 혹은 박탈당한 일상이 삶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원심력만이 존재하여 파편화된 욕망들만이 수렴하는 지리멸렬이며 큰 변화, 즉 혁명을 유도하는 중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개인주체는 저마다 지리멸렬한 소비주체로서 개인적 향락만을 추구하며 계열을 파괴하고 구조를 재편할 수 있는 파괴력을 상실하고 말죠. 아이러니컬하게도 일상의 박탈과 파괴는 이러한 의미에서 일상의 필수적 요소이자 중첩적이자 상보적인 역할로 전회될 수 있습니다. 일상과 비일상이 서로 교묘하게 조합될 때 생산적인 차이가 산출되고 새로운 의미가 삶의 전반을 흐를 수 있습니다.

앞서 차이가 반복의 과정에서 산출된다고 언급하였습니다만, 이와 같은 논리로 혁명은 일상 속에서 돌발적으로 출현하는 이벤트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혁명은 일상의 반복에서 도출되는 파생적 사건이기에, 혁명(유의미한 차이)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바탕이 되는 긴 반복(일상)의 과정을 간과하는 처사입니다.
일상의 중요성과 비일상과의 협응을 충분히 반성하지 않는 접근방식은 혁명 이상을 유토피아로 간주하여 현행적인 추진을 게을리하여 차원의 도약을 주저하는 우유부단입니다. 먼 산을 바라보며 푸르름이 아름답다고 감탄하지만 푸르름을 구성하는 수천만 그루의 나무숲을 간과하는 게으름이죠.

나무숲

제가 앞서 비일상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단순히 오늘날의 일상이 과거의 ‘일상’ 개념과는 다르게 변화하였다거나 일상을 박탈당했다고 슬퍼만 하고 있다면 현상황을 ‘소여’로 수용해버리는 태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노동의 형태와 생산의 관계, 생활의 양식과 직업군의 특성, 지역과 국가와 젠더의 개념의 변화에 따라 일상의 이미지는 변화무쌍하게 달라지지만, 불협화음과 돌발적인 리듬이 없는 일상을 그저 노스탤지아로 그리워하는 태도는 혁명을 향하는 현행적인 실천가에게는 필요없는 소양이겠군요.

삶은 무작위적이 아닌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리듬을 가지는 일상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때때로의 일탈이 혼재하는 상황, 즉 일상과 비일상이 리듬을 이루어 지속되는 과정에서 풍요롭게 구성될 수 있습니다. 병리적 세계의 회복불가능한 불구적 일상과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자기폐쇄에서 기인하는 냉소적인 태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일상이 박탈된 삶의 방식으로부터 급진적으로 단절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자본과 다양한 층위에서 개인주체에 가해지는 미시적/거시적 통치권력에 의해 포획되어 일상이 박탈당한 삶, 여가를 만끽할 수 있는 일상으로부터 결락된 시간성으로부터 탈주하여 새로운 주체성을 찾을 수 있는 영역으로의 진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 모순의 변증법적 종합과 반복을 통한 차이의 산출이라는 혁명적 일탈은 일상이 박탈된 삶에서는 단순히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일상과 비일상의 알고리즘을 강제적으로 재구성하는 가히 ‘폭력’적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었습니다.
일상이 전복되는 순간, 즉 ‘결단’을 내리는 모멘트를 개인주체가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제안입니다. 일상의 삶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현존재는 결단의 모멘트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합니다.

결단은 개인주체에 주어진 상황과 다소의 우발적인 사건에 영향을 받게 되지만, 모든 개인은 개인 스스로의 정황에서 자기나름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결단을 내린 현존재는 (…) 자기 자신을 자기의 세계로 자유롭게 내어주며 (…) 자기 자신에로의 결단성이 현존재를, 비로소 함께 존재하는 타인들을 그들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서 존재하도록’ 합니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397쪽)

모든 현존재는 결단을 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저 세계에 내던져진 상태’에서 벗어나 타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실버만Kaja Silverman은 ‘결단’을 ‘오직 나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나 자신을 즐거이 확장시키는 행위’로 규정합니다.(‘월드 스펙테이터’,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회 역, 예경, 2010)

실버만은 하이데거의 ‘결단’ 개념을 개인 수준의 변화를 위한 인지적 각성을 넘어서, 세계를 향해 자아를 노출시키고 타인과 더불어 고민하는 사회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합니다. 상태 이행의 결단은 이질적인 외부와의 접촉이기에 필연적으로 공포를 동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편안함과 익숙함을 포기하는 위험한 결단이지만, 예측 불가능이기에 잠재가능성으로 충만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리스크 없이는 리턴도 없죠. 실버만은 이러한 개개인의 결단이 확산되어 다중多衆multitude(혹은 공통체commonwealth)을 변화시키고 이 모멘텀은 계속적으로 운동하여 확장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확장은 곧이어 통치권력의 위압과 착취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며, 신자유주의를 맹종하는 착취적 권력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편안함과 익숙함을 포기하는 위험한 결단이지만, 예측 불가능이기에 잠재가능성으로 충만한 순간

불확정성이 팽배하고 불안정성이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 일상이 박탈당한 사회는 리스크와 손해를 벌충하기 위해 개인의 일상을 착취하고 불안Angst과 공포Terror의 정동affect을 축적합니다. 이러한 정동이 사회적 자산으로 축적되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사건의 순간, 혁명의 모멘트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적 맹신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일상이 박탈당한 삶의 불안과 공포의 정동은 타자에 대한 혐오를 불러 일으키고 다중과 공통체의 역량을 갉아먹습니다. 이러한 소모적인 정동의 도식을 깨기 위해선 체제에서 벗어나려는 과감한 ‘일탈'(들뢰즈의 용어로는 ‘탈주’)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미시정치적 차원에서의 ‘개개의 결단’을 거시정치적 차원에서의 ‘사회적 결단’으로 확장하고 사건으로 현행화시킴으로써 일상은 비로소 불가역적 이행의 가능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의 현행은 필연적으로 또다시 비루한 일상을 조직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 일상은 다시금 혁명을 통해 재구성되어야 하며 다른 방법론적 전회의 과정으로의 이행을 통해 새로운 배치로 나아갈 또다른 ‘결단’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교수님의 질문에 ‘일상에는 전복의 결단이 필요합니다’라고 답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고 생각하지만, 이젠 너무 늦어버렸네요.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