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박탈과 전복적 결단(2-1) -조현일 에세이

대학

몸과 마음을 옥죄던 입시에서 해방되어 캠퍼스에서의 무한 자유를 제공받은 대학새내기는 누구든 일탈을 꿈꾸기 마련입니다. 말이 좋아 일탈이지 사실은 일진들이나 할 수 있다던 ‘무단퇴실’를 교복도 입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치기어린 바보같은 짓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시고 흑판에 판서를 시작하시면 창문으로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가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마시고 수업이 끝나기 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교실로 돌아가 펼쳐 놓았던 교과서를 챙겨 나오는 미션이 한참 유행이었습니다.

창문으로 나가야 하니 교실이 3층 이상이면 ‘일탈’은 불가능합니다. 대학 교실에 에어컨이 없던 그 당시 모든 강의실 창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기에 조용히 일탈하는 건 문제 없었지만, 전공수업이 아닌 선택교양수업이어야 하고 1층 교실이라는 두 요건이 갖추어진 수업은 ‘법학개론’이 유일했습니다. 교수님은 ‘일탈’ 중 적발된다 하더라도 민주투쟁을 하러 나간다고 둘러대면 징계를 하지는 않는다는 소문도 있었기에 소심하게 일탈을 준비하고 있었죠.

마침 초여름이라 통창문은 시원하게 열려 있었고 친구놈은 이미 창을 넘어 잔디밭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다리 하나만 더 넘기면 ‘일탈’이 성공하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새로 산 청바지가 찢어질까봐 정신이 팔려 저를 노려보고 있는 교수님의 시선을 미처 느끼지 못했습니다.

‘일탈 중인가?’

오후에 있을 소개팅으로 꽃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학생이 ‘투쟁’하러 나간다는 핑계가 저를 더 비참하게 만들 것 같아 한 발은 잔디밭에, 또 한 발은 창틀에 걸린 채로 잠깐 멈춰 서 있다가, 천천히 교실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탈 실패인가?’

‘아닙니다, 교실로 들어오는 중이었습니다.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미소를 지으시던 교수님께서는 ‘그래, 잘 생각했네. 그래도 창문으로 출입하는 행동은 국민의 혈세로 학업을 하는 특권이 제공된 제군들의 품위를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 있네. 다음부터는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게나.’ 사과의 말씀도 못드리고 자리에 앉은 제게 교수님의 질문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철학

‘아까 창문으로 나가려던 학생에게 질문 하나 하지. 철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난주 수업에서 졸면서 들었던 내용이라 답은 알고 있었습니다. ‘네, 철학은 일상에 질문을 던지고 개념을 생성하는 학문입니다.’ ‘옳지,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철학에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본질적인 질문은 어떨까. 학생은 ‘일상’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나?’

오호통재라, 철학 수업을 수강하고는 있지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 지는 생각해 본 바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학생활을 더 재미있게 놀 것인가를 고민하던 새내기에게 철학적 질문은 무리죠.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던 저에게 인자하신 법철학 교수님께서는 ‘그럼 먼저 ‘일상’을 ‘향해’ 의문을 품어보게나.’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너그럽게 용서하셨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991년. 대한민국의 경제 황금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절의 대학생은 졸업과 동시에 취업 걱정이 아닌, 어느 회사의 연봉이 더 높은가를 고르는 걱정으로 머리가 아팠던 경제 부흥기였습니다. 땀흘려 입시에 성공해도 졸업 이후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요즈음의 슬픈 대학생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좋은 시절

수업 내용보다는 저녁때 타대학 과대표가 주선해 줄 소개팅에 나올 여자아이와 뭘 먹고 어떤 영화를 보러갈까 고민하던 ‘아름다운 시절’의 우리에게 철학 교과서에 이미 친절하게 실려 있는’일상의 질문’이 아닌 ‘일상을 향한 질문’은 어렵다기보다는 필요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일상’이 너무나 편안하고 달콤했기 때문에…

그러나 오늘날의 일상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무한경쟁을 표방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한 오늘날의 우리나라는 극심한 부의 양극화와 불안정 고용 형태의 확산, 사회 안전망 해체와 같은 고도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모순이 내재화되어 일상의 조건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더우기, 코로나19, 원숭이 두창, 조류독감 등의 팬데믹 규모의 전염병 창궐, 온실 가스의 무단 배출로 인한 전지구적 기후 변화, 빈번히 일어나는 원전의 방사능 유출, 국경을 넘어 날아와 폐세포를 공격하는 미세먼지, 유전자 조작에 의한 생태적인 재앙의 발생에 노출된 오늘날의 우리는 디스토피아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인류 절멸이 당장이라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미국 우선주의, 영국 브렉시트, 중국의 한한령, 우크라이나 사태 등의 신고립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가 만연하여 인종, 종교, 젠더, 국가 간의 배척이 심화되고 타자를 향한 공포와 혐오의 정동은 미디어를 타고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과 위태의 일상이 오늘날의 ‘일상’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인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러한 체제 불안정성의 확산을 자본주의의 ‘탈영토화’라고 정의하고,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공포의 정동은 불안정성의 완화를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는 절망과 함께 우리의 삶의 내부를 잠식하고 파열하면서 특히 취약한 개인간에 급속도로 ‘전염’되고 있다고 개탄합니다.

점점 피폐해져만 가는 삶의 조건 속에서 대규모의 재앙과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는 개인은 무력감에 빠지면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발버둥치는 나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상의 통제불가능’의 감각을 체화體化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진 무기력한 개인주체는 진취적인 열망으로 세계를 바꾸려는 기상보다는 생존의 유지 만을 추구하며 지금 당장 내 눈앞의 혹은 내 손에 쥐고 있는 작은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잃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사소한 일에도 분노가 끓어 오르거나 어떠한 상황에도 비웃음을 띄며 저속한 우월감으로 ‘냉소’하는 분열증적인 개인주체가 되어 갑니다. 이러한 일상의 변질과 타락은 갑작스럽게 종말을 고하는 ‘드라마틱한 파국’이 아니라 극적인 사건이나 변화 없이 상태가 지속되면서 천천히 악화하는 ‘지리멸렬’이자 확실성과 목표를 상실한 ‘영원한 미정未定’ 상태입니다.

드라마에도 등장한 바 있는 바둑용어 ‘미생未生’은 영원히 활로를 뚫지 못하면 다름아닌 ‘이미 죽은 수’가 될 수 밖에 없죠. 이러한 쇠락의 일로에서 개인주체는 자신의 고립세계로 빠져드는 ‘히키코모리’가 되거나 충족을 연기하고 가상의 형태로 욕망을 위임해버리는 ‘철학적 좀비’의 상태로 추락합니다.

철학자 앙리 레페브르Henri Lefevbre는 저서 ‘현대세계의 일상성'(박정자 역, 기파랑, 2005, 79쪽)에서 ‘일상을 현대성의 이면이자 시대정신’으로 보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일상의 의미를 분석하는 기획이 현대성/시대정신을 이해하는, 혹은 해당 사회를 파악하는 지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황무지화된 오늘날의 ‘일상’을 병리적이라고 진단한다면, 오늘날의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정신으로서의 신자유주의의 원동력으로 기능하는 적극적인 소비 주체로서의 개인주체의 위상도 다분히 병리적인 상황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철학자 앙리 레페브르Henri Lefevbre

노동을 통해 재화를 벌고 이를 광란적으로 소비하고 난 소비주체로서의 개인은 피곤한 심신을 다시 노동의 ‘일상’으로 복귀시켜야 합니다. 여가를 통해 심신의 피로를 제거하는 목적이 빠른 시간 내에 회복하여 노동으로 돌아가기위함이 된다면 이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미시적/미시정치적 통치’의 연옥으로 빠져들어가는 형국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가를 위해 재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행위 그 자체가 신자유주의가 개인을 통치하는, 앞서 다른 에세이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자발적인 착취와 억압의 알고리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알고리즘이 반복을 통해 일단 내면화되면 개인주체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 층위에서 자발적 착취/자기억압을 끝도 없이 계속하고 있는 꼴이 되죠.

인간의 방전된 배터리를 재충전하는 시간

‘여가’란 문자그대로 ‘남겨진 시간’이라는 의미로서, 계속적인 경제활동이 생산효율을 떨어뜨린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반강제적으로 주어지는 잉여의 시간입니다. 일반적인 개념의 여가는 생활 유지에 소요되는 시간을 제외한, 즉 가사활동이나 육아 등에 소비되는 시간을 포함시키지 않는, 온전히 나만을 위해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산업화 시대에 여가는 기계적으로 생산활동에 동원되고 소비되는 인간의 방전된 배터리를 재충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산업화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로 이행되면서 여가는 단순히 생산을 위한 충전이 아니라 여가 자체로서의 목적을 가져야 하며, 오히려 여가를 즐기기 위해 생산/경제활동을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의 실상도 그럴까요?

OECD가 발표한 ‘2017 고용 동향’에 따르면 우리의 연간 노동 시간은 2,069시간으로 OECD  35개 회원국 중 2위입니다. OECD 평균보다 38일을 더 일하며, 독일보다 4개월을 더 일하지만, 소득은 독일의 50%에 못미칩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6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2016년 우리에게 주어진 여가는 평일 3.1시간, 주말 5시간으로 10년 전의 조사에 비하면 현저하게 감소하였으며, 여가의 내용도 레포츠가 아닌 저비용에 적극적 참여가 아닌 동영상 시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는 독서 활동의 비율은 1.2%였습니다. 여가의 향유수준도 소득수준과 비례하여, 여행으로 휴가를 다녀온 비율은 월소득 500만 원 이상 가구는 78.2%인데 반해 300만원 미만 가구는 42.5%에도 못비칩니다.

심화되는 부의 편중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청년들은 최저시급으로 겨우 생활을 이어나갑니다.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저서 ‘공통체'(정남영, 윤영광 역, 사월의책, 2014, 371쪽)에서 지적하듯 신자유주의 체제는 부를 생성하는 방식보다는 재분배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으며, 재분배는 주로 공적 재화와 가지지 못한 자의 부를 강탈하여 특정 계층을 위해 축적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출처:머니투데이

이에 더해 토마 피케티를 비롯한 세계 경제 전문가들이 모여 작성한 ‘2017년 세계 불평등 보고서’는 1980년에서 2016년에 이르기까지 증대된 부의 27%를 상위 1%가 독식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80년대에 28.2%에서 2012년에는 44.9%로 늘어 사회적 부의 양극화가 극심하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저당 잡히고 저임금/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는 계급을 위해 ‘불안정’의 ‘프레카리어스precarious’와 ‘노동계급’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합성한 신조어 ‘프레카리아트precariat’마저 등장하였는데, 급증하는 실업,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 지구화, 계급투쟁에서의 패배라는 세 가지 맥락 속에서 수많은 대중이 불안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떠밀려 나가고 있는 사회현상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광일,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 프레카리아트 형성과 ‘해방의 정치’, ‘마르크스주의연구’, 10권 3호, 2013)

사진출처:유스라인

오늘날의 한국을 살아가는 청년은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비연애, 비혼, 비출산을 강요당하고 취업, 내집 마련,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N포세대’라 불리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청년들에게 풍족한 여가는 동영상을 통해 대리 체험하는 비현실적인 환상이죠.

저임금 노동은 더 높은 강도의 노동을 강요하고, 비정규직의 불안정성은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정규직이 되기 위해 준비할 것을 강요하며, 높은 주거비와 치솟는 생활 물가는 그나마 청년이 축적해 놓은 미미한 가용 자원을 박탈합니다.

통계청이 제공하는 ‘2017년 가계금융/복지 조사’에 따르면 30세 미만 가구주의 평균 부채는 2016년 1,681만원에서 2017년 2,385만원으로 41.9% 증가했으며, 30대의 평균 부채는 2016년 5,920만원에서 2017년 6,872만원으로 16.1% 상승하였습니다.
전체 가구 평균 부채 증가율인 4.5%에 비하면 10배이니 청년층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일상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 (2-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