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지키는 사람, 고바야시 야스오(小林保雄)

아이키도(合氣道)를 소개하는 세계적 유명 잡지인 ‘아이키도 저널’지에 올라온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에 대한 글 입니다. 글의 저자는 아이키도 저널의 편집자인 스텐리 프래닌 씨로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이 아이키도 세계본부도장에 지도사범으로 있었을 때 입니다. 스텐리 프래닌씨가 느끼는 30대 초반 때 고바야시 야스오(小林保雄) 선생에 대한 글 입니다.

1969년의 첫 만남.

저와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1969년 여름 도쿄의 아이키카이 본부 도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아이키도 수련을 위해 10주 동안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오기 전 두 통의 추천서를 받아 왔습니다. 한 통은 도주이신 기쇼마루 우에시바께,  또다른 한 통의 추천서는 코이치 토헤이 선생에게 올리기 위한 추천서였습니다. 두 통의 추천서는 일본에서 아이키도를 수련하고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님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려는 일본 방문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본부 도장에서의 수련은 너무도 즐거웠습니다. 제가 참여한 수업 중에는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님의 지도 수련도 있었습니다. 계고 중 수많은 수련생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지도하시고 수신을 받아주시는 30대 초반의 인간적이고 털털한 성격의 지도원으로 기억합니다.

일본에서의 체류가 끝나갈 무렵, 훌륭한 수련에 참여하는 좋은 기회는 많았지만, 창시자에 관한 역사 자료를 찾고 연구하려는 기획은 실망스럽게도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부 도장을 통해 구할 수 있는 자료는, 그 즈음 가네모토 스나도마리가 집필한 서적이 유일하여, 창시자와 오모토 종교와의 관계를 주제로 하고 있어, 창시자의 삶의 측면의 연구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획한 연구에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에 상당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아이키도 세계본부도장 고바야시 야스오 사범

당시 일본어에 대한 이해도가 그리 충실하지 못해, 정황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찌된 일인지 고바야시 선생님께서는 당시에 새로 개업한 자신의 개인 도장에 저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고바야시 선생님의 도장은 신주쿠에서 기차로 약 45분 거리에 있는 고다이라 시에 위치해 있었고, 도장은 선생님의 자택에 추가로 증축된 건물이었습니다. 이 평범한 타다미 20조 크기의 도장은 그가 이후에 설립할 아이키도 고바야시 도장 네트워크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고바야시 선생님의 수련 초청을 받아 친숙한 환경에서 계고에 참여하는 기회를 받아 저에게는 한없는 영광이었습니다. 계고를 마치고 아이키도의 역사에 대한 나의 관심사를 알아채신 고바야시 선생님께서는 수십 장이 넘는 창시자의 사진이 담긴 사진첩을 꺼내셨습니다. 이토록 훌륭한 창시자의 사진첩을 접해 본 적이 없는 저는 사진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어 흥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쁘고 놀랍게도, 고바야시 선생님께서는 사진첩에서 창시자가 장을 휘두르는 멋진 사진 한 장을 꺼내어 제게 선물하셨습니다. 이 사진이 이후에 수천 개의 항목으로 확장될 창립자의 사진 모음집인 ‘아이키 뉴스’의 시초였습니다. 저는 당시의 고바야시 선생님 부부의 환대와 친절을 언제까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1회 아이키도 친선 연무 행사의 미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1st Aikido Friendship Demonstration, April 7, 1985

1977년 일본으로 영구 이주한 뒤 매년 아이키카이(合氣会) 행사장과 이와마 타이사이에서 고바야시 선생님을 몇 차례 더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1985년 1월, 저는 고바야시 선생님의 아이키도 고바야시 도장의 확장과 보급의 주제와 함께 아이키도 경력의 시작과 최근 활동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인터뷰는 그해 말 아이키 뉴스 70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이 인터뷰가 행해진 시점은 우연히도 저희가 기획한 여러 아이키도 조직단체에서 초빙한 명망높은 아이키도 선생님들께서 한 자리에 모이신 대규모 공개 연무 행사와도 일치하였습니다. 우리가 연락을 드린 7명의 선생님들께서 아이키도의 공동 무대를 만들어 보자는 요청을 수락하셨고, 초대 선생님들 중 한 사람이 다름아닌 고바야시 선생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단체의 유명 인사들이 함께 연무하는 공개연무의 개념은 관계자들로부터 열띤 호응을 얻어 내지는 못했습니다. 배후 관계자들이 주요 초청 명사들로하여금 친선 공개 연무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종용하는 압력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공개 연무 철회의 압력을 받고 이에 설득된 인물 중 한 사람은 오늘날에도 많은 아이키도 관계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선생님의 참가 철회의 소식은 제가 해외 여행을 하는 동안 전해졌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저는 그가 철회 결정을 재고하도록 설득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서둘러 만남을 주선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에 다소 혼란스럽고 당황한 그는 자신이 교묘하게 말려든 어색한 상황을 설명했고 우리의 대화 도중 잠시나마 자신의 거취에 대해 포기한 듯한 의사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아, 제가 보는 앞에서 전화를 걸어 탈퇴를 요구하는 당사자와 그 문제에 대해 조금 더 논의한 후, 유감스럽게 불참을 통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명예와 신의를 고수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얼마후 저에게 공식적인 사과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뒷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다음해에 이 선생님을 또다시 초청하였고 약속을 지켜주신 선생님께서는 1986년 제2회 친선연무에서 멋진 공연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쨌든 이 선생님의 탈퇴 결정으로 다른 초청자들은 그야말로 ‘공황’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나머지 4명의 선생님들은 정황을 고려하시면서 친선연무의 참여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셨습니다. 이에 아이키 뉴스는 극도로 취약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행사를 위해 사용될 대규모 시설에 대한 사용 계약에 서명하고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상당한 금액이 광고에 이미 투입되었고 입장권 수익으로 소정의 액수의 돈을 수령한 상태였기에, 친선 연무가 취소될 경우 이 모든 금액을 변상해야 했습니다.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 개인적으로 연락을 받아 연무에 불참하도록 설득당하고 있던 여러 선생님들 중 한 명이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님이었습니다. 참여 철회 압력에 대해 고바야시 선생님께서는 극히 간단한 대답으로 의사를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이미 참여하기로 약속했고 따라서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고바야시 선생님의 강건한 원칙적 입장에 고무되어, 우리는 참여 철회를 고려하고 있는 다른 초청자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취했습니다.
고바야시 선생님의 친선 연무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예로 들어 친선 연무 참여를 위해 그들의 의지를 다시금 확인하고 종용하여 마침내 차례차례 설득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관계자들이 언급하듯, 이후의 사건은 문자그대로 역사가 되었습니다.
1985년 4월 7일, 제1회 아이키도 친선 연무가 도쿄에서 개최되었으며, 9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당시의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님의 용기와 성실에 대하여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선생님의 용단에 대한 저 개인적인 빚은 영원히 잊혀지지도 보답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키도 고바야시 도장

제1차 친선 연무가 개최되었을 당시 고바야시 선생님은 이미 ‘아이키도 고바야시 도장’이라 불리는 아이키도 교육기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계셨습니다. 이 조직은 1969년에 평범하고 자그만 자택에 딸린 도장으로 시작되어 눈부신 확장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고바야시 선생님께서는 이미 전문 지도원을 양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능동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고바야시 선생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매력적인 성격과 조직 구성력은 스스로를 향한 자신감으로 작용하였고, 아이키도계의 여러 조직을 규합하는 역할에 있어서 선생님을 확고하고 중심적인 위치에서 활동하실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내면의 힘은 앞서 언급한 에피소드에서 잘 나타나듯이 모범적인 행동과 태도를 통해 충분히 입증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1989년에 아이키도 고바야시 도장의 내부적인 메커니즘을 직접 목격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단체의 20주년 기념 연무를 기획 단계에서 주어진 기회로서, 우리는 연무 행사를 녹화하여 일본과 해외에서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행사 기획을 위한 아이키도 고바야시 도장의 전문 지도원 주례 회의에 참석하도록 초청받았습니다. 이들은 고바야시 선생님의 훈련을 마치고 고바야시 도장 체계의 핵심을 이루는 위성 도장을 운영하던 지도원들이었습니다. 회의를 참관하면서 지도원들 간의 긴밀한 협조와 조직 활동에 대한 업데이트 보고, 그리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의 관찰은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이 모임은 고바야시 선생님께서 모두를 친절하게 대하는 비공식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공통의 목적을 위해 모인 이 긴밀한 집단의 응집력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긴밀한 협의의 결과로서의 20주년 기념 연무 행사는 당시의 도주이셨던 기쇼마루 우에시바 선생님을 비롯한 국내외 2,000여 명 이상의 인원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이키 엑스포 2003 참여

Yasuo Kobayashi at Aiki Expo 2003

고바야시 선생님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의 도장 연합은 이미 90개소 이상으로 확장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의 아들 히로아키가 도코로자와 도장의 지휘를 맡게 되면서 그의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달 [2002년 9월] 제가 33년 전에 문을 두드렸던 코다이라 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으며, 아이키 엑스포의 개념을 설명드리고 2003년 행사에 고바야시 선생님을 라스베가스에 초대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2003년 아이키도 엑스포에 고바야시 선생님을 초대할 수 있어 무한히 기쁩니다. 아이키도에 있어서의 선생님의 삶은 무도의 이상을 구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헌신과 대인관계의 기술은 가히 귀감이 될 것이며 그의 성공은 선생님의 접근법의 효율성에 대한 살아있는 입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Stanley Pranin

윤준환 편집장
대한합기도회 사무국장 및 대한합기도회 중앙도장 도장장 2013년 러시아 월드컴벳게임즈 한국대표로 참가 세계본부도장에서 내제자 생활을 했음 ※ 중앙도장 위치 ※ - 서울시 동작구 사당로 28길 6 (3층) - 4.7호선 총신대입구(이수)역 9번출구 도보 3분거리 - 수련문의 : 02 - 3444 -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