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코와 능지의 에로티즘(2-1) -조현일 에세이

라스코 동굴벽화

몽티냐크에 살던 18세 마르셀 라비다와 15세 자크 마르상과 시몽 쿠엥카, 그리고 16세 조르주 아넬은 아무런 즐길거리가 없는 시골의 전형적인 십대답게 모험심이 투철하고 호기심이 넘쳐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근처 마을인 베제르 교외의 숲을 하릴없이 헤매이던 라비다는 우연히 1940년 9월 12일 나무뿌리가 뽑혀 생긴 구덩이를 발견하고 친구들을 불러 모읍니다. 너무도 당연하게도 위험하니 접근하지 말아야 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호기심에 깊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구덩이에 애지중지하던 양 한 마리를 묻어 무덤을 만들어 놓았던 양치기 노파는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을 쫓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무서운 전설과 괴담을 늘어 놓기로 마음먹습니다. 노파는 그 구덩이가 중세 시대의 지하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동굴은 이웃 동네 라스코의 언덕 발치에 있는 작은 성으로 이어져 있다고 말해주며, 동굴에는 귀신이 깃들어 있어 유약한 영혼을 잡아 먹을 것이며 성에는 고문으로 죽어간 죄수들의 원혼이 기다리고 있다며 으름장을 놓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노파의 디펜스에도 불구하고 네 소년은 면밀한 중세 지하동굴 탐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라비다가 언제나처럼 탐험대장이었기에 아버지 몰래 램프를 가져와 어두운 발치를 밝히는 리더쉽을 발휘하였습니다. 귀신 탐험에 흥분한 아이들이 예술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하여 미술사 서적에 그 이름들을 길이 남길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겠죠. 무저갱처럼 깊어만 보이던 구덩이는 사실 지름 80센티미터 정도였고 깊이도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나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입구여서 노파를 비롯한 어른들은 동굴 입구만 보았을 뿐 좁은 통로로 들어가 볼 엄두도 내지 못했었죠. 쓸데없이 용감했던 라비다는 구덩이 안쪽으로 머리를 집어 넣어 더 작은 구덩이와 통로를 발견하고 구덩이 입구를 삽으로 파 넓혀서 원추 모양으로 우묵하게 패인 모종의 공간에 이르게 됩니다. 랜턴을 들고 숨을 죽여 당도한 바로 그 장소에서 아이들은 태고의 벽화를 발견합니다.

초등학생이 크레용으로 그린 듯 미숙한 터치이지만 분명히 동물들과 인간의 형상이 동굴 벽면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라스코 마을의 근처 브리브의 장 부이소니 신부의 집에 체류 중이던 선사학/고서화 전문가 브뢰유 신부는 닷새 뒤인 9월 17일에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여 한달음에 달려 21일 현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브뢰유 신부가 도착한 당시 라스코 동굴벽화의 발굴은 이미 완료되어 있었습니다.

소년들과 그 부모들이 마치 노다지를 발견한 듯 대단한 관광상품을 독점하기 위해 입구를 정리하고 동굴 옆에 진을 치고 입장료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동반하지 않고는 동굴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몽티냐크는 작은 도시이긴 했지만 소문이 빨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굴벽화를 관람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고, 그중 소수만이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었기에, 다행스럽게도 동굴벽화는 크게 훼손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발견한 어린 소년들의 ‘헌신’ 덕에 라스코 동굴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죠. 노다지 관광상품을 발견해 일확천금을 노린 욕심많은 십대 소년들 덕분에 말입니다. 전문가답게 브뢰유 신부는 라스코 동굴 벽화를 찬찬히 둘러보며 그림을 해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십 개의 벽화가 발견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크게 주목받은 그림은 들소와 남자의 형상이었습니다. 브뢰유 신부는 이 이미지를 복잡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에피소드적인 표현으로 간주합니다.

‘아마도 사냥 중의 치명적인 사고를 추모하기 위한 그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널부러져 있는 남자의 형상으로 미루어 남자는 들소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부상을 당했는데 들소 역시 옆구리에 투창을 맞았고, 상처 틈으로 내장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투창 한 방에 들소의 배가 찢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당시의 창이 그리 날카롭지도 않았기 때문에 브뢰유 신부 스스로도 자신의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남자의 왼쪽으로 종종걸음치며 멀어지고 있는 코뿔소는 자신을 위협하던 사냥꾼이 쓰러져 죽은 광경을 보고는 자기가 아닌 들소가 희생된 상황에 내심 기뻐하며 문제의 장소에서 조용히 멀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투창기로 보이는 ‘단단한 갈고리가 달린, 반대쪽 끝에는 가로 창살이 대어진 짧은 물건’ 옆에 ‘아랫부분에 가시가 달린 말뚝 위에 다리도 없고 꼬리도 거의 없는, 통념상 새와 같은 것이 올라앉아 있는’ 형상이 보입니다.

과연 이 분야의 전문가답게 브뢰유 신부는 이 솟대가 알래스카의 에스키모나 밴쿠버 원주민들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장례식용 말뚝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상당히 예외적으로, 이 형상은 ‘그려져’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다른 이미지들이 암벽에 돋을새김이나 저부조로 조각되거나, 벽면에 장식된 경우 암각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라스코 드로잉의 형식은 특이합니다.

인간의 형상은 검은 색 굵은 선으로 그려져 있어서, 쉽게 해독되기는 하지만 그 기법이 경직되고 초보적이기에 무언가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남자 옆에 그려진 들소는 대단히 생동감 넘치는 사실주의적으로 표현되어 있기에 대조적입니다. 남자의 머리는 비정상적으로 작고 ‘곧은 부리를 가진 새 머리를 닮아’ 있습니다. 남자와 들소의 이미지는 단순 병치도 아니고 각각 독립적으로 무관하지도 않은 듯 하지만, 전체적으로 모호한 특성을 가지며 인간의 표상과 짐승의 표상이 너무나 다른 혹은 역설적인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해석자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들소는 어린이의 그림에서 흔히 나타나는, 시선의 방향에 따라 보이는 부분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물의 특색을 살리는 방향에서 표현하는 방법인 ‘지각적 사실주의’를 취하고 있습니다. 브뢰유 신부의 초동 조사의 논문을 기반으로하여 선사학자 키르히너는 1952년 ‘안트로포스’ 지에 기고한 긴 논문 ‘선사시대 샤머니즘에 대한 고고학적 기여’에서 흥미롭고 설득력있는 분석을 내놓습니다.

키르히너는 라스코 동굴벽화의 이미지에 나타나는 ‘죽어있는 남자’와 내장이 흘러 나와있는 들소의 에피소드는 절대로 사냥에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며, 들소 옆에 누워있는 남자는 시체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 남자는 신들린 상태로 황홀경에 이른 순간의 샤먼이라는 것이죠. 키르히너는 라스코 문명과 오늘날 시베리아인 야쿠트 문명 사이의 유사한 관계에 대해 다년 간의 연구를 해 온 전문가로서, 야쿠트 족의 희생제의에 정통해 있었습니다.

주술적인 희생제의에서 법열法悅 상태에 이른 샤먼은 황홀경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때 의식을 상실한 샤먼이 희생양으로 사용된 들소 곁에서 엑스터시에 빠져 있는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야쿠트 제의에 사용되는 희생양의 제단 옆에 조각된 새들이 꽂혀 있는 말뚝 세 개를 꽂게 되어 있는데, 이 말뚝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지향하는 데 사용되며, 이 길을 통해 샤먼은 희생된 동물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대리인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새들은 승천의 보조 역할을 하는 정령들로서, 이 새들 없이는 샤먼은 하늘로의 여행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여행은 샤먼이 꼼짝않고 누워 있는 동안 완료되기 때문에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샤먼이 기절했다고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새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샤먼들이 황홀경 상태일 때 상상속의 새들의 등장은 매우 일반적이라고 하죠. 라스코 동굴벽화는 선사시대 동굴 중 가장 풍부한 벽화를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며, 인간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직접 감각할 수 있는 태초의 기호입니다.

예술 작품의 구성요건이 ‘작가의 제작 의도’의 유무라고 한다면 엄밀히 말해 라스코 동굴화는 예술작품의 범주에는 넣을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당시의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예술’이라는 개념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학계의 다수의견이 지배적이니까요. 하지만 분명히 예술작품과 예술행위의 시작점의 직전에 위치하며 모든 시작은 그 이전을 전제로 하니 그 의미는 결코 무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스코 동굴 벽화의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하든 벽화를 그린 천재적 재능의 소유자인 네안데르탈인의 작화의도를 들을 수 없으니 의견은 분분할 수 밖에 없을 것이지만, 이미지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날것의 ‘폭력성’은 보는 이에게 즉각적으로 전달됩니다.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의 주제가 잔인한 ‘폭력’이라니 아이러니와 함께 서글퍼지기도 합니다만…

라스코는 여러가지 의미와 맥락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금기에 관한 인류학의 기존 통념을 무너뜨린 중요한 지표로도 간주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저서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차지연 역, 워크룸프레스, 2017)에서 이 의미와 맥락을 철저히 분석하고 있죠. 주제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2-2에서 계속>

출처:인문365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