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역사(2-2) -조현일 에세이

폭력을 수반한 정치적 힘에 의해 수립되고 외부적인 압력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는 농경국가에서 전쟁은 국가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땅과 농민은 부의 제일 원천이었으므로 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군주가 보다 많은 부를 획득하고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경국가는 평상시에는 농민이던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여 인접 국가를 무력으로 제압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전쟁 사업이 당연히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복지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선’한 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시간이 흐르자 점차 자동화된 개념으로 정착하게 되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개념고착을 ‘전쟁 기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농경국가의 군주와 신민은 기계적으로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과 외적과 맞서 자신들의 영토를 수호하기 위한 방어전을 일상적으로 수행해 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주 입장에서도 영토 정복을 통해 생산이 늘어 신민이 납부하는 세금이 늘테니 전쟁은 농경왕국이 세입을 늘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모든 농경 경제에 없어서는 안될 필요악이었습니다.

어떤 국가도 군대 없이는 생존할 수 없었기에, 일단 농경국가가 어느 정도 성장하여 전쟁이 삶의 일상적 조건이 되면 더 큰 힘을 희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투여되어 군사적 동맹과 연합이 보다 큰 군사연합체, 즉 봉건연방을 형성하고 이어 연방의 연합인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은 더이상 소규모 농경국가도 아니고 제국의 군사력에 맞설 외적도 없는 상황에서 형성된 기형적인 국가체제입니다. 더이상 필요없는 군사체제가 농경사회를 넘어선 산업사회에까지 연장된 배경에는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위협과 도발에 대처하기 위한 강력한 군대라기보다는 ‘군을 위한 군’이라는 전쟁기계적인 관념이 주도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적 힘이 필요한 왜곡된 형식이죠.

라틴어 경구 ‘Si vis pacem, para bellum’, 즉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얼핏보기엔 언어도단처럼 들리는 이 모토가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총탄의 브랜드명이라는 사실도 슬픈 아이러니입니다. 여기에는 필요악으로서의 전쟁의 진의를 잘 알면서도 제국에 봉사하는 일군의 인문학자들의 성원이 한몫했다고 생각됩니다. 이들 역사가들은 하나의 국가 혹은 그보다 큰 형식의 제국의 융성에 군사력은 ‘필수적’이었다고 규정하고 제국의 군국주의를 문명의 표지로 간주합니다.

<사진출처>크라우드픽

규율과 복종심을 갖추고 사회의 질서를 수호하고 법을 지키는 군대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인간사회는 원시수준으로 남아 있거나 쉴새없이 소규모 전쟁을 벌이는 유랑민 무리로 전락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폭력적 충돌과 동정적 충동 사이의 내적 갈등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목적과 폭력적 수단 사이의 모순은 여전히 혹은 영원히 해결되지 못하였거나 해결불가능일 지도 모른다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역사적 현실이 슬프죠. 그러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면 평화를 위한 폭력이라는 언어도단에 빠지는 딜레마 아닌 딜레마를 슬기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면적인 폭력행사를 슬쩍 회피하여 선혈이 낭자한 전형이 아닌 조화와 화합, 소통과 화해가 드물지만 발견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 사서 ‘좌전’에는 악백樂伯과 섭숙攝叔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초나라 장수 악백은 섭숙이 모는 전차를 타고 진晉의 진영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진의 장수 포계의 공격을 받아 포위되었습니다. 악백은 뛰어난 활솜씨로 진나라 군사들을 막아보았지만 진의 좌우 협공을 당해 화살이 하나 밖에 남지 않게 되어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기지를 발휘해 우연히 자신들의 앞을 막은 사슴을 맞춰 섭숙으로 하여금 그 사슴을 적장에게 바치게 하였습니다.

섭숙은 자신들을 추적해 온 포계에게 ‘사냥할 때가 아니어서 바칠 것이 없기에 감히 짐승을 바칩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악백과 섭숙이 자신에게 바치는 사냥감을 보니 악백의 화살의 기운이 보통이 아님을 간파하였습니다. 또한 포계는 악백과 섭숙이 비록 왕명을 받아 진에 공격을 해 왔지만 싸울 의사가 없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포계는 추격을 그만두고 악백의 활솜씨와 섭숙의 말솜씨를 칭찬하였고 악백은 포계에게 예를 갖추고 진으로부터 군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출처:구글캡처>흐루쇼프와 케네디 ​

임기 2년차를 맞이한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1962년 10월 16일 아침 동생인 로버트 법무부장관으로부터 ‘CIA의 첩보에 의하면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 중’이라는 급보를 받습니다. 급하게 회의가 소집되었고 CIA는 미정부고관에게 쿠바에 미사일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을 정식으로 보고하였습니다.

미국과 그리 멀지 않은 쿠바에 핵미사일이 배치된다면 미국은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 사정거리에 노출되고 맙니다. 케네디는 대응책을 검토하기 위해 외교와 군사전문가 뿐만아니라 쿠바의 상황에 정통한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소집하여 엑스컴ExComm, 즉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를 결성합니다. 미국으로서는 쿠바의 핵배치를 모른 척할 수도 없지만, 이러한 전면적인 도발이 처음이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쉽게 결정내릴 수 없었습니다.

쿠바로부터의 핵공격으로 최소 8천만 명의 자국민 희생을 예상할 수 있었기에, 역사상 가장 심각한 군사적 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엑스컴의 참가자들 각자 담당 부문의 대변자로서 회의에 참가하지 말고 미국의 국익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일반론자generalist로서 회의에 참여할 것을 명했습니다. 각자 전문분야에만 발언하고 반론을 하지 않는 관료적인 태도가 아니라 ‘미국의 안전보장’이라는 궁극적 문제에 적극 대응하는 태도를 취하라고 지시하고 심복인 법무부장관 로버트 케네디와 대통령 고문인 테드 소런슨에게는 ‘악마의 대변인’ 역할, 즉 논의의 약점을 찾기 위한 ‘반론을 위한 반론’을 던지는 역할을 맡으라 명했습니다.

‘악마의 대변인들’은 회의 중에 나온 제안들의 위험 요소를 색출해 철저히 규명하였으며, 이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위원회에서 제기된 의사결정의 질이 향상될 수 있었습니다. 논의 초기에는 미국의 미사일로 선제공격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데 의견이 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면적인 군사적 도발에는 전면전이 답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명확한 폭력 의사에는 당연히 보다 강력한 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악마의 대변인들’의 반박을 받은 엑스컴은 논의 개시 후 하루가 지난 저녁에 쿠바의 해상 봉쇄로 선회할 수 있었습니다.

전면전이 아닌 간접적인 군사 행위인 봉쇄로 소련과 대화의 물고를 터 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해상봉쇄에 찬성하였지만, 군산복합체의 관련인들은 ‘선제 공격’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었죠. 해상봉쇄 지지파의 논거는 최종적으로 무력적인 수단을 강구해야만 한다 하더라도 초기단계에서 이 수단에 착수할 필요는 없으며, 합동참모본부의 첩보를 빌어 ‘미사일 기지’만 선제 공격으로 파괴한다고 해도 군사적으로는 무의미하여 결국은 쿠바의 모든 군사 시설 공격을 목표로 본토 침공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소련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진: 소련에서 R-14형 핵탄두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했던 폴타바호. 핵잠수함들이 호위를 했었다. [실제 핵전쟁 사태 – 쿠바 미사일 위기] / ⓒ wikimedia.org)
여기서 말하는 ‘전면전’은 상호확증파괴, 즉 세계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거대군사국인 소련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려면 먼저 공격을 감행해서는 안되었습니다. 반면 선제공격 지지자는 이미 미사일이 쿠바로 이동한 이상 해상 봉쇄를 실시해도 미사일 철거가 실현될 수 없으며 해상을 봉쇄하여 쿠바로 향하는 소련의 뱃길을 막는다면 소련의 군사개입을 부추기게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무력사용에 관한 선제공격 지지파와 해상봉쇄 지지파의 논거는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합동참모본부의 구성원은 전원의견일치로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대통령에게 건의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케네디는 ‘선제공격은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도박이며 모든 가능성을 철저히 검증하기 전까지는 무력 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정무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의 결과는 아시다시피 흐루시초프 서기장과의 대화를 통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평화로운 해결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제후들이 전쟁을 일으키며 시체가 쌓이고 강이 피로 물드는 난세를 살았던 공자는 ‘예禮’를 제대로 이해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다른 각도에서 상황을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가 습관이 되면 군자君子는 정국을 분열시키고 있는 자기중심주의, 탐욕, 이기심을 초극超克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스스로를 제어하고 예로 회귀하는 태도’

제자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는 ‘스스로를 제어하고 예로 회귀하는 태도’이라고 대답합니다. 군자는 스스로의 삶을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의미에 바쳐야 하나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성을 다듬어야 합니다.
탐욕과 폭력, 그리고 천박함을 버릴 때 삶에 위엄과 품위를 복원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상적인 인간성에 뿌리를 두는 공자의 ‘인’은 군자가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에 쉽게 성취할 수 있는 이상이 아니었죠. 전국을 돌며 그토록 열심히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였던 공자지만 전쟁이라는 전염병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폭력에도 백신이 필요한 걸까요.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