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수용-조현일 에세이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저서 ‘팬데믹 패닉’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저서 ‘팬데믹 패닉’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물으며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2020, 6, 7) 사회심리학자 퀴블러로스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개인이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섯 단계의 도식으로 제안합니다.

첫번째 단계는 주어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부인否認. 그럴리가 없어. 두번째 단계는 부인하던 사실에 대해 더이상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화가 치밀고 종국에는 폭발하는 단계인 분노. 도대체 누구 탓이야.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건 분명히 그 사람 탓이다. 세번째 단계는 주어진 사실을 어떻게든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라 가치 축소하고 치부하기를 희망하는 단계인 타협. 괜찮아, 일이 별로 틀어진 것도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상황에 빠진 일이 많이 있을 테니. 큰 후유증도 없을 거야. 극복할 수 있어.

네번째 단계는 리비도 투자가 철회되는 단계인 우울. 아,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모두 다 내 탓이지. 다섯번째 단계는 마지막 단계로서 수용. 이제 더이상 싸울 수도 없고 대항할 힘도 없어. 이제 모든 건 끝이다. 그러니까 모든 걸 받아들이자. 퀴블러로스는 부인-분노-타협-우울-수용으로 이어지는 다섯 단계를 개인적 상실, 실직, 가족과 지인의 사망, 이혼, 약물중독 등 모든 파국적 양상에 해당하는 도식으로 적용 범위를 확장하였습니다. 또한 이 단계도식이 반드시 동일한 순서로 진행되지는 않으며 모든 환자가 다섯 단계를 전부 거치는 것도 아니라고도 지적하였습니다.

코로나 창궐 2년

코로나 창궐 2년이 된 2021년 가을 오늘날의 우리는 지젝이 인용하는 퀴블러로스의 도식에 따라 팬데믹이라는 심리적인 불안과 공포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는 주지의 사실을 고려할 때 이 논의는 시의적절한 레퍼런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특정 사회 체제가 트라우마라 불릴 만한 재앙이나 참사를 경험할 때 이와 유사한 다섯 단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생태적/환경적 재앙의 위협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위협을 부인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전문가가 지적하는 재앙의 발생 가능성에 대해 그저 피해망상일 뿐이라고 치부하죠. 일본의 지진학자들의 경고를 애써 무시하는 일반 시민들의 태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구온난화의 문제에 있어서도 모두 기후 패턴의 일상적인 섭동攝動이며 특기할 만한 변화가 아니라고 애써 가치절하합니다.

다음 단계인 분노. 환경을 오염시키는 거대기업과 재앙 위협을 무시하는 정부에 대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핵실험을 하는 북한에 대한 의미있는 이의 제기와 비난도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타협. 쓰레기 재활용으로 시간을 벌어봅시다. 탄소발자국을 계산하여 비용을 부가함으로써 화석연료 연소를 억제합시다. 기후가 따뜻해지면 식용작물 재배도 쉬워지고 식량문제도 해결될 지도 모르지. 아직 괜찮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우울 단계. 아아, 너무 늦었구나.

타개할 것인가 아니면 체념할 것인가

기후 변화도 지각 변동도 막을 방법이 없어. 인류는 이렇게 절멸하는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용. 심각한 위협에 대해 대처 방법을 구체적으로 강구해야만 한다. 모든 이가 협력하여 방법을 찾아보자.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의 방식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어. 잘못을 찾고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마지막 수용 단계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이해하고 방안을 찾아가는 태도에는 사회 체제마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저항하여 타개할 것인가 아니면 체념할 것인가. 혹은 이 범주들에 포함되지 않는 대체적인 태도의 가능성은?

퀴블러로스의 도식을 통해 지젝은 2019년 말 폭발적으로 확산된 코로나팬데믹에 우리가 대처하는 방식이 도식에 정확히 들어맞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식의 마지막 단계인 수용이 어떻게 발현될 것인가에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지젝은 팬데믹의 수용 과정에서 프랑스의 노란조끼 시위와 홍콩의 민주화 시위 등의 사회적 저항들로 대표되는 ‘저항抵抗’의 양상이 수용과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위들은 이전의 저항의 역사적 사례들처럼 폭발적으로 발현되고 확산되었다가 희석되지 않고 꾸준히 연속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을 지언정 우리 삶에 항구적 두려움과 체제의 취약함에 대한 불신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출처:네이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은 지젝은 저서 ‘팬데믹 패닉’에서 우리가 드디어 생명(사회)의 하부층위, 즉 죽지 않고 계속 반복하며, 유성생식을 하지 못하는 바이러스의 층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말합니다. 항상 지표면에 있어왔으며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다가 불현듯 인류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고 가장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폭발하는 층위의 존재를, 부인否認과 망각妄覺의 대상이 되는 엄연한 존재를 겸허하게 수용해야만 한다는 주장입니다.

어찌보면 우주의 중심이라 굳게 믿었던 인간이 태양의 행성에 거주하는 미천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태양계와 은하계마저 광대한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미미한 점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가 외부가 아닌 지구 생태계 내부에서도 확인되는 시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코로나 팬데믹의 창궐은 인류의 자기인식을 북돋는 철학적 방아쇠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바이러스는 어떠한 악의도 가지지 않고 목적도 가지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존재이지만 우리에게는 삶의 궁극적 우연성과 무의미를 상기시켜 주는, 인류가 아무리 웅대한 정신적 결과물을 구축한다고 하여도 예상치 못한 한순간에 절멸의 나락奈落을 향해 끌어 내릴 수 있는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회의론자와 운명론자들은 지금 인류의 진보적인 행보에 저항하고 공동 생태의 모든 방식을 거부하며 개개인의 삶을 변화시킨다 한들 우연하고 불가피하게 엄습하는 팬데믹의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방법은 없다는 체념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퀴블러로스의 5단계설에 따르면 우리는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이제야 접어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단계격상에도 불구하고 도장에서 수련을 계속해 나가는 도우들께서도 이와 같은 수용과 선택을 해야 하는 반강제적인 상황에 처한 경험을 기억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마스크 방역 수련모습

수백 명의 확진자, 아니 최근에는 수천의 확진자가 발생하며 백신의 수급 부족으로 목말라하면서 실내체육활동의 제한 조치와 방역수칙에 따라 수련 중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최악의 조건에 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스크 착용 수련’이라는 수용의 태도를 선택하였습니다.

2년 전 ‘앞으로 일주일 동안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련할 것’이라는 지침을 접하곤 일시적인 조치로 간주하였지만,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마스크를 벗지 못했으며, 아직 언제쯤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지도 미지수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수련을 포기하는 니힐리즘적/운명론적 선택이 아닌 강제적인 조치를 수용하고 근거없는 낙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제3의 수용을 선택하는 태도의 가치입니다.

팬데믹의 창궐과 바이러스 확산을 어떠한 이유로 걱정하여 수련을 포기하거나 기피하는 개인의 선택을 비난하거나 평가절하해서는 안됩니다. 개개인의 선택은 어떠한 이유가 되었건 존중되어야 하며, 일방적인 가치체계를 적용하여 오도誤導하는 태도야말로 팬데믹에 대처하고 저항하는 선택지 중에서도 최악의 방법론이라 할 것입니다.

다만 지젝의 주장에 기반하여, 마스크 수련의 수용적 선택의 저항의 태도의 가치를 주장할 뿐입니다. 팬데믹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는 개개인의 선택이지만 집단적인 태도와 패턴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하나하나의 선택이 전체적 양상을 결정하는 소중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했던 하층위의 바이러스의 창궐, 혹은 생태/환경적 재앙을 유연하고 포용적인 태도로 수용하는 ‘상상력’이 생명의 우연성과 니힐리즘에 맞서는 용기로 승화되기를 우리 모두가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